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세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난 이틀간 앓았던 나의 텅 빈 위胃는 무사한가. 오늘은 난생처음 가수를 만나 얼굴을 맞대는 날인데, 내 다크서클을 어쩌나. 그런데, 저 소리는 혹시 비가 내리는 소리인가. 나는 그의 책을 들고 다니며, 그의 음악을 들으며, 비가 내리는 골목을 걸으며, 오전 시간을 할애했다. 손에 들린 노란 책이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글은 시종일관 따듯했으나 고독했고, 종종 싱거운 유머가 섞여 있어 웃음짓게 했다. 그것이 참으로 위안이 되어주었다. 비와 그의 음악은 나를 조금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목소리, 가슴을 쓸어내리는 가사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파서인지, 조금 쓸쓸해졌다.
우리는 홍대의 작은 카페에서 대면했다. 그는 짧은 머리에 검은 외투, 검은 목도리를 와이Y자로 목 끝까지 여미고 있었다. 공손히 앞으로 포갠 오른쪽 검지 끝에 밴드를 붙였다. 나는 사람의 외양을 살피고 묘사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을 대변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소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가졌다. 눈이 마주치면, 피하지 않는다. 목소리는 노래를 부를 때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인터뷰 내내 물만 조금 마셨을 뿐이었고 나는 계피가 들어간 차를 두 잔이나 마셨다. 카페에서는 끊임없이 프랑스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는 이내 그쳤다.
1. 노란 책, 보통의 존재
김유진(이하 김) | 오늘 아침, 작가님의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는데, 비가 오더군요. 비와 참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왠지 비를 좋아하실 것도 같은데,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으시는 편인가요.
이석원(이하 이) | 영향을 많이 받지요. 저는 반대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기분이 많이 처지는 편이에요. 어렸을 땐 안 그랬는데 요즘은 맑은 날이 좋아요. 작업하는 데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날씨가 안 좋으면 일상생활에선 조금 힘든 부분이 있어요.
김 | 책 처음 받으셨을 때 기분은 어떠셨나요?
이 | 너무 좋았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김 | 표지는 어떤가요. 샛노란 색이에요. 직접 고르신 건가요?
이 | 표지가 마음에 들어요. 디자인은 몇 가지 기본적인 부탁만 드렸었어요. 제 책에는 가능하면 사진이나 장식, 화려한 색이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음악하는 사람이 부업으로 책을 낸다는 인상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멋을 부리지 않은 듯, 옛날 문학책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최대한 심플하게요. 띠지도 두르지 않고.
김 | 책을 사러 서점에 가면서, 음악인의 산문집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어요. 하드커버, 페이지마다 박혀 있는 사진, 얇은 두께 같은 것 말이지요. 하지만 직접 책을 보니 정반대더라고요. 간결한 표지에 글만 빼곡한 데다, 책이 적잖이 두꺼워 놀랐어요. 덕분에 진지한 자세로 독서에 임하게 되기도 했고요.
이 | 사실은 백 페이지 정도 덜어낸 것이에요. 편집을 하고 보니 470페이지나 나오더라고요. 다 덜어낸 것이죠. 사전이 아니니까요.
김 | 글 쓰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홈페이지에 거의 매일 일기를 올리시던데.
이 | 일기는 매일 써요. 그리고 매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요. 비워진 날들은 썼다 지운 날들이 대부분이에요. 물론 좋아서 쓰지요. 억지로 쓰는 것은 없어요. 앨범 작업을 하고 나면 지쳐서 당분간 음악도 듣지 못할 정도가 되곤 하는데, 이상하게 책이 나오고 나선 계속 내 안에서 활자가 풀어져나오더라고요. 책 이야기만 쓰는 블로그도 따로 만들었어요. 그곳에는 하루에 두세 개씩 글을 올리고 있어요.
김 | 얼마 전 낭독회를 하셨더라고요. 작가로서 사인회나 낭독회 등 여러 행사들을 치르셨을 텐데, 가수로 활동하는 것과 작가로 이런저런 활동들을 하는 것에 다른 기분이 드나요.
이 | 음반 활동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에요. 제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책을 접하고, 서점에서 책을 읽고, 책을 통해 저를 알았다고 말할 때 느끼는 쾌감이 참 큰 것 같아요. 처음부터 바랐던 것이 그런 부분이었어요. 그래서 작가 프로필에 ‘언니네 이발관’이란 이름도 넣지 않았고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조금 슬펐지만, 인터넷 서점의 프로필에도 무명 작가라고 뜨길 원했어요. 음악인으로서의 저의 이름이 책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데 분명히 장벽이 될 거라 생각했고 그 부분을 경계했었죠.
김 | 산문가로서의 재능이 특출하신 것 같아요. 문장이 유려하고, 오랫동안 글을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이 | 진심이세요?
김 | 진심이 아닌 것 같아요?
이 | 첫 책이다 보니, 작업을 하면서 제 글에 대해 확신이 없었어요. 책을 내기 전에 출판사 쪽에 2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하려고 하기도 했죠. 다행히 책을 탈고하고 나서, 문인 분들이 보시고 칭찬을 해주셨어요. 하지만 음악하는 사람이 책을 냈다는 건 분명 그 자체로 어떤 장벽이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김 | 음악적 아우라가 있는 상태에서 온전히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 수도 있겠네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앨범이나 책을 보면서 느낀 건데, 작명 센스가 남다르세요.
이 | 저는 이름 짓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앨범 타이틀 정할 때도 굉장히 고민하는 편이고요.
2. 소년, 이석원
김 | 산문집은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깊이 생각하시는 편인가요.
이 | 관계와 소통의 문제는 제가 가장 자신 없고, 힘들어하는 부분 같아요. 제가 살아가면서 맺는 관계들의 문제들은, 제가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속되어온 테마예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 사랑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고요.
김 | 소년 이석원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이 | 사실은 어두운 기억밖에 없어요. 그 시기의 제 삶은 온통 잿빛이었어요. 삶에 대한 의욕도 손톱만큼도 없었고요.
김 | 그 당시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나요?
이 | 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스물네 살 때였어요. 그나마도 열정적인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요.
김 | 글을 쓰지도 않았나요?
이 | 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정말 그냥 살았어요. 제가 한 일은, 밤만 되면 밖에 나가는 것뿐이었어요. 열한두시 즈음이 되면 집을 나가서 새벽 네다섯시까지 매일 택시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어요. 20대 중반에 제 차가 생겼는데, 그땐 정말 밤새도록 달렸죠. 그냥 달렸어요. 배회라고 하지요.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가슴이 터질 것 같았거든요. 결혼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여서, 동네 공터에 농구하러 나간다 하고 몇 시간 동안 배회하곤 했죠. 그 습관이 멈춘 지는 몇 년 되지 않아요.
김 | 그 시절에는 택시 안이나 도로 위가 자신의 도피처이자 안식처가 되었겠네요.
이 | 그랬던 것 같아요.
김 | 지금은 그 습관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새로운 안식처가 생겼나요?
이 | 지금은, 책 보는 거요. 서점을 매일 가요. 서점이 너무 좋아요. 서른여덟 살 때까지 책을 한 줄도 못 읽었어요. 그러다 작년 초부터 드문드문 읽었어요.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건 올해 초부터예요. 요즘은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책만 봤으면 좋겠어요. 집하고 서점만 오갔으면 해요. 일단 서점에 가면 거의 하루에 다섯 권에서 열 권 정도의 책을 사는 것 같아요.
김 | 그 책들을 다 읽으시나요?
이 | 한 30권 정도를 동시에 읽어요. 이 책이 지루하다 싶으면 다른 책을 꺼내 보고, 전혀 다른 장르의 책을 읽기도 하고요. 처음엔 독서 경험이 없어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붙잡고 있었어요. 너무 힘들고 진도도 안 나가더라고요. 차차 요령이 생겨, 이제는 자유롭게 읽고 있어요.
김 | 요즘 읽는 책은 무엇인가요?
이 | 『돈키호테』요. 너무 좋아요. 미치겠어요. 그걸 사려고 어제 강남교보와 광화문교보를 다 뒤졌어요.
김 | 제2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이 | 네. 완전히 달라졌어요, 저는. 사실 음악이 좋아서 찾아 듣던 것은 음악을 하기 이전이었어요. 음악을 하면서는 정작 음악 듣는 즐거움을 잃어버렸었어요. 음악하는 것도 즐겁지 않았고요. 그런데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즐거워요. 주변에서 유난 떤다 말해도, 어쩔 수 없어요. 너무 좋아요.
3. 아름다운 것
김 | 책에 보면, 칠순을 맞이하시는 어머니에 대한 소회가 남달라 보였어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졌어요.
이 |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다른 사람과 별 차이 없겠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와 갈등이 무척 심했어요. 워낙 맞지 않았거든요. 지금에 와서는 남은 시간들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당신이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어요.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허비하고 싶지가 않아요.
김 |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생각이 많을 것 같아요.
이 | 누구나 그렇듯이 20대 후반, 30대 후반이 되면 생각이 많아지잖아요. 서른여덟이 되었을 땐 생각이 많고 힘들었었어요.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서요. 지금은 다 좋아요. 편안하고, 오히려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젊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고통, 인생의 숙제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때는 잘 보이고 싶고, 일등이 되고 싶어하던 마음이 강했거든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경쟁에서도 자유로워지고, 많은 부분들을 놓게 되더군요. 지금은 여유가 생기니까 더 좋아요. 건강할 수만 있다면 더 나이가 들었으면 해요.
김 | 나이 들면서 달라진 부분이 정말 많은가봐요.
이 | 그건 정말 살아봐야 알아요. 누구에게 물어도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경제적으로도 불안하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그 시절의 부침들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거든요. 지금이 좋은 거지요.
김 | 창작자로서, 본인에게 창작의 원천이 되는 감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이 |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에게는 향수라는 것이 우선 중요한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너무나 중요한 테마예요. 예전에 겪었던 일들을 되살리는 것이 이 책에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지요. 두 번째는, 타인에 대한 말 걸기가 아닐까 해요. 아무리 스스로가 타인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자위한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세상에 던지는 것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이겠죠. 세 번째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에요. 저는 사라지는 것이 너무 싫어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 역시 그런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고요.
김 | 고통에 대한 담담함, 유머를 잃지 않는 태도도 눈에 띄어요. 이를테면, 연애 실패에 대한 아픔을 극복하고자 과거의 사진들을 태워버리려 하는데, 불이 번져서 부랴부랴 소화기로 끄는 부분에선 소리 내어 웃게 되더라고요.
이 | 유머는 저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요소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나이가 드니까 삶 자체나 제가 겪은 일들에 대해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자신의 감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었어요. 그 편이 더욱 호소력 있고요. 감정이 격해 있을 때 적은 글들을 다음 날 다시 보면, 부끄럽잖아요. 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전혀 감정이 전해지지도 않고요.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볼 수 있을 때 제가 쓴 글들을 다시 수정해요. 그러다 보니 점점 글이 간결하고 담담해지는 것 같아요.
김 | 일기도 여러 번 고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 네. 미친 듯이 고쳐요, 정말.
김 |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음식에 대한 묘사였어요. 거의 두 페이지가량을 갖가지 요리와 식재료의 맛에 대해 기술해놓으셨던데요. 음식을 못 드시니 많이 괴로우시겠어요.
이 | 전 담배도 피우지 않고 별다른 취미도 없어서,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어요. 정말 힘들죠. 절식을 한 지 여섯 달 정도 됐는데, 처음엔 너무 우울했어요. 지금은 많이 적응이 됐지요.
김 | 평소엔 뭘 드세요?
이 |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신 밥과 물로만 데친 몇 가지 반찬들, 연근, 버섯, 숙주나물… 이런 거요.
김 | 섭생이 바뀌면, 생활 방식도 많이 바뀔 텐데, 변화가 있으신가요?
이 | 지난주에 어머니 생신이 있어, 작정을 하고 먹었어요. 먹으면 안 되는 것들을요. 그렇게 먹고 싶었던 것들이었는데, 막상 먹고 나니 많이 허무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책 읽는 게 좋아요.
김 | 저로선 상상이 안 가는 부분이네요. (웃음)
4. 의외의 사실
김 |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부분은, 사막처럼 고요한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문장이었어요. 책을 읽다 보면, 문장에서 줄곧 묻어나오는 것은 적막과 고요인데, 스스로는 또다시 고요한 곳을 찾아 헤매다니,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이 | 일단, 저는 제가 있는 공간이 아주 조용해야 해요. 이전엔 아파트에 살았었는데, 최근에 주택가로 이사를 왔어요. 처음엔 싫었죠. 집들도 밀집되어 있고 골목도 좁아서 시끄러울까봐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조용해요. 여기서 영원히 살고 싶을 정도예요. 다른 부분으로는, 제가 일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예요. 인터뷰나 행사, 콘서트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너무나 바빠요. 우울하죠. 삶이 고요하지가 않아요.
김 | 정말 바쁘시네요. 책 읽을 짬을 어떻게 내시는지 궁금해요.
이 | 음… 제가 목이 굉장히 약해요. 그래서 공연을 하기 전에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 해요. 말을 할 수도 없고요. 잡혀 있는 스케줄이 아니면, 늘 집에만 있어요. 바쁘지만 어느 순간은 고립되어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책을 읽을 수 있는 거죠.
김 | 앞서, 책이 나온 뒤로도 끊임없이 내면에서 하고 싶은 말들이 나온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다음 책에 대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이 | 이 산문집에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방황하다 구원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 글쓰기와 여행이었다는 부분이 있어요. 저는 기존의 책들과 다른 나만의 여행기를 써보고 싶어요. 저희 홈페이지 상단에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미소’란 문구가 있어요. 그것을 주제로 북극이나 아마존처럼 세상에 사라져가는 공간들에 대한 여행기를 펴내고 싶어요. 왜 사라져가는지, 막을 수는 없는지 등등… 다른 하나는 소설책이고요.
김 | 혹시 소설책의 내용을 살짝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 | 그건 비밀이에요. (웃음)
이석원 | 나이 탐험가. 서른여덟의 나이에 데뷔작을 낸 무명의 작가. 산문집 『보통의 존재』가 있다.
김유진 |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 『늑대의 문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