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
알 수 없는 아픔에 대한 물음
l 소설가 공선옥
글_신용목
사진_백다흠
초여름 오후, 해금이를 만나러 가다
해금이를 만나러 간다. 까만 교복을 입고 흰 소매 끝 주름이 신경 쓰이는 열여덟 살, 입가에 빨간 양념 떡볶이를 먹으며 구석 자리 수다로 떠들썩한. 해금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무는 푸르고 나무를 치는 바람도 푸르고 슬몃 비치는 빗방울도 푸른. 그 어디쯤 해금이는 환하게 웃다가 시무룩 지다가 종종종 내달리기도 할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그녀를 스쳐가지 않았으므로, 여태 우리가 닿지 않은 곳에 피어 있을. 그녀를 만나러 가는 사이, 바람이 일고 빗방울이 듣고 나무는 푸름으로 몸부림쳤다. 일산에서 화정까지의 짧은 여정 동안, 하늘이 바뀌고 먼 산이 흔들리고 휘청, 우리는 낯선 시간을 통과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풍경의 터널이 차창을 스쳐갔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녀의 집 앞에 섰을 때, 해금이는 30년 세월을 보탠 얼굴로 문을 열었다.
‘내 가슴에 은하수 흐르던 시절’들은 아스라이 멀어졌다. 그 시절은 내게도 오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환에게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절들이 그렇듯, 목련이 지듯, 모란이 지듯, 속절없이 지나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시절들이 밀려오게 되어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282쪽)
일산에서 화정까지 가는 동안, 해금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니, 커트 머리에 오른쪽 머리핀을 꽂은 열여덟 살, 김밥보다 돌돌 마는 쫄면을 주문하고 총각 선생님 과목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는 해금이는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열아홉이 되고 스물이 되었을 때, 그녀의 꿈은 가득 꽃 실은 배처럼 뒤집혔으므로, 모든 시절이 달려가 저를 누이는 기억의 무덤에서도 해금은 내내 아팠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녀가 오랜 세월의 터널을 풍경처럼 지나와 우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덜컥,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구분되는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은, 예기치 않게, 혹은 법칙처럼 오고야 마는 것이다.” (207쪽)
소설가 공선옥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러했다. 가방 속에 선생의 새 장편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넣고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 마해금이 소설가로 변신해온 30년을 스냅 사진처럼 떠올려보려 애썼다. “기대하는 이상으로 소탈하실 거예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내심 긴장한 속내를 동행한 편집자 백다흠에게 별수 없이 들키고 말았나 보다. 이번 장편소설의 작가 사진을 찍기도 한 그가 어디쯤 왔으며 언제쯤 도착할 거라는 연락을 취했다. 전자음의 각색을 거쳤음에도 시원한 그녀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내가 선생을 떠올리는 일이 소설 밖을 살아갈 해금의 삶을 떠올리는 일만큼 힘겨운 이유는 간단하다. 한일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즈음 나는 문학잡지를 발행하는 모 출판사에서 밥을 벌고 있었다. 마침 선생이 잡지에 『유랑가족』이라는 연작소설을 연재하던 때였다. 나는 선생을 몰랐지만 소설의 주인공들과 친했고 선생을 만나지 못했지만 선생의 마음을 아는 듯했다. 그래서 교정지에 앉힌 원고가 내 앞에 놓일 때마다 나는 소설보다 선생이 더 궁금했다. 아프고 다친 사람들을 소설 속으로 불러들이는 선생의 삶, 이를테면 때로는 한없이 가녀리고 때로는 더없이 강직한 여인들이 살고 있는 선생의 내면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소설이 마무리되고 단행본으로 출간되기까지의 일을 매듭짓지 못하고 출판사를 떠났다. 선생에 대한 나의 모든 어정쩡함은 그때부터였다. 인연이 있다고도 그렇다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
무섭고 슬픈 오늘을 잊지 않는 것
“해마다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하는데도 사방이 다 책이라 감당이 안 돼요.” 선생이 찻물을 끓이는 동안 휘둘러본 집 안은 거실도 안방도 따님이 쓴다는 작은방도 모두 책장이 각각의 키를 세우고 있었다. 사이사이 자리한 그림과 언저리엔 세워진 첼로와 기타. “나는 문학을 하고 큰애는 영화를 하고 둘째는 그림을 하고 셋째는 음악을 하고, 다 아마추어들이에요.” 두서없는 물음마다 소탈한 대답이 이어졌다. 선생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아니었더라도 자연스럽게 놓인 가구들과 화분들, 그리고 어떤 격식보다도 편하게 사람을 맞는 선생의 모습에서 우리는 오래 소원했던 친척 누나의 집에 온 듯 마음을 찻상에 탁, 놓아버렸다.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대화는 애초에 떠올리고자 했던 지난한 삶과 문학의 여정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에 대한 수다가 되었고 서로가 부대끼는 ‘지금’에 대한 안부가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었을 때 우리가 울었던 것은, 그 죽음이 슬퍼서라기보다는 이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무서워서였죠.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만드는 억압된 상황, 바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슬픔 때문이겠지요. 더군다나 죽음 앞에서도 그 한쪽에 냉소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상식선에서의 평정심을 유지하기조차 힘들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무서워서 우는 것이고 무서워서 슬픈 것이었어요.”
첫 이야기는 자연스레 어지러운 세태에 쏠렸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선생은 담담하면서도 막힘없이 말을 풀었다. 그러나 그것은 훈련을 통해 얻어진 인식의 어떤 것이 아니라 오래 아파한 사람만이 풀어놓는 삶의 질감 같은 것이었다. 상황을 분석하고 현실을 개념화하여 전망을 가늠하는, 죽은 언어에 익숙했던 나는 열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막연히 떠올렸던 선생은 나의 잣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의 공정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이 있었다. 보기 좋게 빗나간 예상이 내 질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새삼 소설을 쓰는 사람과 소설을 사는 사람에 대한 갈래가 나와 선생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다. 선생의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삶이었다는 것을 미련하게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서둘러 무언가를 하려고 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당장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되게 하려니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우선은 이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겠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가 마음을 아리게 하는 이유도 그것이지요. 똑같이 대거리하지 말라는 거잖아요. 다만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는 것부터가 중요할 겁니다.”
그럼에도 나의 미련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쑥 ‘어떻게 해야 하죠?’라는 물음이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나는 매 순간 시험지를 받아 든 학생처럼 서둘러 수학 공식을 떠올리고 정해진 시간 안에 답안지를 채워야 하는 삶을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아가 어쩌면 내가 어떤 거짓에 대한 공범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누군가 아래 인용과 같은 질문을 내 앞에 쏟아놓았다면, 어리석게도 나는 개발독재와 문명이기와 경제 중독의 현실을 들이대며, 그 증상의 처방에나 신경 쓰며 진실의 죽음을 방기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생처럼 그 상처를 뜨겁게 바라보고 가슴 깊이 안아주는 일은 안중에도 없이.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 (76쪽)
소설은 삶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
내내 분위기 파악을 못한 것은 나였다. 편하게 만나겠습니다, 먼저 다짐을 받아놓고도 잇대어 무거운 질문에 매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선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짐짓 대책 없이 진지한 학생 같은 나의 모양새 탓에 선생마저 목소리가 점점 묵직해졌다. ‘좀 편하게 하라’는 동행자의 충고를 듣고도 나는 선생의 말에 내 생각을 맞세워보느라 차 한잔 놓은 자리를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혔다. 따님이 “엄마 소설을 읽으면 진보적이라 하는데, 솔직히 집에선 그렇지 않잖아”라고 한다는 간간의 농담을 삼킨 것도 어려운 문제 앞에 멈춘 ‘둔한 학생’(?)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저 질문이 오래전, ‘80년 5월 광주’를 거쳐온 ‘그녀들’만의 질문은 아닐 것이다.
“촛불을 들고 나왔던 소녀들도 아마 같은 생각일 거예요. 그 소녀들이 ‘이해가 안 돼. 정말 짱나!’라고 하는 것도 도무지 말도 안 되게 굴러가는 현실에 대한 반문이잖아요.” 공포와 슬픔의 이유는 여기서 분명해졌다. 상식을 넘어선 어떤 질서가 우리를 장악해버렸다는 것. 그리하여 그 질서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공포와 슬픔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며 공포와 슬픔의 창조자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글들은 (얄팍한 내가 집요하게 물었던) 현실에 대한 건조한 해답이 아니었다. 되레 우리가 기피하고 잊으려 애썼던 그것들을 우리 앞에 오롯이 거울처럼 꺼내놓음으로써 우리의 찢기고 발긴 모습을 되비쳐주는 것이었다.
“사실은 ‘오월유사’를 써보고 싶었어요. 『삼국사기』가 정사로 쓰인 역사라면, 『삼국유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엮어낸 역사잖아요. 남성 작가들에 의해 쓰인 ‘5월’에 관한 소설들이 대부분 정사를 따라가며 기술한다면, 나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잘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비상 상황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의외로 삶에 대한 생동감이 넘치니까요. 어쩌면 내일 내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 자체가 내 삶을 더 치열하게 만드는 것과 같겠지요.”
선생은 ‘참으로 오묘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은 몇 줄의 연대기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력서에 채워진 칸들로 그의 삶을 구성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은 없다. 그것으로 한 삶을 다녀간 사랑과 절망, 오랜 방황과 눈물의 기록을 대체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역사가 거칠게 부려놓은 기록의 이면에 대해서, 인간이기에 존재하는 서러운 눈물겨움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선생에게 역사는 삶으로서의 역사였다. 큰 대의나 명분을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땀방울의 역사였던 것이다. “고백하자면, 이 소설은 덜 힘들려고 꾀를 많이 부렸어요. 그 인물들, 그 상황들 속으로 들어가면 도저히 더는 써나가지 못할 것 같아 애써 거리를 두고 경쾌하게 나갔어요.” 상처의 재현과 재현의 상처, 곧 현실과 현실을 불러내는 과정으로서의 소설이 모두 상처인 것을. 거대한 톱니바퀴가 찍어놓고 간 시간의 틈을 견디느라 해진 한 사람은 거기에도 있었다.
“지금도 세상의 햇볕을 쬐기를 바라면서 지하 저편에서 바스라져가는 이름들이 있을 거예요. 없는 것이 아니라 잊혀져가는 것일 뿐이죠.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들을 이름 한번 불러주고 거품 한번 씻겨주는 것도 작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역사라는 게 어떻게 보면 그 사람들의 삶이죠.” 모든 역사는 사실을 기록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한 번도 그 ‘사실’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본 적이 없다. 마음의 모양과 마음의 움직임, 그것이 만들어내는 저 활공의 우주를 역사는 기록한 적 없다. 그리하여 역사는 약품 냄새 속에 박제화된 표본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소설을 쓰거나 읽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마음과 마음이 부딪치고 엮이며 생산하는 질퍽한 삶의 진실들을 햇볕 아래 널어놓는 일, 그것이 또한 문학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우리의 불행은 내일의 배고픔 때문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힘든가. 내 삶을 내 영혼을 옥죄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어요. 그런 궁금증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말을 하다 보면 생각이 구체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소설도 그래요. 소설은 내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삶이 또 내 삶이 선명하게 내 앞에 나타나죠. 그래서 내 아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세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지요.”
거창한 내력과 과시의 철학이 언어의 옷을 입고 범람하는 때에 선생은 더없이 소박하고 솔직한 대답으로 자신의 소설 쓰기를 이야기한다. 삶은 도대체 삶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그 존재 형식으로 한다. 삶이 계속되는 한 삶에 대한 물음은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삶에 대한 물음이 끝나는 순간, 우리의 삶도 끝나고 말 것이다. 삶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문학이고 문학적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문학에 대한 물음이, 문학을 가능하게 하고 문학을 살게 하는 것처럼. 단상 앞에 선 삶을 향해 책상에 앉은 문학이 손을 번쩍 들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누가 웃지 말라고 해서 웃지 않은 것은 아닐진대, 꼭 누군가 웃는 것을 용서치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인가. 어쩌다가 웃음을 참을 수 없을 만치 행복한 순간에도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습관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가. 혹시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되지 않을까, 따뜻한 내 집 창밖에 지금 누군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지는 않은가, 노심초사해야만 겨우 안심이 되는 이 못 말릴 습성이, 노인네들처럼 온갖 세상 근심걱정 다 떠안아야만 겨우 내가 사람 노릇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이 딱한 습벽이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283쪽)
초등학교 시절 또 중학교 시절 선생은 학교를 마치면 응당 집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간명하다. 꼴을 베어 소를 먹여야 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땐 자취를 했고 역시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일찍 자취방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그것이 당연한 생활이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를 즈음 친구들은 사춘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이 가난인지 풍요인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는 선생이 처음 문학과 만나게 된 사연 역시 삶에 대한 저 질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 그래서 어떻게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내일 일은 정말 내일의 것이었죠. 그런 걱정 없이 청춘을 보냈어요. 왜 요즘 애들은 미래에 먹고살 걱정을 미리 당겨서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앞으로의 일들을 걱정하느라고 자기 인생을 탕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그래서 더 취직이 안 되는지도 모르죠. 지금 배가 안 고프면서 장래에 배고플 것을 당겨서 괴로워하고 있으니까요.”
소설가가 되고픈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질문에 선생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소설가가 되든 뭐가 되든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어쩌면 현재를 불행하게 만드는 수순이고, 그 수순은 그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살면 뭐가 되어도 될 것’이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삶의 절박한 어떤 순간’이지 계획과 전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젊은이의 특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는 선생의 말에는 선생이 특유의 소탈함으로 포장한 삶과 사회에 대한 진실한 철학이 들어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요즘 ‘경제 살리기’란 말이 나오면 모두 선이 되어버려요. 그것이 요즘 젊은 학생들을 극단적인 현실주의자로 만든 것이죠. 그래서 나는 경제 어떻고 저떻고 하는 말이 가장 악랄해 보여요. 요즘 정치권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잖아요. 정치적인 양심은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지요. 백성이 전쟁 위협을 안 느끼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이 할 일인데, 오히려 그들이 상황을 불안하게 만들어가요. 그러고는 오히려 국민들에게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불안해하지 않느냐며 종주먹을 들이대는 것, 이것만큼 부도덕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경제 불안과 정치 불안을 미끼로 현재에 대한 불평등을 합리화시키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는 것. 선생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밑밥으로 자신들의 특권을 누리는 통치 행위가 군사정권 시절과 다르지 않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도 젊은 학생들에게서 꿈과 이상을 빼앗아가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미래를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을 터이므로. ‘문학은 공부하거나 준비하는 게 아니다’라는 선생의 말은 삶의 절절한 모퉁이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순간, 그것이 절박함이건 허무함이건 고통이건 슬픔이건 간에, 그 순간에 충실한 것이 삶과 문학의 진실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초여름 저녁, 소설가 공선옥과 헤어지다
마침 ‘오영수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다음이었지만, 즐거운 이야기보다 무거운 이야기가 많이 오갈 수밖에 없어 내심 미안한 시간이 흘렀다. 짧은 만남 동안 (맛있다는 말에 한 봉지씩 싸주시려 하기도 했던) 연잎차를 사이에 두고 선생은 더없이 솔직했고 따뜻했다. 대여섯 줄 써놓고 정서 불안 환자처럼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리기도 한다는 선생의 집 안을 다시 한번 휘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었고 큰 공연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것이 이 속절없는 세상에서 선생이 써나가는 소설의 허파가 되기를. 우리는 단지 벤치에 잠시 앉았다 헤어졌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이것이 선생의 마지막 인사였다.
다시 화정에서 일산까지 오는 길, 하나씩 창을 단 집들마다 해금이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30년을 살았고, 그동안 많은 일들이 그녀를 거쳐갔을 것이다. 이제 분식집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입가에 빨간 양념을 묻히는 일은 드물겠지만, 좋아했던 총각선생님의 이름조차 아득히 기억나지 않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들의 삶은 또 다른 사연과 사건 앞에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삶은 앞으로도 더 많은 매듭을 만들 것이다. “우리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구분되는 순간 말이다. 그런 순간은, 예기치 않게, 혹은 법칙처럼 오고야 마는 것이다.” (*)
인터뷰이 공선옥는
1991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했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의 삶,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담아내고 있는 작가는 여성신문문학상·신동엽창작기금·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5 올해의 예술상(문학부문)·가톨릭문학상·오영수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장편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수수밭으로 오세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행복한 만찬』 등을 펴냈다.
인터뷰어 신용목는
2000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가 있다. 시작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