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바브웨 수도 하라레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아름드리 수목과 꽃과 풀들이 보기 좋게 어우러져 마치 도시 전체가 거대한 정원처럼 느껴진다. 주인장의 느긋한 손길과 적당히 방치된 흔적이 동시에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정원의 모습이다. 특히 자카란다가 피는 계절에는 어지럽게 흩날리는 보라색 꽃잎들과 미풍을 타고 퍼지는 꽃내음이 도시 전체를 물들인다. 그럴 때면 나는 한적한 공원의 벤치에 드러누워 그 향기에 몸을 파묻고 있길 좋아했다.
분분히 흩날리다 더러 내 몸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 꽃잎들, 그 꽃잎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따금씩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까닭모를 슬픔의 향기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꽃잎에 내 몸이 다 덮일 때까지 드러누워 있고만 싶었다. 그러나 공원의 경비원이 백주에, 그것도 공공 시설물에 시체마냥 드러누워 있는 동양인을 그냥 놔둘 리 없다. 다가와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곤봉 같은 것으로 다리를 툭툭 친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난 아이스크림을 사러간 내 보디가드들이 곧 돌아올 테니 아무 문제없다고 허풍을 떨고 잠시 더 누워있었다.
하라레 도심에는 식민지 개척자들이 남긴 유럽풍의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제법 번듯한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 있어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거리는 아프리카에서는 드물게 잘 정비되어 있는 편이며, 길가에 즐비하게 뻗어있는 풍성한 가로수들이 이방인의 고단한 다리품을 위로한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선 활기가 느껴지고 남부 아프리카의 대표적 도시의 시민들답게 세련된 차림새를 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아프리카에선 선진국 행세를 하던 나라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골목 깊숙한 곳으로 접어들어 도시의 속살과 마주할수록 그 풍경이 사뭇 달라진다. 하릴없이 서성이는 행색이 추레한 사내들과 기계적으로 손을 내밀며 구걸을 하는 아이들, 깡통을 앞에 놓고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행려병자들. 전화카드나 신문을 팔기 위해 경쟁적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청년들의 눈빛에선 무기력과 초조함이 서려있다.
이 나라는 부와 건강, 자유, 안보, 정치적 지배력 등을 기준으로 산정하는 레가툼 번영지수(Legatum Prosperity Index)가 올해 104개 대상국가 중 꼴지를 차지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다. 최근 몇 년 간 짐바브웨는 화폐와 관련하여 국제적인 뉴스거리로 자주 오르내렸다. 한 달 사이에 수천 퍼센트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가 하면, 지난해엔 1천억 달러짜리 신권을 발행했으며, 급기야 공식 환율이 미화 1 달러에 1조 짐바브웨 달러를 돌파했다. 이 나라의 물가는 우유 한 잔에 1억 달러, 버스요금 3천5백만 달러, 계란 3개 천억 달러 하는 식이다.
이 나라의 돈이 종이보다 못한 화폐가 된 것은 한두 해 전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거리에 떨어진 지폐를 거지들도 줍지 않는다. 얼마 전 짐바브웬이라는 신문사가 설치한 옥외광고는 실제 사용되고 있는 화폐를 이어 붙여 제작했는데,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덕분에 이 돈을 광고에 쓸 수 있었다’는 카피를 달고 있다. 무가베 정권의 실정에 대한 촌철살인의 조소이며 비감한 항거의 표현이기도 하다. 광고에 사용된 지폐는 총2억5천만 달러, 당시의 광고용 종이 값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제작되었다. 이 웃지못할 아이러니가 이 나라의 현주소이다. 최근에는 자국의 화폐를 포기하고 미국 달러와 남아공 란드(Rand) 화를 공식 화폐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영락없는 바나나공화국의 모습이다.
이 불행의 배경에는 무가베 군사정권의 장기 집권과 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정치적 무리수가 있다. 무가베 정권은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백인들 소유의 농장을 강압적으로 몰수해 이를 흑인들에게 재분배하는 충격적인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위협을 느낀 백인들 사이에서 짐바브웨 엑소더스가 시작되었고 이를 서구가 비난하고 나서자 무가베 정권은 영국연방 탈퇴와 더불어 유럽의 원조를 거부하고 나섰다. 스스로 국제사회와 선을 긋고 국가를 독단과 배짱으로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화폐를 발행했다. 나름으로 고뇌에 찬 결단이었는지는 몰라도, 시장경제의 원리를 무시한 채 빗장을 걸어 잠그고 혹세무민의 길을 폭주했던 것이다. 그의 난폭운전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 나라에는 없었다.
언론은 탄압되었으며 자유는 속박되었다. 콜라 한 병을 집어 들고도 몇 개의 돈다발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아야 할 정도로 거리에 돈이 차고 넘쳤지만, 시장에선 물건들이 시나브로 사라져 갔고 마침내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기 시작했다. 선거 때면 거리와 골목이 피로 물들었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젊은 사람들이 몰래 국경을 넘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쉬쉬하며 나이보다 먼저 늙어가고 있었다. 무가베 정권의 몽매한 반시대적 처사의 대가는 참으로 혹독했다.
하라레, ‘잠들지 않는 땅’이란 뜻을 가진 도시이다. 그러나 지금 하라레는 깊은 침묵에 빠져 있으며, 어둡고 암울한 계절이 지루하게 이어져가고 있다. 광포한 시절을 모른척하며 길가의 가로수들만 철없이 푸르렀는데, 난 그 그늘 속을 하릴없이 오가거나 기대어 앉아 공상에 젖는 일이 맘에 들었다. 오륙년 전쯤 일을 던져버리고 아프리카로 가 무작정 쏘다닌 적이 있다. 그때 끼적였던 수첩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마땅한 이유도 없이 먼 길을 가야할 때가 있다. 나도 그렇게 왔다.
버려야 할 것들이 버려지지 않아서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안고 왔다.
성지를 순례하듯 발 붓도록 걷다가 먼 이방의 가로수 그늘 아래에서
생수통에 목구멍을 열고 있는 것이다.
행려병자가 한가롭게 손 내밀고 있는 이 거리에서 오랫동안 붉은 피가 뿌려졌더랬다.
사람들이 애써 피하는 뼈아픈 기억을 흩날리는 화염수 꽃잎들이 반추하는데,
선홍(鮮紅)의 그 빛깔이 곱고 뜨겁다.
동전 몇 닢이 놓이자 불타는 타이어를 목에 두르는 형벌이 있었노라고
행려병자는 묻지도 않는 말을 한다. 물어도 얘기하지 않겠지만
아마, 남루한 저 옷 속에 한두 가지 병을 더 숨기고 있을 것이다.
참혹한 생의 어딘가에선 얼마 남지 않은 제 생이 무심히 보이기도 하는지
얼굴의 주름이 많이 웃어본 자의 것이다.
분신하듯 온몸으로 타오르는 나무, 나무는 내 등을 떠밀어 멀리, 더 멀리 가라고만 하고
불붙고만 싶은 그 화염의 그늘에서 나는 또 생이 욱신거린다.
- 하라레, 화염수† 그늘 아래에서
† 화염수(火焰樹) -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등 고온 지방에서 서식하는 수종으로 붉은 빛깔의 꽃을 피우며, 가로수로 활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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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해종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 아프리카 미술기행집 『터치아프리카』를 출간했다. 출판기획자로 활동하다 새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아프리카 미술 전시기획자로 활동했다. 현재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사 ‘터치아프리카’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전히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