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를 찾습니다ㅣoil on canvas, 2008, 25.3 X 20.3cm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려다
토끼를 만났다
글_풋,
그림 제공_아라리오 갤러리
주목할 만한 젊은 예술가를 만나보는 'Attention', 그 첫 번째 손님으로 화가 김한나를 초대했다. 이유는 조금 생뚱맞다. 간밤 꿈에 토끼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하겠지만 아 잠깐만, 개풀 뜯어 먹는 토끼! 어쩌면 머잖은 날 그녀의 전시장에서 동일한 제목의 그림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화가 김한나라면 말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토끼라면 말이다.
토끼는 토끼인데 이 토끼 녀석, 하는 짓이 예사 토끼가 아니다. 토끼는 토끼인데 이 토끼 녀석, 종종 토끼발이 아니라 오리발을 내미는 까닭이다. 살짝 삐딱함인가,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춘기 시절 우리들의 치기인가. 음,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고 내 친구인 너도 그랬다. 그때 왜 우리들은 늘 함께였음에도 왜 늘 혼자라는 서러움에 딱 죽고만 싶었을까.
그러나 김한나의 토끼는 뭘 좀 아는 눈치다. 고독과 평화의 차이를 일찌감치 체득한 애늙은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울고불고할 때 그 울고불고하는 우리들을 빤히 쳐다보고 서 있는 게 그녀의 토끼다. 그 울고불고하는 입을 꾹 닫고 성큼성큼 어디론가 사라져 혼자서도 잘 노는 것 또한 그녀의 토끼다. 그래 그 사라짐… 그녀의 토끼는 나와 돈가스를 튀겨 먹고 만두를 빚어 먹으면서 함께 놀다가도 묘卯가 묘하다고 불쑥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그럼 나는 무얼 하느냐. 토끼야, 토끼야, 토끼가 토끼도록 애타고 부를 수밖에.
허허 참 이 토끼의 ‘홍길동’스러움이라니. 감히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현란한 붓질로 옷을 해 입은 것도 아니고, 아르마딜로나 말레이바크나 얼룩점박이하이에나처럼 이름부터 뭐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이 토끼 녀석, 실은 참 평범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눈에서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에두름 없고 가감 없는 솔직함 때문이 아닐까. 아이들이 엄마들을 꼼짝 마, 손들어, 할 수 있게 하는 힘, 바로 그 때 묻지 않은 순수함.
때론 ‘금의환향’하기도 하지만, 김한나는 자신의 등에 토끼가 업혀 있는 줄 모른 채 ‘토끼야 토끼야’ 애를 태운다. 제 방 창가에서 ‘한나야 한나야’ 자신을 부르는 토끼의 목소리를 끝끝내 알아듣지 못하기도 한다. 친구이자 분신임을 넘어서서 알다가도 모를 이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토끼를 찾습니다’를 ‘예술을 찾습니다’로 치환해본다. 토끼를 만나 토끼와 놀고 토끼가 좋아 토끼와 친구가 되는 순간, 토끼는 사라지고 그래서 또다시 토끼를 찾으러 나서야 하는 이 미끌미끌한 술래잡기 놀이 같은 거, 그래 그 예술 같은 거. 어쨌거나 김한나는 좋겠다, 죽은 붕어도 아니고 목도리도마뱀도 아니고 털이 보송보송 귀여운 토끼면 충분하니까!
모서리 끝에 숨겨져 있는 이불ㅣoil on canvas, 2008, 145.5 X 122cm 너무 좋아ㅣoil on canvas, 2008, 80.3 X 60.6cm
e-mail interview
풋, │ 김한나 작가님, 안녕하시죠? 작가님의 사랑스러운 토끼도 잘 지내고 있는지요.
김한나(이하 한나) │ 네, 안녕하세요. 저와 토끼, 둘 다 감기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풋, │ 책상 위에 작가님 도록을 두고 심심할 때마다 넘겨보곤 합니다. 이상하죠. 그림인데, 뭐랄까 읽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독서광이 아니실까 추측을 해보았어요.
한나 │ 과찬이세요. 책을 좋아하긴 해요. 존경하는 작가들도 많고요. 마종기와 기형도의 시를 좋아해요. 피천득의 『인연』, 리처드 파인만의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 또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과 오쿠다 하데오의 책들,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책들이 떠오르네요.
풋, │ 최근에는 어떤 책을 읽으셨나요?
한나 │ 존 어빙(John lrving)의 『고독한 보헤미안』이요. 책이 두꺼워서 이걸 다 읽을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3분의 2 이상은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 조금 이상한 일이 생겨서 도서관에 반납을 해버렸어요. 그 뒤로 만화책만 읽고 있어요.
풋, │ 1981년생이니, 스물아홉… 아직 20대인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아라리오 갤러리 최연소 전속 작가시기도 하다면서요.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나요?
한나 │ 어쩌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대학에서 다른 분야를 전공했어요. 그러다 다시 부산대 회화과로 진학을 하게 되었지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풋, │ 좋아하는 화가가 있다면요.
한나 │ ‘뤽 튀만(Luc Tuyman)’이요. 색이 흐릿흐릿해서 저도 곧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하거든요.
풋, │ 고향이 부산이라고 들었어요. 서울에서 살 의향은 없으신가요? 그 흔한 휴대폰도 없다고 들었어요.
한나 │ 아직은 집이 좋아요. 사람들 만나는 걸 즐겨하지 않고 집에서도 잘 나가지 않아서요. 부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해도 서울은 싫어요. 제겐 무척 힘든 도시일 것 같아요.
풋, │ 그림을 보면 말이에요, 혼자서도 잘 놀 것 같아요, 심심해하지 않으면서. 어때요?
한나 │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저도 꽤 바쁜 편이거든요. 책도 읽어야 하고, 만화책도 봐야 하고, 음악도 들어야 하고, 지나가는 구름도 따라가야 하고, 바람도 잡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오더라고요.
풋, │ 그나저나 토끼 말이에요, 왜 하필 토끼를 그리기 시작한 건가요?
한나야 한나야ㅣoil on canvas, 2008, 10.2 X 10.2cm
한나 │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려다 모든 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음, 그래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또한 그걸 물어서 오래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답이 나오지 않아서 고민하는 걸 그만두었어요. 어쨌거나 이렇게 만난 게 더 중요하지 않은가 해서요.
풋, │ 토끼 말고 다른 동물을 생각해본 적 있어요? 투실투실 돼지나 오동통한 너구리나 찾아보면 많을 것도 같은데요.
한나 │ 가끔 예쁜 고양이를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역시나 저에겐 토끼가 최고예요!
풋, │ 혹시 토끼 인형을 모으기도 하나요?
한나 │ 헉, 눈치 채셨나요? 사실 인형을 좀 모으고 있어요. 이제 겨우 시작 단계이지만 할머니가 되면 전 세계의 모든 인형을 다 파는 가게를 해보고 싶어요. 참, 토끼 인형은 아직 두 개뿐이에요.
풋, │ 그림도 그림이지만 제목이 참 재미나요. 제목 짓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한나 │ 전 유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만화책을 즐겨 봐요. 제목은 그림 그릴 때 조금조금씩 떠올라요. 문장으로 나오는 게 많은 걸 보면 저도 실은 그림을 통해서라도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풋, │ 2005년부터 지난 2008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시를 해온 것으로 알아요. 올해도 전시가 또 잡혀 있다지요.
한나 │ 눈사람이 눈으로 만든 사람이라면 전 게으름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에요. 그만큼 부지런하지 못하단 얘기지요. 하지만 제가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림 그리는 일이에요.
풋, │ 화가로 사는 일의 가장 큰 어려움은 뭘까요?
한나 │ 굳이 화가라서가 아니라 사람들과 밥 먹는 자리가 생길 때 가장 힘들어요. 제가 편식을 하거든요.
풋, │ 올해 토끼에게 계획이 있다면요.
한나 │ 별로요. 그저 잘 쉬고 싶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토끼가 프로야구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예술과는 점점 멀어지는 거 아닌가. 앞으로 애니메이션으로 토끼 이야기를 더 해보려고 합니다. (*)
손에 손잡고ㅣoil on canvas, 2008, 10 X 10cm 금의환향ㅣoil on canvas, 2008, 193.9 X 130cm
화가이다. 세 번의 그룹전을 열었고, '한나의 그림과 서진의 이야기', '한나의 괜찮은 하루', '아라리오 베이징 갤러리', '다녀왔습니다' 등의 개인전을 연 바 있다. 현재 부산에 거주하면서 작업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