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타(달링톤 치타테)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새천년이 시작된 이듬해 겨울이었다. 그가 도착하기 며칠 전 중부지방에는 제법 많은 눈이 왔었고 하얗게 뒤덮인 세상 위로 눈이 다시 나풀거리며 내려앉고 있었다. 비행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비행기 탑승객들이 거의 공항을 빠져나갔을 법한 시간에 이르자 불안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혹 출입국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함부로 그의 짐을 뒤지며 다시 아프리카로 돌려보낼 빌미를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국에서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들어오면 열에 아홉은 불법 체류한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다고 귀띔해 준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그 방문객이 정상적으로 출국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그 가능성에 대해 공항에 파견되어 있는 외교부의 직원들이 자의적으로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 신원이 확실한 사람들도 공항을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행방을 감춘다는 편견을 공식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턴 우리들에게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에 대해 은근히 범죄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함부로 대하는 못된 버릇이 생긴 것일까. 나쁜 버릇은 고치면 된다지만, 따지고 보면 이건 버릇의 수준을 넘어서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회의 고질적인 병리현상이며, 비단 우리들만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동등하게 대접받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귀족에서 노예에 이르는 계급과 신분의 구분은 다만 가진 것의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나 사회적 관습에 의해 누리거나 복무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의 양을 나누는 기준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의 경우가 좀 두드러지게 와 닿는 건 가난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굴욕의 경험들이 아직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짐이 가득 실린 카트를 밀고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손가방 하나를 들고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그의 까만 얼굴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별 탈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연신 눈을 굴려가며 사람들 속에서 내 얼굴을 찾아내느라 분주한 그를 잠시 지켜보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상기된 그의 낯빛 속에 안도의 표정이 짧게 스쳐갔다. 그는 지금 막 아프리카의 여름으로부터 동북아시아의 겨울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보다도 그를 더 낯설게 만들었던 것은, 그는 비행기라는 ‘날 것’의 교통수단을 이용해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 말로만 들어오던 아시아의 분단국 코리아에 발을 디딘 것이다. 악수를 나누고도 그는 한동안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코리아에 온 걸 환영해. 여기는 지금 겨울인데, 공항을 나서는 순간 널 얼음조각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그리고 보여줄 게 있는데, 그건 좀 있다 보여줄게.”
그를 태우고 공항을 빠져나올 무렵 그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긴장이 좀 풀리는 모양이었다. 준비해간 두툼한 겨울 외투를 건네니 그렇잖아도 추울 텐데 마땅한 옷이 없어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며 재빠르게 걸쳐 입는다. 시간은 이미 저녁을 넘어서고 있었다.
“… 근데 내게 보여준다는 게 뭐야?”
“응? 못 봤어? 저기 쌓인 저 눈.”
그제서야 치타는 고개를 돌려 창밖 풍경을 주시한다. 가로등이 비추는 도로변의 낮은 둔덕들은 아직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들로 덮여있었고 차창으로 간간히 날파리떼 같은 눈들이 스쳐갔다. 그가 본 최초의 눈이었다.
“와우, 환타스틱!”
치타는 이후로도 몇 번 더 한국을 다녀갔다. 모두 나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두 번째 방문부터는 아예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잘 쓰지 않던 방을 하나 비워 그가 쓰도록 했다. 크진 않지만 몇 달 묵어가기엔 그럭저럭 쓸 만한 방이었다. 이부자리와 책상, 조그만 TV와 영어로 씌어진 책 몇 권도 미리 넣어두었다.
“주방 기구들은 이곳을 열어보면 다 있으니까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서 해먹고 필요한 것들은 포스트잇에 적어서 냉장고 문에 붙여놓던가 장 보러 갈 때 잊지 말고 말해. 되도록 스파게티 면과 소스, 야채와 계란, 우유, 닭고기는 떨어뜨리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비상금은 책상서랍에 넣어둘 테니 필요할 때 사용하고 컴퓨터는 사무실에서 쓰도록 해. 참, 집 현관 밖에 자전거 봤지? 여기 열쇠, 그리고 뭐 당장 필요한 거 없어?”
누구랑 같이 한 집에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밖을 벗어나 집 밖을 나서면 바보가 되고 마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어줄리 만무한 까만 친구와 같이 산다는 건 아이 한 명을 키우는 것과 같은 정도의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도 치타는 한 주일 정도가 지나자 놀라운 적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동네 구멍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날 땐 자전거로 여기저기를 쏘다녔고 자주 부딪히는 사람들과는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급기야 지하철을 이용하는 방법을 일러달라고 했지만, 지하철을 탈만큼 멀리 갈 일이 있을 땐 반드시 나와 동행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이곳에서의 일을 마치고 무사히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생황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치타는 내가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마가디!’라고 인사와 함께 말을 건넸던 것처럼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눌한 발음으로나마 ‘안녕하세요?’라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내가 씨익 웃어 보이면 그는 안 해도 될 말까지 덧붙여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밥은 먹었니?’ 이건 내가 그에게 자주 하는 질문인데 혹 먹을 게 마땅치 않아 배를 곯진 않았나 해서 하는 말을 그가 인사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냥 ‘그래, 먹었다. 넌?’ 하고 넘어가도 좋으련만 꼭 가르치려고 하는 축들이 있다.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며 능청도 부려보는 여유를 갖기까지 낯설고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한국생활이 그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매서운 날씨와 자극적인 음식에서부터 힐긋거리는 눈길까지 뭐 하나 만만하고 편한 게 없었을 것이다. 그를 옆자리에 태우고 내부순환로를 달리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산의 까만 구멍 속으로 차가 돌진하자 그는 사색이 되어 물었다.
“정말로 차가 저기로 들어가는 거야?”
“물론”
“오 마이 갓!”
그는 눈을 찔끔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처음엔 터널조차도 그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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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