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헌. 그는 사진작가다. 1955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쉰여섯이다. 그는 양수리 작업실에서 사진을 한다. 그를 찾아, 그의 사진을 보고 또 그의 암실을 기웃거리려, 나는 그와 마실 두 병의 와인을 골라 들고 양수리로 간다. 집들이 성처럼 우뚝 솟아 있는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나는 대책 없이 뱅뱅 돈다. 그에게 전화를 건다. 설마 이 집이겠어, 싶은 그 집 앞에 서서 환히 웃고 있는 그다. 반갑다. 그러고 보면 홍대에서 첫 만남을 가졌을 때 그도 나도 의심 섞인 경계심을 꽉 조인 허리띠처럼 단단히 두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제야 나는 안팎으로 조금 헐렁해진다.
컨트리, 그의 말마따나 일명 서양 뽕짝이 흘러나오는 작업실에서 나는 그가 하나하나 꺼내서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그의 오리지널 프린트를 넋 놓고 쳐다본다. 멋지다, 에서 시작된 감탄은 갖고 싶어 죽겠다, 로 금세 귀결된다. 부럽다, 에서 시작된 한탄은 어쩔 수 없다, 로 진즉 포기가 된다. 그가 와인을 딴다. 치즈를 자르고 빵을 준비한다. 가질 수 없으면 실컷 먹기라도 해야죠. 대낮의 식탁이 한밤의 술상처럼 느껴지는 대화 아닌 수다, 내가 던진 질문 중에 그게 있었다. 선생님이 습관처럼 가장 즐겨 쓰시는 단어가 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세요? 그걸 왜, 나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인데.
거짓말, 선생님은 틀렸다. 아니 참말, 선생님은 모를 수도 있겠다. 장장 여섯 시간에 걸쳐 선생님이 내뱉은 말 중 가장 빈번했던 것은 그러니까 ‘생각’이었다.
풋,│선생님, 스타일이 정말 멋지세요. 완전 깜짝 놀랐어요.
민병헌(이하 민)│에이 무슨 소리. 실은 사람들이 날 처음 보면 깜짝 놀라. 내 사진과 내가 매치가 안 된다는 거야. 한두 명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래. 내 사진만 생각하면 무슨 도사가 떠오른다나. 도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수염 기르고, 인사동에서 개량한복 입고, 가부좌 틀고 앉아 명상하는 분위기를 연상하는 거겠지. 아무튼 나를 보면 다들 그래. 세상에, 이런 날라리가 다 있나, 하고.
풋,│이를테면, 고무장화인 줄 알았는데 웨스턴 부츠였단 얘기지요?
민│1990년대 초반에 뉴욕에 간 적이 있어. 뉴욕에 말이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재료상이 있거든.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인화지 구하기가 힘들었어. 간 김에 필요한 재료는 몽땅 다 사와야지 했는데 옷가게, 중고 레코드 가게, 청바지 가게 이런 데만 빨빨거리고 찾아다녔지 뭐야. 그때만 해도 옷 참 열심히 사들였는데 요즘엔 그 마음이 확 줄었어. 늙나봐. 슬퍼.
풋,│늙긴요, 아직 청춘이십니다. 아직 예순도 되기 전이신데요, 뭘.
민│내가 진짜로 여행을 좋아하는데 그 마음도 퍽 줄었어. 정말 돈이 없어서 그렇지 내가 미국에 사는 사람보다 미국을 더 많이 돌아다녔을걸? 나 미국에서 안 쉬고 운전한 기록이 열여덟 시간이야. 혼자서 그 어마어마한 평원에, 어마어마한 해가 떨어지는 걸 보면서, 서양 뽕짝 들어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마구 달렸던 기억이 나. 너무너무 좋았어.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갔던 거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무서워. 그걸 아는 것이 실은 더 무서운 거겠지만.
풋,│잡담이 너무 길어졌네요. ‘閔’자 ‘丙’자 ‘憲’자, 선생님은 사진작가이신데, 제가 이렇게나 쓸데가 없어요. 이제 슬슬 사진 얘기 시작해볼까 해요.
민│사람들이 물어봐. 사진을 어떻게 하게 되었느냐, 동기가 뭐냐. 나는 그냥 내버려두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자꾸만 물어본단 말이지. 나는 정식으로 사진을 배워본 적이 없거든. 왜 사진을 하지… 사진에 뜻을 두고 사진학과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물론 작은 동기들은 있지. 중학교 때 아버지가 쓰시던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있으니까. 아무튼 지독하게 공부를 안 했어, 내가. 형제들은 동네에서 소문난 수재들이었는데 유독 나만 날라리였단 말이지. 사실 뭘 잡으면 잘한다, 소리는 들었던 것 같아. 싫증을 빨리 느끼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사진을 하는 걸 보면 이게 딱 나인가봐.
풋,│공부를 잡았으면 민 박사로 사셨을까요. 민 작가와 민 박사 호칭 중에 전자가 더 잘 어울리는데 말이지요.
민│내가 대학을 묵찌빠로 간 사람이야. 묵찌빠 알지? 우리 때는 서강대라고, 그 학교가 무지 인기였어. 대통령 딸도 거기 간다 뭐다 해서 아무튼 애들이 몰렸다고. 공부는 해본 역사가 없는 놈이 대학은 똥품 잡고 거길 쳤으니 당연히 떨어지지 뭐. 전기 발표 나고 그때 사귀던 여자 친구와 실컷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까 후기 원서 넣기 전날이더라고. 담임한테 끌려갔지. 이미 대학은 포기한 상태였는데 원서 쓰라는 거야. 제일 친한 친구 놈도 거기 끌려와 있기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걔가 갑자기 홍대엘 가자는 거야. 거기 끝내주는 애들이 많대. 노는 물이 좋대. 두말없이 학교는 골랐고 과를 정하는데 나는 문과였고, 친구는 이과였거든. 그래서 묵찌빠를 삼세번 해서 지는 놈이 이기는 놈 따라간다 그랬는데 결국 문과인 내가 져서 이과인 친구 따라 전자공학과에 간 거야. 말이 되겠냐? 고등학교 때도 공부 안 한 놈이 대학을 어떻게 다녀, 그것도 공대를. 군대 가기 전까지 학교는 안 가고 학교 앞까지는 정말 열심히 갔던 것 같아. 노느라고.
풋,│그런데 어쩌다 사진이 선생님의 업이 되었을까요.
민│사진보다 암실이었어. 조그만 방에 확대기 하나 놓고 암등 하나 켜고 있으면 그때의 행복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거야. 프린트를 한단 말이야. 물속에 들어 있는 필름을 보면 마약이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거 저리 가라야. 천국이야. 내가 이렇게 잘한단 말인가. 완전 황홀이야. 도취야. 아니, 이럴 수가 있는 건가! 혼자 흥분했다가 혼자 찢어버렸다가 난리야. 왜 젊을 때는 굶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면 배고픈 줄 모르잖아. 이틀 이상을 암실에서 안 나온 적도 있다니까. 그러고는 또 찢어버리지. 그게 끊임없이 반복되니 벗어날 수가 없는 거야. 또 하나는 카메라 파인더. 너무 좋잖아. 숨어 있는 거, 훔쳐보는 거, 그렇게 혼자 즐길 수 있는 거. 은밀한 거잖아. 자연이든 사람이든 저 홀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그것.
풋,│선생님께서는 1984년 동아 살롱에서 「25시」로 은상을 수상하십니다. 사진학과를 나오신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카메라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었을 때가 아니었으니 혼자서의 공부가 쉽지 않으셨을 거라 짐작이 됩니다.
민│일단 교본 사다 보면서 한 2~3년 정도 집에서 했어. 다른 사람 6개월이면 될 것을 나는 혼자니까 훨씬 더 걸린 거지. 그래도 내겐 소중한 세월이야. 실패를 많이 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되게 갑갑하고 답답한 거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짓이 제대로 된 짓인가 엄청 고민이 되는 거야.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내가 얼마나 급했는지 학교 선생을 다 찾아가더라고. 내가 보성고를 나왔는데 그 학교에 사진하시던 홍순태라는 선생님이 계셨거든. 무작정 찾아가서 저 보성 몇 회입니다, 하고 사진을 디밀었어. 그런데 그분 첫마디가 뭔지 알아? 자네, 왜 진작 사진을 하지 않았나, 이거야. 그 한마디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큰 힘이 되어준 거야. 그래서 그분 뒤를 따라다녔어. 하나도 안 창피했어.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분의 가장 큰 강점이 뭐냐 하면 나를 당신의 뷰view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거야. 그때 선생님이 나를 당신에게 끌어들였다면 나는 어쩔수 없이 끌려갔을 거거든. 결국 자기 방식대로 나를 끌어들이지 않는 스승이 좋은 선생 같아.
풋,│선생님이 ‘선생님’을 하셨다면 학생들이 참 좋아했을 것 같아요.
민│한 5년 전이었나, 몇몇 대학이랑 대학원에서 교수들로부터 연락이 왔어. 아이들을 가르쳐줄 수 있겠냐고. 너무나 감사하지. 말도 못하지. 그런데 내가 거절했어.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 학생들이 찾아왔어. 대놓고 내가 한마디 했지. 너희들은 참 나쁜 놈들이다, 너희들이 나한테 뭔가 배울 게 있을지 없을지 그건 내가 잘 모르겠다만 너희들이 내게 뭔가 배우고 싶다면 나를 그냥 내버려달라, 너희들은 왜 너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다 그 안으로 끌어들여서 망가뜨리냐. 난 잘난 놈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할 수 없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 난 학생들을 좋아해. 신나는 일이잖아. 그렇지만 언제 가르치고 또 언제 내 작업을 하겠어. 학생을 가르치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 있겠냐고. 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건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시간을 학생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해. 선생이라는 게 뭐야.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잖아.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는 나만을 위해 살고 싶어. 우리 마누라가 그랬어. 세상에서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사람 중 일등을 꼽으라면 바로 나라고.
풋,│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요. 다들 맘은 굴뚝 같아도 실천하기가 어려워서 포기하고 사는 건데요. 아무래도 아내를 잘 만나신 것 같아요. 행복하시겠어요.
민│행복한 게 아니라 내가 못된 거지. 우리 마누라랑 결혼한 게 1982년이야. 정말 너무나도 가난하던 시절이었지. 내가 결혼을 하고 사진을 시작했으니까. 나는 성질이 못되어서 옆에서 깐죽거리면 아무것도 못해. 내가 사진을 할 수 있었던 건 다 내 마누라 덕이야. 생활은 우리 마누라가 다 했거든. 나는 원수덩어리야. 나라면 아마 이가 갈릴 거야. 내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우리 장모가 얼마나 반대했는지 알아? 대장간에서 만드는 시커먼 부엌칼 있잖아, 그걸 목 여기에 탁 갖다 대더라고.
풋,│헉, 칼이요?
민│솔직히 얼마나 죽이고 싶겠냐. 아마 나라도 그랬을 거야. 돈도 없지, 직업도 없지, 학벌도 없지, 머리는 산발이지, 야전 점퍼 걸쳐 입고, 머리빗 바지 뒤에 꽂고, 말은 죽어라 안 듣는 나 같은 거지 깽깽이에게 고이 기른 외동딸 주고 싶겠냐고. 다니던 대학 때려치우고 군대 다녀와서 친구랑 신촌역 앞에 만화방을 차렸어. 그걸로는 모자란다 싶어 리어카도 한 대 사서 용산 청과물 시장 가 고구마 감자 사다 튀김 장사도 했지. 그때 연대 다니던 마누라 만난 거야. 우리 마누라, 집과 학교밖에 모르던 사람이야. 우리 마누라, 홀어머니 밑에 홀로 컸던 터라 엄마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던 사람이야. 장모님 설득? 나 안 했어. 관둔다고 했어. 어쩌겠어. 반대도 정도껏 하셔야지. 그랬더니 우리 마누라, 난생처음으로 제 엄마를 거역하더라고. 지금은 우리 마누라, 엄마 말 안 들은 걸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걸, 하하하.
풋,│선생님의 막무가내를 아이의 천진으로 껴안으셨을 거예요, 아마.
민│내가 평생의 목표로 삼은 것이 두 가지야. 하나는 무책임하게 살다가 죽는 거, 또 하나는 철이 안 들게 살다가 죽는 거. 나는 못됐어.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힘이 뭔지 알아? 무책임이야. 그런데 하루도 괴롭지 않은 날이 없는 거야.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힘이 또 변덕이야. 하루에 수도 없이 마음이 바뀌니까. 밤에 막차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죽음이야, 막버스. 미래가 안 보이지. 세상이 끝난 것처럼 괴롭지. 애들 마누라 생각하면 미안하지. 결혼도 했는데 밥벌이를 못하니까. 그 생각조차 없다면 정말 나쁜 놈이지. 그런데 아침이 되면 오늘은 또 어떤 여자를 만나나 그런다고. 이런 극단적인 변덕! 하하하. 나는 좋아하는 게 생기면 무조건 해야 해. 그것도 당장. 나는 진짜 돈 받을 게 있잖아, 나만큼 빨리 받는 사람도 없을 거야. 사람들이 놀라. 나는 돈 줄 것도 내가 쫓아다니면서 줘. 왜 그런 줄 알아? 뭔가 머릿속에 들어오면 그걸 빨리 해결하고 지워야 하거든.
풋,│돈의 문제가 갈수록 참 어렵지요.
민│간혹 작업만 하며 살고 싶다는 친구들을 만날 때가 있어. 그들이 내게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냐고 물어.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해. 네가 그걸 고민하고 물어보는 걸 보니까 너는 평생 작업 못하겠다, 라고. 작업하는 놈은 그냥 작업하는 거야. 그걸 고민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못해. 사람들은 내가 흑백만 하니까 무슨 의지가 있어 그러는 줄 아는데 아니야, 사실 나 예전부터 컬러도 하고 싶었어.
풋,│컬러요?
민│흑백 사진 그러면 보통 화면에 콘트라스트가 강한 걸 좋다고 말하거든. 그래서 하이라이트도 있고, 섀도도 있고, 회색 단계도 나오는 흑백.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아주 엉터리거든. 나는 의도한 것도 아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간 거거든. 회색이라는 개념이 대체 뭐야, 어떤 게 회색이야, 생각해보면 말이지 회색이라는 단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궁무진하거든. 약간 진한 회색과 약간 밝은 회색을 프린트해보면 완전 다른 사진을 보는 거거든. 마찬가지로 컬러도 나는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컬러감이라는 게 어떨까 되게 궁금했어. 그런데 왜 포기했냐. 돈이 많이 들어. 약품도 인화지도 너무 비싸고 온도도 민감해야 해. 내가 가진 시설 자체로는 컬러를 못한단 말씀이야. 그러려면 현상소에 맡겨야 하는데 나는 때려죽여도 그 짓은 못해. 그래서 포기했어.
풋,│사진 작업을 시작하신 이래 근 30년 동안 흑백 사진만 전시하고 발표해오셨는데요, 흑백 사진에 대해 소회랄까요.
민│사람들이 내게 그런 수식을 달곤 해. 디지털을 부정하네, 고집이 세네. 내가 뭐 대단한 거라도 한다는 식으로 말한단 말이지. 그런데 나는 예나 지금이나 혼자 있는 게 좋을 뿐이고, 처음에 배운 것이 이 방식이니까 계속 하는 것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뿐이야. 내가 뭐가 잘나서 디지털을 부정하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아날로그야. 왜? 한 시간이면 누구나 다 배울 수 있는 흑백 현상을 30년 해도 완벽하게 못하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들거든. 내가 흑백 사진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내가 고맙다고 여기는 부분이 뭐냐면, 아직도 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보인다는 거야. 그걸 진즉에 봤다면 자동차 갈아치우듯 금세 싫증을 느꼈을 거 아냐. 그런데 하면 할수록 안 되는 부분이 보여. 그걸 고치고 싶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생겨. 되는 부분도 있고,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영원히 안 될 것 같은 부분도 있어. 분명히 안 되는 부분은 어떤 테크닉의 결함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 자체 때문일 거야. 그래서 영원히 해결이 안 된 채로, 그렇게 미결인 채로, 남을 수밖에 없을 거야.
풋,│그래도 솔직히 프린트하시면요, 야 나는 참 이거 하나는 잘한다 싶기도 하시잖아요.
민│내가 인정하기보다 서양에 나가면 갤러리 큐레이터들이 그래. 너처럼 프린트 잘하는 놈 처음 봤다고. 그럼 나는 그러지. 내가 프린트만 잘하냐, 하하. 우리나라 갤러리는 젊은 큐레이터들이 많지만 서양에는 특히나 오래되고 유명한 사진 갤러리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 큐레이터들이 아주 많아. 그들은 말이야, 평생 사진만 들여다봐서 눈이 아주 칼 같아. 전시라도 할라치면 내가 아주 불안해서 죽어. 들킬까봐, 너 이거 잘못되었잖아, 손끝으로 지적당할까봐 무진 오금이 저리다고. 정확하게 콕 집어 말한 사람은 여태 없었지만, 간혹 그걸 느끼는 사람들은 있어. 서양 애들은 우리보다 먼저 사진을 시작했잖아. 마켓도 훨씬 오래되었고. 그 역사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가 없어. 무섭지.
풋,│무섭다… 선생님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나요?
민│글쎄… 겁이 없긴 하지만, 아 이런 게 있겠다. 내가 원체 나 하는 일에 투자를 안 해. 지금 갖고 있는 카메라는 심지어 작동도 잘 안 돼. 암실도 물론이고. 사실 나한테 암실 무지하게 중요하거든. 그런데 인색하단 말이야. 나쁘게 말하면 돈을 안 쓴다는 맥락으로 들리겠지만 사진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야. 장비를 챙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후자야. 지금 저 확대기 보면 놀랄걸. 기울기가 안 맞아서 테이프를 붙여놓고 써. 그걸 알면서도 각도를 내가 맞추면서 쓴단 말이지. 남들이 보면 한심해서 혀를 끌끌 차. 갤러리에서 새것을 사줬는데도 안 써. 1년 동안 손도 안 댔어. 내가 그 이유를 생각해봤어. 나는 두려운 거야. 새로 뭔가를 바꾸면 익히는 데 또 몇 년 걸리잖아. 어떤 미세한 차이를 내가 아주 현격한 차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 좋게 말하면 예민하다는 맥락도 되겠지.
풋,│혹시 지금 쓰고 계시는 카메라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민│가뭄에 콩 나듯 쓰는 걸 여기 갖다 놨겠어?
풋,│에이, 설마요.
민│내가 카메라를 잡는 날이 1년에 열흘을 안 넘어.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는데 내가 한 10년 이상 거래한 갤러리 사장이 하루는 내게 그러는 거야. 내 사진을 본인이 직접 찍기는 하는 거냐고. 왜? 그랬더니 10년을 넘게 봤는데 내 손에 카메라가 들린 걸 본 적이 없다는 거야. 나는 사진을 한꺼번에 찍는 편이야. 한 번에 되게 많은 양을 찍지. 다들 내게 그러고 노는 줄 아는데 나한테 사진은 찍는 게 아니야. 사진은 내게 하는 행위야.
풋,│사진을 한다?
민│사진 그러면 보통 찍는다고 하잖아. 내 경우에 사진을 찍는다, 그건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아. 그건 사진이 완성되는 과정 중의 하나라고. 어떤 과정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물속에서 꺼내 말리는데 가령, 내게 있어 사진은 물에서 꺼내 말리는 과정 또한 찍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거든. 사진은 어쩔 수 없이 카메라라는 기계를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내 사진 같은 경우는 그 이전에 눈으로 보는 거야. 눈으로 본다는 것은 결국 마음이고.
풋,│선생님께서 그간 해오신 작업을 보면요, 구체적인 제목을 달지 않은 커다란 덩어리의 연작들이 중심이거든요. 예를 들어 ‘하늘’ ‘잡초’ ‘안개’ ‘숲’ ‘물’ ‘몸’ 등… 신기한 것은 작품만의 제목이 따로 붙어 있지는 않지만 강렬하게 사진이 남는다는 거예요.
민│왜 선생님 작업에는 제목이 없어요? 라는 질문 정말 많이 들었어. 나는 그것처럼 멍청한 질문은 없다고 봐. 찍은 사람이 지시한 대로 볼 게 뭐 있어? 나도 예전에는 타이틀을 근사하게 붙여보려고 노력했다고. 그런데 해보니까 아닌 거야. 하늘은 그냥 하늘이고, 잡초는 그냥 잡초고. 사실 그것도 안 붙이고 싶어. 돌이켜 내 작업을 보면 변태적인, 어떤 에로틱한 것의 연장선상에 모든 작품들이 올라 있다고 할 수 있어. 내가 에로틱한 부분들을 좋아하거든. 그런데 있잖아, 내 누드를 보면 사람들이 하나도 에로틱하지 않다고 말해. 더 놀라운 건 말이지, 내가 찍은 누드 작품을 ‘SNOWLAND’ 시리즈에 슬쩍 끼워 넣어도 잘 몰라. 이건 내 사진이 무슨 시리즈든 결국 다 똑같은 사진이란 얘기야. 어떻게 보면 다 한 시리즈란 말이지. 이 사람 1980년대 작업은 좋고 2000년대 작업은 별로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1980년대도 이렇고 2000년대도 그렇고 이 사람은 이렇게 생겨먹은 거구나, 그 중심에서 그 기둥에서 벗어나지 않았구나, 부디 그렇게 봐줬으면 하는 거지.
풋,│선생님의 누드는 참 탐이 나요. 모델 선정 기준 또한 꽤나 까다로우신 편이시겠죠?
민│일단은 피부가 깨끗해야 해. 선이 곱게 표현되려면 그게 우선이야. 뚱뚱하고 마르고 그건 나중 문제라고.
풋,│풍경이면 풍경, 사람이면 사람, 작업을 그렇게 해보시니까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민│사람을 찍으면 그 대상이 직접 나를 도와줘야 하잖아. 그 사람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찍을 수가 없잖아. 누드를 찍을 때 내가 정한 나름의 원칙이 있어. 만약에 나를 도와줄 사람을 돈을 주고 사야 한다면 나는 이 작업을 안 한다! 또 하나는 어떤 부분을 찍고 싶은데 그 부분을 쑥스러워한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되고 또 어떤 부분은 안 된다, 한다면 나는 이 작업을 안 한다! 나는 누드를 찍을 때 그때그때 찍은 것을 모델에게 다 보여줘. 샘플 사진을 보고 나면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처음에 나는 풍경이 이와는 굉장히 다른 작업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사람을 찍어보면서 안 건데, 자연 역시 자연이 도와줘서 찍을 수 있었던 거더라. 내가 맑은 날은 카메라를 안 들고 나가지. 그게 어차피, 연출일 수밖에 없었던 거야. 처음에는 그 생각을 못했어. 스튜디오에서 사람을 찍는 것은 연출이고,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이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내가 정해놓은 뭔가가 있었고, 그 자연이 나를 도와준 그때 내가 작업을 한 거더라고. 그때 알았어. 아, 똑같은 거구나!
풋,│우문이지만, 사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민│재능도 중요하고, 환경도 그에 못지않지만 정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나 오늘은 손님 접대하느라 와인에 치즈에 빵에 커피까지 근사하게 차려놓고 폼 한번 잡았지만 평소 여기 양수리 작업실에 와 있을 때는 하루 종일 라면도 한 그릇 안 끓여 먹어. 진짜 영양실조였다니까. 내가 가장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어. 나보다 암실에 오래 있었던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어린애 같다고 놀리지 말라고, 그만큼 절절했으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 새끼 배가 부르니까 별소리를 다 하네, 그래. 그런데 난 참 고달프거든. 싫어서가 아니라 좋아서 매달리니까 몸이 너무 힘든 거야. 그래도 감사한 건 나같이 무능력한 사람이 뭐라도 할 게 있다는 게, 남들이 또 그걸 보고 잘한다고 하는 게 참 고마운 거야.
풋,│좌절감이랄까요, 사진으로 힘든 때가 분명 있으셨지요?
민│내가 처음 사진을 배우고 찍을 때는 서울 시내 지도책을 갖고선 한 번 갔던 길은 빨간 줄 긋고, 두 번 갔던 길은 파란 줄 그어가며 다녔어. 빛에 따라 아침에 간 거 다르고, 저녁에 간 거 다르고, 1년 365일 파리 새끼 모기 새끼까지 다 찍었어. 사진을 시작한 1980년대의 10년 세월은 내게 두 단어밖에 없어. 열등감과 소외감. 내가 우리 선생 따라다닐 때 내 또래의 스타 작가들이 있었거든. 그들은 이미 선생들이었어. 그때 내가 왜 공부를 안 했나, 사진학과에 안 갔나, 처음 후회했어. 아주 배배 꼬일 수도 있던 시절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내가 넉넉한 가정에서 컸어. 어려운 과정은 있었지만 근본이 히히 하며 컸기 때문에 어려움을 쉽게 잊었던 것 같아. 그보다도 뭐, 내가 너무 놀았다는 뒤늦은 후회의 시기랄까. 그런 것들에 대한 번민 같은 것이 있었어. 그보다 나를 더 힘들 게 했던 것이라면 1980년대 말 유행처럼 번진 사진계의 변화였어. 나는 흑백 사진 겨우 배웠는데, 이게 재미있어서 이렇게 가다 보면 뭔가 되겠구나 하였는데, 그 사진판이라는 게 다 뒤집어진 거야.
풋,│메이킹 포토라든지 설치사진이 그 시기에 대거 유입되고, 유행처럼 번졌지요, 아마
민│솔직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어. 나 어떡해, 어떡해야 하나, 그런 혼란이 왜 없었겠어. 그런데 나는 계획을 세우면서 사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오히려 내가 하는 작업으로 몰입되더라고.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놈인데 이거 해야지 뭘 해. 사진 본연으로 가보자고. 이미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거의 다 찍었잖아. 사진이 발명된 이래 사람 뱃속 머릿속까지 다 찍었는데 안 찍은 게 어디 있어. 스트레이트 사진은 끝났다는 그 말은 맞는 거지. 그런데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보잖아. 그렇다고 내가 보면 안 되나, 그거 아니잖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누드를 찍었잖아. 그렇다고 내가 찍으면 안 되나, 그거 아니잖아. 결국 대상에 대해 자유로워지자, 그 얘기야. 이 사람이 본 바다와 저 사람이 본 바다가 어디 같아? 이 사람이 찍은 누드와 저 사람이 찍은 누드가 어디 같으냐고. 새로운 것만 찾으러 다니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내 생겨먹은 대로 작업을 해야 해, 그러면 오히려 작업은 쉬워진다고. 내가 작업하면서 세운 원칙이 바로 그거야. 기둥을 벗어나지 않는다! 기둥을 벗어나면 할 일은 많아지지만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풋,│어쨌거나 선생님처럼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이들이 점점 줄고 있는 실정입니다.
민│아날로그, 그러니까 젤라틴 실버 프린트를 하는 사람 요즘에는 거의 없어. 아니, 없을 수밖에 없지. 뜻을 둔다 해도 앞으로는 할 수도 없어. 모든 재료가 다 없어지고 있거든. 보관 기간이 지나면 다 변질되기 때문에 많이 사둘 수도 없거든. 나? 나는 이 상황이 무지 좋아. 재료가 없어서 더는 아날로그 작업을 못한다면 그 핑계 삼아 놀 수 있잖아, 아주 고고하게, 히히.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위기다, 그렇게 생각 안 해. 사람들이 디지털이다 하면 아날로그는 소외되고 그러는 줄 아는데 컬렉션 하는 사람들이 극소수이긴 하지만 세상에 인간이 워낙 많잖아. 어떤 마니아라는 건 분명히 있는 거고, 어떤 분야든 그 마니아를 소화하기도 힘든 게 맞아. 나? 마니아가 좀 있지. 내 경우에는 내 사진을 사는 사람들이 시리즈가 계속 나올 때마다 관심을 가져주는 편이야.
풋,│값을 따져서 뭣하지만, 선생님 사진 무지 비싼 것으로 알아요. 아, 갖고 싶어요. 어디 버리는 거라도 생기시면 전화를 좀…
민│나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사진 참 많이 줬어. 그런데 나중에 안 것은, 사람은 뭐든 돈이 좀 들어가야 귀하게 여긴다는 거야. 확실히 많이 들이든 적게 들이든 돈을 들이면 마음이 달라져. 요즘에는 술 마셔도 잘 안 주지만.
풋,│헉! 정말요? 아, 아까워라. 그때 만날걸.
민│내가 매니지먼트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걸 잘 못해. 일일이 쫓아다니는 성격도 못 되고, 갤러리가 붙어주면 좋은데 내가 또 사람들을 잘 못 믿어서 맡기지도 못해. 내가 들고 다니니까 한계가 많아. 내가 성격이 아주 못된 것이 갤러리와 인연을 맺다가도 내가 싹 봐서 잘릴 것 같으면 내가 먼저 잘라. 특히나 서양 애들에게는 그런 게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애국자도 아닌데 이상하게 서양에만 나가면 괜히 지기 싫고, 무시당하기 싫고, 그런 마음이 드는 거야. 프랑스에 ‘보댕 르봉’이라고 파리에 유학 가 있는 친구들에게 거기서 전시한다고 하면 놀라 자빠질 정도로 유명한 갤러리가 있는데, 거기도 내가 먼저 끊었어. 왜냐고? 맘에 안 드니까! 나를 소외시키고 무시하는 뉘앙스가 느껴지면, 또 돈 계산법도 너무 다르게 한다, 고로 지금이다 하는 타이밍이 오면 싹둑, 사실 알고 보면 나 혼자 오버하는 거지. 그래서 얘기했지. 내가 아무래도 네게 잘릴 것 같으니 내가 먼저 너를 자르겠다, 이런 통고. 뭐라고 하긴, 그저 웃지. 마무리? 아직도 지지부진이야. 연애가 그렇듯이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어렵잖아.
풋,│선생님은 특유의 어떤 예술가적 기질이 분명 있으신게 맞아요.
민│나는 예술이라는 말 자체가 싫어. 정의가 뭔지 모르겠어. 다만 그런 거야. 애들 식으로 말하자면 나 꼴린 대로 산다! 나 하고 싶은 대로 산다! 나는 비교적 그걸 좀 일찍 실천한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아. 나는 패션이나 광고 사진에도 관심이 많았어. 시작했다면 아주 잘했을 것도 같아. 그런데 그쪽 일은 공동 작업인 거야.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클라이언트가 있고, 아트디렉터가 있고, 모델도 있고, 코디도 있고, 이게 다 섞여서 함께 작업하는 거잖아. 나는 60 가까이 살아오면서 보통 사람들이 얘기하는 출근이란 걸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내가 리어카를 끌든 안 끌든, 끌다가 그것도 싫어 다시 집으로 끌고 들어오든 그건 다 내 의지대로였단 말이야. 전에 한 작가가 날더러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말하래. 내가 워낙 힘들게 작업하는 걸 잘 아니까. 그래서 내가 고맙다면서 이렇게 물었어. 나도 사실은 그쪽 사진을 하고 싶었고 기웃거려본 적도 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촬영이라는 게 약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 내일 아침 10시에 어디로 와라, 그러면 밤에 촬영 장비도 챙기고 그럴 때 기분이 어떠냐. 대답이 말이지, 자기는 너무 좋대, 콧노래가 절로 나온대. 얼마나 좋아, 좋아서 하는 일인데. 그럼 됐다, 나는 못하겠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일 것 같다, 그렇게 일하면 나도 손해고, 의뢰한 사람도 손해다, 그 상태에서 어떻게 좋은 사진이 나오겠냐. 그때 나는 명확히 깨달았지. 마음속으로는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안 거지. 그걸 두고 내게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어.
풋,│전시 계획이 또 있으신지요.
민│결정은 아직 안 했어. 외국에서 요구해온 곳들도 있는데 계속 뭉개고 있어. 나는 전시를 먼저 요구하는 편이야. 돈도 돈이지만 일단 보여주는 게 즐겁잖아. 그런데 어떤 나라의 어떤 갤러리든 좋다는 갤러리는 극단적인 상업 화랑이야, 극단적으로 비즈니스를 잘하는 갤러리. 우리들 젊었을 때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거 너무 증오하잖아. 예술이냐, 상업이냐. 사실 나도 알게 모르게 변하기는 변해버린 거야. 계획은 일단 있다고 해두지 뭐. 사진은 계속 찍을 테니까.
풋,│그나저나 요즘에는 어떤 생각을 주로 하세요?
민│동두천.
풋,│동두천요?
민│내가 실은 동두천에서 태어났어. 거기서 유치원까지 다녔지. 동두천이라는 데서 1950년대 후반에 유치원까지 다녔다면 꽤나 부자였단 얘기거든. 전후의 동두천… 어느 날 술 한잔하고 음악을 듣는데 느닷없이 동두천이 생각나는 거야. 내 근원적인 것에서 내 작업과 연관된 것이 왜 없었겠나, 실제로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부분들이 그곳과 닿아 그 안에서 감지되었던 것은 아닌가. 전에 뉴욕에 갔을 때 슬리퍼를 신고 마구 돌아다니는데 상점 쇼윈도에 여러 가지 장식을 해놓은 게 있었어.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이거 재밌네, 하며 그때는 잊어버렸겠지. 그런데 결국 그런 것들이 내 사진에 오더라고요. 다른 얼굴로, 다른 형태로, 이를테면 내 ‘잡초’들 속으로… 마음으로 찍으면 그 순간엔 잊더라도 그 순간이 필요한 또 어떤 순간에 그런 것들이 다 살아나 내게로 오는 게 아닌가…
풋,│마지막으로 나, 민병헌은 어떤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민│나는 탐미주의자야. 끝까지 아름다움에 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는 상관없고 나한테는 무조건 예뻐야 해. 풍경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어디 한구석 꽂히면 뿅 가는데 그 기준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거. 참 예쁘다, 그거! (*)
민병헌 │1982년 집에 암실을 만들어 본격적인 흑백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1984년 2월 <동아국제사진살롱>에서 컬러 사진 「25시」로 은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7워렝 파인힐화랑에서 첫 개인전 <공간>을 열었다. 이후 국내외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92년에는 사진예술가 제정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사진집으로 『눈』. 『민병헌―열화당 사진문구』. 『잡초』. 『SNOWLAND』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