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꼴?
우리는 지독한 문학주의자!
글_백가흠
사진_백다흠
▦ 만남의 장소를 서울역으로 정한 것은 천안에서 올라오는 전성태형을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박성원형도 마포에 살고 있어 약속 장소에서 가장 가까웠고, 나는 근처 모 여대에서 오전 강의가 있어 10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에 있었다. 약속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할 만큼 시국은 어수선한 것이 분명했다. 성태형이 먼저 기차에서 내려 서울역에서 한참 동안 우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헐레벌떡 서부역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성태형은 말쑥한 차림이었다. 저녁에 라디오 출연이 계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더운 날씨임에도 정장 윗도리를 걸친 것은 서울역 분향소를 염두에 둔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근거리에 사는 성원형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짐이라곤 손에 성태형의 『늑대』(창비, 2009)만을 든 채였다. 성태형도 가방에서 성원형의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문학동네, 2009)를 꺼냈다.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 다 자신들의 책은 아예 가져오지도 않았다. 1969년생 동갑내기, 등단 16년, 이제 막 세 번째와 네 번째 창작집을 냈으니 이들의 소설은 얼마나 귀하게 읽히고 또 쓰이는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전성태와 박성원, 자주 보는 사이고 좋아 하는 형들로 내가 따르고 있지만 새 책을 내고 처음 만나는 것이어서 그 반가움과 축하는 더할 나위 없이 컸다. 몇 분 뒤 서울역 광장으로 내려가며 우리의 마음은 금세 참혹해졌지만 말이다.
전성태(이하 성태)│글쎄, 나도 성원이를 작가로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처음 만난 것은 어떻게 보면 작년이지? 아니 재작년인가?
박성원(이하 성원)│어, 재작년.
백가흠(이하 가흠)│너무 오래 못 만났다. 그간 서로 그리워한 적 없었어요?
성원│그때 처음 만났는데, 굉장히 오래전에 만난 것처럼 끌렸어. 바로 말도 텄고. 술자리 한 번 딱 갖고 나서.
성태│성원이 역할이 컸지. 굉장히 쾌활하고 또 포옹력도 있는 거 같고 그러더라고. 성원이는 열심히 세월을 따라 내 작품을 따라 읽은 것 같지만, 나는 많이 읽지 못했어. 근데 이번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와 이 앞번에 「댈러웨이의 창」, 그걸 보면서 뭐랄까 내가 생각하는 소설적인 결함, 창작 방법론, 감수성 같은 것들을 이 친구는 굉장히 풍부하게 갖고 있구나 생각했어.
두 소설가를 만났던 때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있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각자 받은 충격과 아쉬움과 착잡함의 크고 작음이야 알 길이 없었으나 고인을 애도하고 슬픔을 나누는 것에는 서로의 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거대한 죽음 앞에서도 하늘은 여전히 높고, 빛은 강력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울역 분향소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고인의 죽음 앞에 문학의 정의로움을 말한다는 것에 쑥스러움마저 든 날이었다. 분향 후에는 더욱 마음이 착잡해졌다. 자꾸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고 또 참았다. 영정 사진마저 똑바로 볼 수 없을 만큼 자괴감이 온몸 가득했다. 분향 후 우리는 애써 서로의 시선을 피한 채 일산으로 향했다. 풍경들이 빠르게 뒤로 지나쳐갔다. 80년대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두 소설가의 감정만이 속도 뒤로 감춰지는 평범한 풍경을 잡아 세우는 듯했다.
좌담은 필자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식사를 곁들인 1차 인터뷰는 문학 이야기보다는 시국과 관련된 애정들이 넘쳐난 자리였다. 그러나 문학 안에서 감정을 다잡아야 할 자리이기도 했다. 애써 생략하기로 했다. 말수를 죽인 채 한낮에 쓴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일단 잊자, 쓴 소주에는 이상하게 억울한 마음마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문학 이야기가 시작되자 입안을 맴돌던 씁쓸함이 서둘러 밀려나갔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 그대로 두 작가는 신명나기 시작했다. 지독한 문학주의자들의 말.
성태│좌담 시작하려면 성원이 책 가져와야겠다.
가흠│근데 책 얘기는 많이 하지 말고 우리 큰 얘기 해요.
성태│우리 같은 문학주의자들이 책 얘기 안 하고 무슨 얘기를 할까? 줄까지 쳐가면서 읽었는데.
성원│그런 흉악한 짓을. 책 예쁘지?
성태│눈물도 없는 놈한테 이렇게 푹 젖은 사진을 찍어줬으니. 이건 과장 광고야. 근데 여기에 사인 하나 해주라.
가흠│그런데 둘 다 2쇄 안 찍었어요?
성태, 성원 동시에│뭔 쇄? 이문쇄?
책은 많이 팔리지 않지만 두 사람은 한국 문단에서 귀한 소설을 써내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작가라면 한번 잡아보고 싶은 흔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다. 그런 고집들이 자신의 작품들을 귀하게 만들어놓은 것이 아닐까. 둘의 창작 속도는 더디기만 하고 더딘 속도만큼 대신 문학적 순도는 깊기만 하다. 그들이 찾고자 하는 첫 번째 유사점.
성원│너는 아들이 둘이고 난 아들 딸인 게 다르지. 다른 것은 다 같다니까.
둘의 초기 작품에서 유사점을 찾기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문득 이들은 왜 서로 닮은꼴을 찾는지 궁금했다. 흔히 서로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칭찬? 굳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를 꼽으라 하면 둘 다 모두 지독한 문학주의자? 아니, 문학 앞에서의 진실함이라고 해두자. 그 진실함이 없다면 서로에게 위안이나 의지가 불가할지 모를 일이다.
가흠│세 번째, 네 번째 작품집을 냈는데 간단히 소감 좀 얘기해주세요.
성태│소감? 나는 성원이 이야기 들어보고 나서.
성원│여기 작가의 말 그대로야. …네 번째 창작집을 내니까 나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그래요. 근데 성태, 너 옷 예쁘다. 꼭 조폭 같다.
성태│꽉 끼어 보인다는 얘기지? 미안하다, 성원아. 나는 옷 대신 성원이 책 이야기를 해보면 읽고 나서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남들이 믿는 것을 같이 믿어야겠다고.
성원│그러지 말라고 쓴 거야. (웃음)
전성태 vs 박성원
성태│어떤 문화적 기호들을 끌어들여서 도회지적 글쓰기를 해내는 게 아니라 철학적으로 해내고 있거든. 뭐 이런 부분들에서 보면 굉장히 값진 동료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 경우 딴에는 사회 문제,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좀더 전선이 있는 부분들을 짚어내는 데 노력했다면 성원이는 좀더 인간의 본질적인 것에 탐닉하는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표제작을 읽어봤는데 굉장히 좋더라고. 그것도 소름 끼치게. 아내가 새벽에 죽었는데 사내의 심리를 견디어가면서 써내는 거, 엄마 잃은 아이가 나타나서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긴장하는 관계가 아주 뭐랄까, 단편의 백미라고 할까?
가흠│제가 읽기에는 형의 소설도 인간이 갖고 있는 본으로 더 많이 움직인 것 같아요. 소설적인 지대에 있어 지난번 소설부터 국경을 넘기 시작했고 성원형은 아직 탈출을 하지는 못한 거 같거든요.
성태│글쎄, 나는 내가 봤을 때 사실 넘었다고 할 수 없지. 넘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난경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원래 문학을 시작할 때 문학을 운동의 연장으로 생각했어. 어쨌든 내가 사회과학적으로 단련되고 이런 과정에서 의문점이 하나 남아 있었던 게 뭐냐면, 내가 가지고 있는 처지와 조건들 있잖아. 지극히 존재론적인 거. 이런 것들이 다 해결이 안 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해결 안 되면, 사실 작품을 써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문학하고 나하고 호흡해가는, 문학을 통해서 내가 해소되기도 하고, 또 문학이 나한테 뭔가를 요구하기도 하는 부분들을 싹 무시해놓고, 작품을 갖다가 말 그대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거잖아. 그래서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라든가, 의식이라든가, 무의식이라든가 아니면, 나의 정체성이라든가 하는 자체가 어떤 게 진짜고 가짜인지… 그 다음에 도대체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어떤 게 내가 순수하게 취득한 것이고, 어떤 것이 사회로부터 그냥 얻어지고 주입된 것인지 분리해내는 작업들을 하다 보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분단에 대한 체험이 없는 나에게도 우리 사회가 요구했던 분단의식 같은 것들이 깊이 들어가 있고 뭐 이런 것들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지. 내가 뭐 특별하게 분단 문제를 다뤄봐야겠다보다는 내 정체성의 탐구였던 것 같아.
성원│성태 말을 들으면서 내가 옛날에 썼던 글을 새겨보니까 생각나는데, 성태는 운동의 연장으로 소설을 생각했고 나는 소설을 운동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했어. 사회운동은 사회운동으로 따로 있는 거지. 문학은 결코 운동의 수단 또는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을 안 했거든. 심지어 운동하던 선배들이 너 소설 썼냐? 하고 몇 년 전에 알게 된 사람들이 있다니까. 그런데 왜 선배들한테 차마 말을 못했냐면 나는 일종의 뭐랄까 이게 내 주업이 아니라 마치 아마추어 화가 같은, 소설이란 아주 개인적인 일이라고 처음에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문학이란 것을. 왜냐면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리란 기대가 없으니까.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명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문제는 작가들에게 있어 사회적인 포지션 내지 역할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이 명제는 작가가 소설로써 해야만 하는 일들, 사회에서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묻는 질문인 것이다. 작가는 대안자가 아니라 질문자인 까닭이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 물음, 그것이 결국 사회가 작가에게 요구하는 질문이라는 얘기.
성원│성태의 소설은 그래, 옛날하고 많이 달라졌어.
성태│좀 유연해졌나?
가흠│인물의 폭이 좀 좁은 느낌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전편에 비해 굉장히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성태│자기 작품 세계에 대한 변모를 자기가 눈치 채기가 쉽지는 않아. 왜냐면 그 간극들을 다 자기가 쌓아왔기 때문에 그런 거지. 그걸 잘 눈치 채기는 힘들 것 같아. 그래서 그런 부분을 이야기해야 할 때는 좀 곤혹스럽고. 그런데 좀 돌려 말해서, 내 글쓰기가 스스로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느냐 하는 이야기를 만약 한다면, 아까 내가 우스갯소리를 말했었지만 작년 에 책 준비하면서부터 내 소설이 타인에게 혹시 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 소설이 사람들을 좀 위문해줬으면 좋겠는데. 과연 내 소설이 위문을 하는 건가. 예를 들면 「늑대」 같은 데서 사실은 한국인 노인네를 좀 이해해보려는 측면으로 접근했던 거지.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좀더 인물에 대해 입체적으로 다가섰는지 모르지만, 나는 옛날부터 인물을 다루면 주인공 외의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너무 쉽게 활용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그래서 달라진 점은 사람 하나하나의 사연들을 들어줘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소설은 사연들이 만나서 뭔가가 발생하는 거잖아? 그래서 그런 생각이 좀 들었는데, 한편으로는 내 소설에서 미학적인 것 말고 사회적으로 만나는 지점들은 너무 날이 서 있어서… 나는 뚜렷한 이야기가 있어야만 소설을 써내는 스타일이라면 이 친구는 이 단편을 보니까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단편의 미학은 그런 거거든. 뭐라 딱 잡아낼 수 없는 지점들을 이야기들로 적나라하게 그려주는 거거든. 그랬을 때 이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라는 부분들이 그런 미학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성원│나는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는 편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믿지는 않아. 문학이 세상을 바꾸리란 생각은 없고 대신 그렇지만 세상과 동떨어져서 사는 건 아니라는 거지. 나는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는데 뭐랄까. 염세적이라고 할까. 소극적이라고 할까. 내가 기저에 이런 생각은 많아서 작품에 두루뭉술하게나마 문제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렇다고 내 글을 읽고 맞아, 세상의 억압이나 제도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리라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이지.
준비되지 않은 작가는 없다. 이들은 오랜 시간 읽고 쓰며 불현듯 찾아올 그 시작을 기다린다. 작가에게 무엇을 쓰는가 하는 문제는 과거에 무엇을 읽었는가 하는 질문의 약식인 셈이다.
가흠│고등학생 때도 문학 소년이었어요?
성원│고등학교 때 나는 소설, 수필집, 산문 이런 거 봤지. 특히 소설만 짚어보자면 나는 고등학교 때 우리 형이 80학번이었어. 그래서 주로 처음 본 소설들의 대부분은 형에게서 나온 책이야. 특히, 나는 최인호의 역량에서 충격을 받았지.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어떤 유신정권의 저항의 이미지로 읽혔거든.
성태│난 고등학교 때 절에 가서 소설 쓰고 그랬어. 그때는 뭐 누가 지도해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내가 헌책방에 가서 항구에까지 걸어가서 가져왔던 게… 삼중당문고에서 나온 김동인의 『운영궁의 봄』,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 이런 걸 절 아궁이 앞에서 읽었어. 고등학교 때 혼자 자취방에서 소설도 많이 썼으니까. 초등학교 때 주산부 하다가 담임 선생님이 교단 시인이었는데 되게 무서운 선생님이었어. 그분이 6·25백일장 때 뭘 하나 써주더라고. 난 문학이 뭔지도 모르고, 백일장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승복 동산에서 써내면 된대. 그래서 써냈더니 며칠 뒤에 막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고 난리가 아냐. 그렇게 상을 받았어. 그러니까 그 선생님이 반 대항 이런 거에 욕심이 많아서 우리 반 애 상 받게 하려고. 그게 계기가 돼서 동화도 읽고 동화를 몇 편 써보면서 혼자 쓰는 재미를 느낀 거야. 이후로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글 쓰는 거 좋아해서 알아보니까, 글을 잘 쓰는 선배가 중대에 김동리도 있다고 하고. 내가 아까 『사반의 십자가』도 읽고 그랬댔잖아. 그래서 중대에 가게 된 거지. 그런데 막상 대학에 와선 글을 못 썼어. 대학 1년 동안 창작을 한 편도 못하고 군대를 도망가듯이 갔어. 왜 그냐 하면 의식은 굉장히 성장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들하고 연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글이 안 쓰이는 거지, 자유롭게 글 쓸 수 있는 곳으로 왔는데도 말이야. 아무튼 고등학교 시절의 문학은 나에게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은 무기였지. 대학에는 갔으니 결국 성공한 일인가.
성원│나도 당시에 소설 굉장히 좋아했지. 주로 대학생인 형의 책을 읽고 했어. 『그리스인 조르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이런 거. 한번은 써보기도 했는데 지금 봐도 유치하기 짝이 없어. 첫 문장이 이런 거야. “어느 하루 노인이 죽었소. 허허허.” 지금 생각하면 고1이 그런 문장은 왜 썼는데? (웃음)
성태│나도 고등학생 때 시를 썼는데 “감나무에 오리를 한 마리 묶어뒀소” 그때 내가 이상에 빠져 있었거든. 제목을 막 ‘이성 불능의 법칙’ 이런 거 붙이고. (웃음)
성원│나도 이상에 엄청 빠져 있었는데.
성태│그니까 예전에 고등학생들하고 한 얘기가 있었는데 문학도 통과해가는 정신적 지점들이 있는데 제일 처음에는 삶의 형식을 먼저 보는 거 같아. 이상 이런 사람들이 가졌던 천재성, 비극성 이런 거에 빠졌다가 그것을 넘어서면 희극이 보이고, 이런 거 같아. 성원이나 나나 똑같은 것 중에는 고등학교 때는 비극적인 미학에 좀 발을 담그고 있다는 거, 그것 같아.
한 작가의 소설에 혹 등장하지 않거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작가의 콤플렉스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때론 의도적일 때도 있지만 소설을 쓰는 동안 무의식이 잠식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태│나 그 얘기 하고 싶었어. 성원이 너는 아버지 부재에 대해서 그렇게 천착하는지.
성원│나는 성태 소설 안에 여자의 부재가 궁금했다.
성태│그럼, 그냥 하지 말까?
성원│그래, 하지 말자. 대신 마지막으로 재밌는 얘기 하나 할까? 마흔 넘으면 콤플렉스 이런 거 의미 없어. 고등학교 때 자율학습 안 하고 치킨집에 가서 맥주를 마신 적이 있는데. 꼭 한 번이었어. 믿어줘. 그리고 사우나를 갔는데.
성태│고등학생이 치킨 먹고 맥주 먹고 사우나에 갔다고?
성원│딱 한 번뿐이었다니까. 그랬는데 사우나에 들어가 있는데 탕 안에 학생과장이 있는 거야. 그래서 나갈 수가 있어야지. 계속 사우나에 30분 이상 있었어. 한 아이는 토하고, 나가려는 애를 붙잡고. 결국 끝까지 버텼어. 우린 승리한 거지. 학생과장이 갔다고 해서 겨우 사우나를 기어나왔는데 애들이 막 웃는 거야.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봤더니 사우나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바람에 의자에 박혀 있던 글씨가 엉덩이에 새겨진 거야. 신한등록 2138호. 고등학교 때 별명이 신한등록이었어. (일동 웃음)
작가는 끊임없이 변모하고 변화한다. 스스로 변신을 거듭하는 것은 쉽지 않고 오로지 독서로만 그것이 가능하다. 작가에게 스승은 오로지 독서뿐인 것이다. 무엇을 읽느냐 하는 것과 무엇을 써야만 하는 것에 대해 밤이 깊도록 의견을 나누었다. 두 작가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자신들의 마지막 문학론을 설파했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문학밖에 없는 것일까. 밤은 기울었지만 그들의 문학적 진심은 여전히 환하게 느껴졌다.
성원│사실 내 진정한 스승들은 요즘 후배 작가들의 작품이야. 왜 그러냐 하면 아까 성태가 했던 말도 그런 것 같아. 이론가적 입장이 아닌 작가적 입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거든. 아, 이런 방식으로 쓰는구나. 전성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이런 것들 때문에라도 내가 새 작품을 쓸 수 있는 힘은 거기서 나오는 거 같아. 후배 작가들이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해주니까 거기서 감동을 받고 소설을 이렇게도 확장시킬 수 있구나 하는 것. 난 후배들이 존경스러워, 진심으로. 그래서 사랑까지 한다니까.
성태│요즘에 오에 겐자부로 소설에 빠져 있거든. 말년작들을 보면서 굉장히 부러운 게 많은 작가라는 것을 새삼 느껴. 작가가 작품 쓰는 행위 자체가 일상이 돼서 작품 속에 형식, 내용, 고민 없이 무공의 경지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지점 정도까지 몸이 만들어져 있는 한 노작가를 만나는 기쁨 같은 게 있어. 그런 작가가 되고 싶어, 작가로서의 꿈은… 나보단 성원이가 더 가깝지. 성원이 소설을 읽으면서 성원이가 그런 점에서 그런 고민들이 빨리 됐었고 굉장히 그쪽으로 많이 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튼 부러운 게 많은 친구야. (*)
박성원ㅣ1994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 『나를 훔쳐라』, 『우리는 달려간다』,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등이 있다. 동국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성태ㅣ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 『늑대』,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가 있다.
백가흠ㅣ‘나비’ 편집위원.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어」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우리 시대의 극단적인 정신세계와 불편한 현실을 아이러니와 판타지로 녹여내는 개성적인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으로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