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봄내 이야기
l 소설가 오정희
글_손홍규
사진_백다흠
“열일곱이었을까. 어느날 빨래를 하고 난 뒤 부엌 쪽문에 의자를 내다 놓았어요. 그리고 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를 읽었어요. 책을 덮고 나자 세상이… 달라 보였어요.”
오정희, 그이를 만나러 춘천 가는 길. 「봄내 이야기」라는 그이의 산문이 실린 책 한 권을 낀 채 친구의 차를 얻어타고 봄내(春川)로 가는 길. 봄 향기로 들어가는 길. 3월의 세상은 은성했다. 부시지도 여리지도 않은 햇살이 보닛 위에서 통통거렸고 차창을 내리면 요요한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동행이 있었건만 나는 혼자였다. 고독하다는 것과는 달랐다. 가출을 감행한 사춘기 소년처럼 설레고 두려웠다. 혹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이를 처음 뵙는 것이기도 했거니와 정작 그이를 대면했을 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낯익은 두려움은 춘천이라는 지명이 불러일으키는 오련한 느낌과 한데 어우러져 까닭 없이 증폭되더니 끝내 나를 어수룩하기 짝이 없던 과거 저편으로 던져버리고야 말았다. 그 시절 나는 시인 김남주의 표현을 빌리면 가엾은 사실주의자였다. 예술을 빙자해 방만해지기 싫었고 문학 앞에 무릎 꿇는 제스처로 자위하는 속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삶보다 위대한 문학이 존재한다는 걸 믿지 않았고 자신의 소설보다 위대한 소설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믿음과 생각들이 절로 생겨난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스스로에게 강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걸 고려하게 된 건 창살 달린 2평 남짓한 방에 갇힌 뒤였다. 낯선 이들과 드러난 살을 비비며 지내야 했던 그 몇 달 동안 외려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신조차 나를 간섭할 수 없는 그곳에서 오정희를 읽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이의 소설을 펴들면 절로 오감이 만개했다. 눈먼 이가 점자책을 읽듯 마음에서 손가락 하나를 내어 활자를 쓰다듬노라면 그 손가락 끝에 단단하고 고르게 짜인 툭툭한 언어들이 만져졌다. 종이 위에 단어를 흩뿌려놓는다고 해서 다 문장은 아니라는 걸, 낱말 하나하나가 살아서 꿈틀대며 자신을 만져달라고 소리 없이 아우성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던가. 내가 만진 건 납작한 글자가 아니라 정녕 살아 있는 그 무엇, 백지로부터 돌올하게 솟아난 육체들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점자를 새기듯 언어를 새긴 소설가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상상한 순간 나 역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많은 것들이 내 가슴속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주를 허락한 그 감정들을 예술혼이라거나 작가 정신이라거나 혹은 그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으리라.
조금씩 춘천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친구의 차는 서울을 잠시나마 떠나고 싶어했던 이들의 발걸음을 묵묵히 기억하고 있는 길을 따라 달렸고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서울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돌려 되돌아와야 했으므로 길은 알고 있는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내 다시 서울을 마주 보아야 한다는 걸. 한사코 멀어지려 할수록 대면하며 다가가야 할 길도 그만큼 길어진다는 걸. 하여 한 번 걸음으로 30여 년을 춘천에서 늑장 부리고 있는 그이를 어찌 심상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까. 그이를 사로잡은 춘천, 그이가 사로잡힌 춘천. 그곳에 닿아 당연하게도 또한 기이하게도 가장 먼저 만난 이가 바로 그이였다. 오래전 내 것으로 삼고 싶어 그이의 소설에서 툭 떼어 간직했던 문장이 그러했듯 햇살이 만연한 대낮이었다.
지난겨울 살림을 부려 새로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는 집 앞에 섰다. 길찬 소나무들이 울창한 언덕 아래 단정한 가옥 두 채가 닿을락 말락 나란히 서 있었다. 오랜 세월 아파트에서 지내온 터라 땅집에서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던 그이는 채 울타리도 두르지 않아 사방에 훤히 드러난 집과 그 주위를 가리키며 이 집을 꾸미기 위해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나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알마당에서 잡념이 탈각된 그이의 문장들을 연상했고, 감출 것도 더 드러낼 것도 없다는 듯 초연한 가옥과 그것이 세계와 맺고 있는 방식이 이러하다는 듯 안과 밖이 불분명한 경계선에서 그이의 정신의 결절들을 찾았다. 이것도 하나의 선입견이랄 수 있을까. 해서 후배 소설가들의 정신적 근원이 되어버린, 당신의 소설 세계에 퍼부어지는 완벽성, 염결성이라는 수사학적 세례들을 혹시 스스로도 지겨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등단작인 「완구점 여인」 같은 경우는 고등학생 시절에 초 잡았던 걸 끄집어내서 손을 봤던 거예요. 등단할 무렵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건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갈망이었어요. 지금 다시 읽으면 소설의 빈틈이 보여서 부끄럽기도 해요.”
누가 그 틈을 허물이라 할까. 설령 틈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춤을 치듯 그 틈을 메우며 글을 써온 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염결성에 대한 부정마저 순정하게 여겨졌으니, 선입견과 편견을 수정하기는 영영 그른 일인 듯했다.
아직도 어수선한 터라 밥을 지어 대접하고 싶어도 부끄러워 차마 못했다며 그이는 방문객들을 집 안으로 이끌었다. 나는 마치 내가 모르는 딴 세계로 들어가듯 조심스레 그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경이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리라 은근한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두 아이의 어머니로, 한 사내의 아내로 일상을 영위해온 삶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느 집과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소나무 숲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뒤란을 향해 마루를 내놓은 걸 빼면 말이다. 나의 편견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동하였다. 소설가의 자의식으로 무장한 채 낯설고도 익숙한 그 풍경들을 지키기 위해 그이는 얼마나 절치부심했을까. 「봄내 이야기」의 “젊은 날, 자의적 선택이 아닌, 남편의 직장에 따른 이주였지만 나는 춘천으로 오게 되었을 때 낯선 곳에서의 자발적 유폐와 고독에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구절을 마음으로 짚으면서 지나온 춘천살이가 어땠는지를 여쭈었다.
“내가 춘천에 간다고 하자 스승인 김동리 선생께서는 무척 걱정하셨지요. 소설이라는 건 사람들과 부대끼며 써야 하는 건데 동료도 없고 문학적 분위기도 없는 춘천에서 잘해나갈 수 있을지를 걱정하신 거겠죠. 사실 실패의 두려움도 있었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여기서 그이의 목소리는 조금 단단해졌다.
“문학은 혼자 하는 거잖아요. 그건 분명한 사실 아닌가요? 실패해봐야 얼마나 실패할 것이며 성공해봐야 얼마나 성공하겠어요. 젊은 사람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작은 실패에 좌절하지도 말고 작은 성공에 자만하지도 말라는 거예요. 글을 쓸 때 느낄 수 있는 자기 존재감, 그에 비견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살림집 옆에는 또다른 가옥이 한 채 서 있었다. 서재였다. 살림집과 서재가 있는 집을 분리한 것도 이채로웠고 그 사이 머뭇거리기 좋은 바닥마루가 깔린 공간이 있는 것도 독특했다. 마치 일상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다시 일상으로 건너가기 위해 필요한 숨고르기 장소 같다고나 할까. 단절과 소통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무위로 돌려놓을 듯한, 삶이 소설이고 소설이 삶이라는 걸 말하려는 듯한, 옹색하지도 않고 공허하지도 않은 균형과 조화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작업실은 평온했다. 으레 새 집에 깃들일 때 더불어 따라오기 마련인 속기는 전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사용했던 책장들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서 있고, 마찬가지로 그이의 손때를 탄 오래된 책들이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재는 수십 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이었다. 기원에서 현재까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지요. 책이 귀했던 시절이라 커서는 서점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죠.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학 수업요? 글쎄, 많이 읽은 것밖에는 없어요. 오영수, 황순원, 김동리 등 그때 한창 활약하던 전후 작가들의 단편을 읽으면서 이런 걸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나중에는 카뮈, 윌리엄 포크너 등의 장편소설과 엘리엇의 시집을 읽었지요.”
중학생 시절에는 ‘개똥철학자’, 고등학생 시절에는 말 그대로 ‘문학소녀’가 별명이었다는 그이는 열일곱 살 무렵 엘리엇의 「네 개의 사중주」를 읽었을 때의 특별한 감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야기가 대학 시절로 넘어가자 서라벌예대 입학시험을 치르던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미아리에 있던 4강의실에서 실기시험을 치를 때였어요. 내 뒷자리의 응시생이 갑자기 담배를 피우더군요. 시험감독관이 끄라고 하자 그 사람이 하는 말. ‘인스피레이션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그러니까 감독관도 내버려두더군요. 그 시절에는 그런 치기가 통했어요. 난 그저 어릴 때부터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더 책을 많이 읽었달 뿐이지 평범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치기를 부릴 줄도 몰랐고 각별하게 가슴에 응어리가 남을 만한 남다른 가정사를 지닌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대학시절 김동리 선생의 수업시간이면 더욱 가관이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복사를 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던지라 품평을 받는 학생은 자신의 작품을 직접 낭독해야 했는데 그 와중에도 학생들은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하면 창문을 타고 넘나들었다고 한다.
“등단한 선배들만 예순 명이 넘던 시절이었으니까.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워낙에 별난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별난 행동을 한편으로는 재능이라고들 생각하잖아요.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무슨 문학을 하겠냐라는 열등감이 있었던 거죠. 김동리 선생께서 내 작품을 한 번 칭찬한 적은 있어요. 그러다 1학년 가을에 나한테 신춘문예에 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고심 끝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투고한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가 되었다.
“다만 나는 내가 문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소모적인 생각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실제로 쓰면서 기를 내는 작가들을 보거든요. 나도 그래요. 계속 쓰면 좋아지게 마련이에요. 때가 되면 폭발적으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안 된다고 내버려두면 거기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아요, 쓰면서 풀어야지. 어차피 소설이란 쓰느냐 못 쓰느냐 안 쓰느냐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잖아요. 쓸데없는 생각 속으로 나를 도피시키지 말고 한 걸음씩 가야 해요. 자기가 쓰기 전에는 자기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자기 검열? 누군들 자기 검열을 하지 않겠어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한 편을 쓰는 거고 그걸 못 이기면 손 놓는 거고.”
그이는 한 걸음씩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런 특별한 방식도 가능했던 모양이다.
“소설을 쓰면 내가 읽고 녹음을 했어요. 원고지에 쓴 걸 한 장씩 넘기면서 읽노라면 객관화하기가 어렵거든요. 녹음한 걸 들어보면 남의 소설 같기도 했어요. 그러면 중복되는 말도 쉽게 걸러낼 수 있고 소설의 리듬도 더 잘 느낄 수 있었죠.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지요.”
플로베르가 떠올랐다.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데는 단 하나의 단어밖에 없다”고 말했던, 이를 두고 ‘적확한 단어의 원리’라고까지 했던. 플로베르는 소설을 쓰면 자신의 집 앞 나무에 대고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한다. 닮은꼴이 아닐 수 없다.
어느덧 시간이 한 뭉텅이 흘러가버렸다.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조급한 마음에 견디는 일에 대해 여쭈었다. 소설을 쓰면서 혹은 소설을 살면서 견디는 일에 대해 무심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이의 첫마디는 ‘어차피 돈 벌려고 글 쓰는 건 아니잖냐?’는 반문이었다. 생활이 무섭다는 것도, 그러므로 더더욱 생활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그이였다.
“작가에게 가장 나쁜 건 바쁜 거예요. 오로지 문학에 분주해야 해요. 문학하는 사람은 문학만 하면 좋겠어요. 먹고산다는 건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뭐라 왈가왈부할 순 없어요.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해요. 이제 곧 딸이 결혼을 해요. 결혼하기 전에 딸이 무척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조언했어요. 살다 보면 눈 딱 감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결혼도 그런 순간의 하나다. 딸도 수긍하더군요. 작가라면 늘 문학을 자기중심에 둬야 해요. 적당히 해서는 안 돼요. 눈 딱 감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용기가 필요해요.”
뜬 눈으로 절벽 아래를 직시할 용기도, 눈 감고 뛰어내릴 용기도 없었던 나는 열없어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그이의 전송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집 뒤편 언덕바지의 소나무 우듬지를 치어다보았다. 내 혀가 붙들고 있는, 입 안에 진득하게 배어 있는 말들을 거기다 얹어놓으려는 듯. 춘천이 조금씩 물러앉았다. 짧았던 봄내 이야기를 갈무리한 채 돌아가는 길. 「봄내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을 나는 찬찬히 손으로 짚어보았다.
“나는 아마 고향이라거나 타향이라는 분별심 없이 이곳에서 계속 살면서 늙어가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충실한 작용으로 이 언저리 어딘가에 무엇으로든 잠시 자취를 남기다가 사라질 것이다.”
누가 가로막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그때까지의 삶을 내던지고 문학을 선택하던 날, 영문 모를 설움에 홀로 눈물 흘렸던 기억이 늦은 오후의 식은 햇살을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빛내는 사금파리 같은 마침표가 되어 어룽거리는 마음속으로 슬몃 들어왔다. (*)
인터뷰이 오정희는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79년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03년에는 독일에서 번역 출간된 『새』로 독일의 주요 문학상 중 하나인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했는데,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서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집으로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 『새』 등이 있다.
인터뷰어 손홍규는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장편소설로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