카메라 메모리 카드에 들어와 박힌 수백 장의 사진들을 정리하다 한 장의 사진에 눈이 멎는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하라레 인근 한 조각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인 것 같다. 마샤야 브라더스 중 한 명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얀홍고 패밀리 중 한 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워크숍에 있는 작품 외에 집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 작품들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을 것이다. 작가와 그의 집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딸아이가 사뭇 불안한 눈길로 나를 주시한다. 아니,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게 아니라 혹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싶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중이다. 불현듯 집에 들이닥친 외계인 같은 노란 얼굴의 남자로 인해 집안에 불행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낯섦으로 가득한 공간이나 대상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두려움들을 유발시켜 나는 아프리카의 많은 아이들을 울렸다. 낯섦으로 가득한 세계가 마냥 새로울 것이라는 기대와 호기심, 이를테면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은 그 세계가 낯설기는 하지만 비교적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심 간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저 아이의 눈은 낯선 세계에 대한 아무런 정보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그야말로 ‘벌거벗은 눈’이다. 미숙한 존재에게 세계는 저토록 불안한 것이다.
우주선이 달을 건드리듯, 신비와 공포에 싸인 미지의 장소에 작은 상처를 남기고 돌아오듯, 우리는 그렇게 무모한 여행을 떠난다.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고 우주처럼 넓은 공간으로 무모한 여행을 떠난다. 너의 몸뚱이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거다. 사랑하는 나의 우주에 내 손 자국을 남겨 그렇게 하나가 되고 싶은 거다.
이 매혹적인 문장은 존 업다이크(John Updike)의 것이지만, 이 문장을 담고 있는 업다이크의 『돌아온 토끼』는 국내에서 번역된 일이 없다. 그의 유명한 토끼 시리즈 가운데 첫 권인 『달려라 토끼』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며, 위 글은 오래전 <문학사상>에 연재되었던 김한길의 『미국일기』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신비와 공포에 싸인 미지의 장소’ 내겐 아프리카가 그랬다. 아프리카에서 나는 여리고 미숙한 존재였던 것이다. 처음 그곳에 발을 디뎠을 때, 내 머릿속에 박혀 있던 아프리카에 대한 이미지들이 전혀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전혀 아는 바 없음’은 머릿속을 비워야 하는 수고를 감내하지 않아도 되므로 ‘잘못 알고 있음’보다 차라리 나은 것이었다. 머릿속에 박힌 정보의 오류는 딜리트 키 하나로 간단히 해결되지 않아서, 나는 먼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의 첫날밤은 한여름이었음에도 생각보다 서늘했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친절했지만 생각보다 셈에 밝았으며, 충분히 감안했음에도 생각보다도 느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도 다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달랐다. 한 마디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곳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흩어진 구슬들을 꿰맞추듯 힘겹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던 건, 달을 건드리고 싶은 우주선의 열망, 아프리카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욕망이 내 안에 드글드글 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모든 것이 무모하다 싶었다. 밤마다 몸은 곤죽이 되었고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갔으며, 일도 내 인생도 엉망이 되겠구나 싶은 두려움이 아프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뒤섞인 욕망과 두려움은 와인과 막걸리의 칵테일처럼 시큼털털했고 역한 냄새를 풍기며 무겁게 머리를 짓눌렀다. 기댈 곳도 오갈 곳도 없는,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던 객지에서의 밤들이 이런 생각들로 채워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모든 환경과 조건들이 다르고 소통마저 불가능한 어떤 세계에 불시착한 것이라면, 가령 내가 있는 이곳이 태평양 한복판의 무인도라면, 동물들만 우글거리는 아마존 깊은 어느 곳이거나 사하라 사막의 학교 운동장만 한 오아시스라면, 가도 가도 눈에 덮인 벌판밖에는 보이는 게 없는 툰드라라면. 거기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고, 뱀에 물리거나 맹수에게 잡혀먹히지도 않고 한 해를 보낸다면 나의 마음속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남아있을까.
1997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화성에 안착했던 무인탐사선 패스파인더를 우리는 기억한다. 패스파인더에 탑재되었던 소저너(sojourner)는 화성의 붉은 표면을 분주하게 오가며 생생한 화성의 이미지들을 지구로 전송해주었고 세계는 그 기적 같은 사건에 박수를 보냈지만, 여섯 개의 바퀴로 뒤뚱거리며 화성의 표면을 기어다니던 소저너의 모습이 내게는 한없이 안쓰럽게만 보였다. 사람들은 지구 밖 행성의 흙을 밟은 최초의 로봇이라 했지만, 내게는 인간들이 홀로 외계에 떨어뜨려 놓은 말 못하는 작은 짐승처럼 여겨졌더랬다.
이후로 소저너가 느꼈을 공포와 외로움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두 달에 걸쳐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고 결국 마지막 데이터를 지구로 전송하고 소저너는 운명했다. 소저너가 지구로 보낸 마지막 통신은 “삑-”하는 짧은 신호음이었다. 그리고 소저너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재빠르게 잊혀갔다. 추측건대 지금쯤 영하 50도를 웃도는 거친 땅 위에 돌멩이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을 것이다. 차라리 소저너가 썩는 고강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더라면… 그러나 불행히도 소저너는 영구적으로 썩지 않는 티타늄이나 리퀴드메탈 같은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만약 소저너가 감정을 느끼고 저장할 수 있는 로봇이었다면, 그의 심장에 내장되어 있는 디스크를 꺼내 저장된 감정들을 분석해 본다면 과연 어떨까.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에서 열두 살의 소년 잉마르는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우주로 날아갔던 러시아의 떠돌이 개 라이카를 자주 떠올린다. 가장 먼저 우주를 보았다는 유리 가가린보다 4년이나 먼저 우주로 날아갔던 최초의 지구 생명체 라이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년은 세계에 덜렁 남겨진 듯한 외로움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우주 속을 유영하고 있을 라이카를 통해 드러낸다. 라이카는 스푸트니크 2호와 더불어 대기권 밖에서 폭발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만, 라이카가 소저너처럼 두 달 동안 깜깜한 우주를 유영했더라면 그의 눈동자에 박힌 감정의 빛깔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한동안 내 유년의 밤을 지배했던 이불 홑청의 올챙이 무늬들에 대한 공포가 떠올랐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으면 내 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올챙이 무늬의 별들, 그 징그러운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영상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 나를 괴롭혔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어렵게 선잠에 빠져들곤 했지만 런닝이 흠뻑 젖은 채 가위눌리기 일쑤였고, 그런 나를 위해 형은 번번이 이야기들을 지어내는 수고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때처럼 나는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처음 아프리카에서 보낸 한 철은 깨진 유리창 밖으로 얼핏 비친 아이의 눈동자처럼 낯섦에 대한 불안과 막막함의 두려움과 외로움, 그럼에도 ‘두려움에 몸을 움츠리고 우주처럼 넓은 공간으로 무모한 여행을 떠나, 사랑하는 나의 아프리카에 손자국을 남겨 하나가 되고 싶었던’ 열망이 범벅된 혼돈의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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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