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난
좀
유치해
글_풋,
사진_백다흠
▦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핑계 삼아 선생을 두 번 뵈었다. 선은 북아현동 자택에서였고, 후는 평창동의 한 카페에서였다. 처음에 선생의 ‘병기’는 말마따나 ‘눈’이었다. 그건 어떻게 피한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닌, 제압의 기술을 타고난 장사의 손 같은 것이어서 나는 선생의 아귀힘이 언제나 느슨해질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좀처럼 웃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하던 말을 끊지 않았고, 끊을라치면 매섭게 맥을 이었다. 한 시간 반가량의 인터뷰를 마칠 즈음 작심하고 챙겨간 세 대의 카메라가 퍽, 퍽, 퍽, 내리 눈을 감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그제야 가야금을 앞에 둔 선생이 처음으로 웃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이거 카메라가 너무 좋아 그래. 아이처럼 환하던 한순간, 무방비로 중무장한 선생의 그 빈틈을 내가 놓쳤으려고. 그렇게 나는 알아버렸다. 선생의 또 다른 ‘병기’가 다름 아닌 ‘웃음’이라는 것을.
풋,│가야금을 일찍 시작하신 걸로 압니다.
황병기(이하 황)│내가 서울재동초등학교를 나왔어. 그 학교는 방과 후에 특활반 같은 걸 운영했거든. 근데 내가 노래를 꽤 잘했어. KBS에 나가서 독창도 하고 그랬다고. 그러다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악기를 하나 하고 싶더라고. 근데 맘만 있었지 누구에게도 말을 못했어. 변변한 걸 구경이라도 했어야지, 고작해야 손풍금인데. 그러다 6·25가 터졌어.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갔는데 거기서 ‘피난학교’를 다녔지.
풋,│피난학교요?
황│그게 뭐냐면 배추밭이나 무밭으로 쓰던 땅을 얻어서 거기다 천막으로 학교를 짓는 거야. 처음에는 천막학교 정도가 아니라 버스 지나가는 길에 있는 전신주에다 칠판 하나 걸어놓고 오늘부터 학교다, 그러면 애들이 길바닥에 앉아 공부를 하는 식이었어.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때부터야, 나 가야금.
풋,│피난지에서 가야금이라. 그거 웬만해선 그리기 힘든 그림인데요.
황│예전에 한국일보에서 『피와 땀은 말이 없다』라는 책이 나온 적이 있어. 자수성가한 사람들만 모아놓은 건데 우리 아버지 얘기도 나와. 꼭지 제목이 ‘칠전팔기’야. 실패도 재기도 밥 먹듯 하고 아무튼 우리 아버지는 파란만장한 사업가였어. 돈도 돈이지만 사업에 완전 미친 사람이었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 아버지가 엄청나게 돈을 벌었어. 아마 부산에서 가장 큰 집에 살았을걸? 대지가 한 3천 평이 넘는 일본식 이층집이었는데 자동차 세 대가 집 마당을 휘젓고 다닐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어쨌거나 그 집에 늘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지 친구는 첩하고 들어와 2년을 살다 나가기도 했어. 가만,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풋,│아버지 돈 무지하게 버셨다는 얘기요.
황│아, 그래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라디오도 안 들으셔. 무조건 고요해야 해. 일요일에도 혼자 절간 같은 데를 찾아다니셨어. 고독을 즐기셨던 거지. 며느리(소설가 한말숙)가 쓴 것도 단 한 장을 안 읽으셔. 이유는 간단해. 잔소리라고.
풋,│잔소리요?
황│뭘 그렇게 시시콜콜 그랬다저랬다 하냐는 거지.
풋,│그럼 아버지는 무슨 책을 읽으셨는데요?
황│사랑방에서 혼자 『삼국지』나 『수호전』을 원전으로 보셨어.
풋,│아버지가 가야금 한다니까 반대하지는 않으셨어요?
황│가야금 배우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닌데 내 성적이 떨어질까 그걸 염려하셨지. 근데 그때 우리 집에서 아인슈타인이면 다 됐어.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과학자이지만 바이올린을 켠다, 그것도 굉장히 잘한다, 슈바이처도 파이프오르간 연주자이지 않았냐, 나는 가야금을 하면 공부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 있다, 마구 우겼지.
풋,│가야금 가르치는 학원이 전쟁통에도 있었나봐요.
황│하루는 반장이 날더러 가야금을 배우지 않겠냐고 그래. 깜짝 놀랐지. 엉뚱하잖아. 가야금은커녕 거문고 할애비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그럼 어떻게 아느냐. 역사시간에 선생님이 가야금이라는 게 있다, 우륵이다, 거문고라는 게 있다, 왕산악이다, 설명을 하니까 상상만 했지. 근데 그걸 배우자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잖아. 호기심에 따라가서 보니까 고전무용연구소라고 일본식 집이 있어. 장구 소리가 나는데, 거기서 어떤 노인이 나와. 지금은 내가 더 늙었으니까 노인도 아니겠지만 여하튼 간에 그 노인이 날 보더니 소리를 꽥 질러. 여길 왜 왔냐는 거지. 가야금 배우겠다고 하니까 글쎄, 부라렸던 눈을 확 풀더라고.
풋,│가야금 소리를 그때 처음으로 들으셨겠네요.
황│벽에 가야금이 대여섯 대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한 대를 내려놓더니 무릎에다 놓고 타. 듣는 순간 그냥 반했어. 둥둥 울리는데 아주 기가 막혀. 야, 저건 내가 세상없어도 배워야겠다, 굳게 결심을 했지.
풋,│같이 갔던 반장도 함께 가야금을 배웠나요?
황│걔? 부모가 반대해서 포기했어. 나는 했지. 막무가내로 하겠다는데 누가 날 말려. 근데 사람 일에 ‘그냥’은 없더라. 가야금을 하려니까 국립국악원이 부산으로 피난을 온 거야. 그래서 용두산 꼭대기 판잣집에 살던 국악원 선생에게 매일같이 배우러 다녔어. 내가 하도 열심히 하니까 그 선생이 일요일에는 우리 집에 오기도 했어. 그 후부터 매일같이 가야금을 연습해.
풋,│정말 하루도 안 빼고 매일매일 뜯으세요?
황│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야.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연주자는 매일 연습하는 거야. 자네처럼 시를 쓰는 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쉬었다가도 하지만 육체는 매일 안 하면 쓸 수가 없어. 근육이란 그만큼 정직한 거라고.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선수들도 일주일만 안 하면 허우적거리잖아. 연주라는 건 카뮈의 말처럼 시시포스의 신화야. 왜 하는지도 모르면서 매일 해야 하는 멍에를 스스로 짊어지는 거라고.
풋,│시(詩)도 실은 그래요. 쉬면 감이 좀 떨어지기도 하는데…
황│사실 연주는 또 그 맛에 하기도 해. 우리가 운동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뛰어놀아도 다 중력이 있으니까 가능한 얘기라고. 거꾸로 무중력 상태가 되면 훈련을 받잖아. 자유라는 건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거야. 세계적인 첼리스트나 피아니스트도 마찬가지야. 연주 하나 하려면 얼마나 귀찮고 복잡해. 실은 그걸 마스터하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거라고. 테니스 칠 때도 마찬가지야. 네트를 걷고 친다고 해봐. 그럼 공을 칠 수 있겠어? 구속의 틀을 걷어버리면 사람들은 꼼짝을 못해.
풋,│근데 정말 드는 생각인데요, 대체 가야금을 왜 하신 거예요? 안 할 이유도 없지만 딱히 또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잖아요.
황│공자의 『논어』를 보면 이런 말이 나와.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좋아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즐기는 것이다’라고. 뭐든 그냥 좋아서 해야 무시무시한 힘이 나와. 맹목으로 덤빌 수 있는 게 진짜 위대한 거라고.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몽둥이로 때려도 담을 넘어 도망가서라도 해. 가히 초인적이지.
풋,│학교에서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친구들 사이에서 괴짜로 유명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황│저거 이상한 짓 하는 놈이다, 그랬지. 내가 고3 때 전국국악콩쿠르에서 일등을 했어. 졸업할 때 나한테 특기상인가 줬는데 학교도 안 갔어. 나중에 상장 가져가라고 학교에서 전화가 왔던데 내가 그거 받아 뭐 하겠냐. 안 받고 말지.
풋,│그럼 그때 졸업식 참석 안 하시고 뭐 하셨어요?
황│아마 여학생하고 데이트하고 있었을걸? 난 식式이라는 걸 일체 싫어하는 사람이야. 내 자식들 행사라도 예외는 없어.
풋,│음악을 하시면서 대학에서는 법을 전공하셨는데, 법과 음악은 어떤 관계인가요.
황│법대에 입학했는데 교양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그러셔. 법대에 오는 건 법조문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조문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난 이걸 그대로 음악에 적용시킨 것 같아. 예악 사상(禮樂思想)이라고 들어본 적 있지? 예(禮)와 악(樂)은 일치한다. 왜냐, 예나 악이나 하나의 질서거든. 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고, 악은 인간과 우주 사이의 질서, 달리 말하자면 예는 사람과 사람을 구별해주는 거고, 악은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어떻게 화합하느냐를 물어. 그래서 예는 근본적으로 다를 이(異)를 써. 사람이 같은 게 아니야. 달라야 질서가 생기거든. 그게 지나치면 이별이라는 이(離)가 되는 거야. 악은 동(同)을 써. 그리고 화(和)를 쓰지. 그러니까 사람은 서로 다르면서 또 서로 친해야 한다, 그로부터 효도를 해야 하거나 자애를 베풀어야 하거나 하는 관계의 근본이 뭐냐면 음악이라는 거지. 반대편을 끌어안아야 뭐가 되도 되는 거야.
풋,│들을수록 가야금이란 악기가 궁금해집니다. 대체 어떤 악기인가요.
황│기타(guitar), 다시 말해 공명통과 줄이 나란히 가고 있는 악기야. 가야금은 공명통이 둥글거나 장방형으로 길어. 그래서 롱 기타라고도 해. 현악기는 활로 밀어서 소리를 내는 거랑 손가락으로 뜯어서 내는 거랑 두 종류인데 가야금은 후자야, 뜯음 악기지. 가야금은 중국, 일본, 몽골,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웬만한 동아시아 국가에는 다 있어. 근데 인도서부터는 없어. 공명통은 전부 오동나무로 만드는데 가야금은 한국오동, 소위 조선오동이어야 해. 오동은 가장 악조건 속에서 자란 게 좋다고들 해. 과학적으로 빨린 자란 오동은 나이테가 넓어. 나무가 무르다고. 나무가 단단해야 단단한 소리가 나거든.
풋,│가야금을 몇 대나 가지고 계세요? 남는 거 있으시면 저 좀 주시지.
황│한 스물대여섯 대 있으려나. 근데 뭐 하려고.
풋,│저도 가야금 배우고 싶어서요, 악기 잘하면 완전 멋있어 보이잖아요.
황│애초에 하지를 마. 나 공연할 때나 와서 그냥 들어. 아니면 시조를 배우든가. 목청만 있으면 되잖아. 시조 중에서도 평시조 해. 시인이니까 직접 가사 써서 부르면 되겠구먼.
풋,│제 시요? … 그나저나 가야금과 거문고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황│가야금은 전통적으로 열두 줄이야, 한 다스. 개량 가야금은 스물다섯 줄인데 나는 열일곱 줄까지만 썼어. 스무 줄만 넘겨도 서양 악기가 돼. 전에는 거문고 연주자가 꽤 많았거든. 조선조 때 선비들은 대부분 거문고를 했잖아. 선비들 음악이 정악인데 거문고가 거기에 맞아. 그러다 19세기 말에 산조라는 게 나오는데 그때부터 가야금이 거문고를 눌러버려. 거문고는 우리나라 악기 중에서 세계 어디에도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거야. 굉장히 한국적인 악기인데, 강해서 도저히 개량이 안 돼. 현대와 타협할 여지가 없는 악기란 말이야. 북한에서는 그저 연구용이야. 안 써.
풋,│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시고 서울대 국악과 강사로 부임하셨는데 당시 학교 분위기는 어땠나요? 그때만 해도 국악이 천대받던 시절이잖아요.
황│우리나라 대학에 최초로 국악과가 생긴 게 1959년이야. 당시 음대 학장이던 현제명 선생이 날 불러, 와달라고. 못하겠다고 하니까 법은 당신 말고 할 사람이 많지만 여기는 안 된다고 해. 그때 다들 그랬어. 조만간 폐과될 거라고. 지원자가 없으니까. 정말이야. 다니던 학생들의 90퍼센트는 다 관뒀어. 심지어 어떤 학생은 동네 사람들에게 피아노과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다녔어. 그런 어둔 맘을 갖고 죄인처럼 하는데 잘될 리가 있겠냐. 그중에서도 극히 소수가 성공을 한 거야. 어쨌거나 서울대 음대는 성공을 거뒀어. 그건 학교가 잘해서가 아니야. 사회가 변한 거야. 점점 뭔가 내 것을 해야겠다, 서양 것만 좋으면 안 되겠다, 하는 사회 전반적으로 의식의 변화가 생긴 거야. 그러다 1970년대 들어와서 한양대 음대가 생기고 이대가 생기고, 추계예대에도 생기면서 지금은 전국에 한 30여 개 대학으로 늘어난 거야.
풋,│누가 뭐라도 선생님께서 국악계에 큰 영향을 끼치신 건 맞네요.
황│내가 경기중고등학교를 나와서 서울대 법대를 나와 가야금을 한 거잖아. 국악은 후진 거고 형편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다, 라는 생각이 만연할 때니까 새롭기도 했겠지. 그건 내가 한 얘기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거니까 객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어. 요즘엔 그런 사람들 많잖아. 중앙대 총장 하는 박범훈씨도 원래 피리 불던 사람이고, 문화부 장관 했던 김명곤씨도 창을 했고.
풋,│이대에서 정년을 하셨지요. 제자들에게는 어떤 스승이셨나요?
황│반성을 좀 해보면 난 교육자라고도 볼 수 없어. 난 교육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거든. 특히나 작곡은 가르치고 배우는 게 거의 불가능해. 선생 얘기를 제자가 너무 귀담아들으면 창작이 안 돼. 제자는 있잖아, 선생 얘기 들으면서 딴 궁리를 해야 돼. 딴생각을 계속해야 창작을 하는 거야. 창작이라는 건 그만큼 배우고 가르치기 어려운 거야. 시(詩)도 그렇지 않아? 문예창작학과에서 어느 정도 테크닉은 배우겠지만 그걸로 창작이 다 되는 건 아니니까. 내가 보기에 일생의 절정기는 대학시절이야. 그걸 놓치면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끝나는 거야. 아무 돈벌이도 안 하고 공부만 한다는 거, 그게 어디 보통 혜택이야. 그래서 나는 지금 나와 공부하는 것이 일생을 두고 가장 즐거운 때였다, 학생들이 느낄 수 있게 강의해. 지금이 끝이야, 그러니까 목적이라고! 그러려면 재미를 느껴야 해. 조금 과장을 하자면 희열에 차 있어야 한다고!
풋,│제자들에게 가르침의 덕목으로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게 있다면요.
황│난 연주할 때 되도록 감정을 빼라고 말해. 음악을 연주하려면 감정을 넣어야 하는데 감정을 빼란 건 뭐냐면 코미디언을 예로 들면 쉬워. 코미디언이 코미디 할 때 자기가 먼저 웃어버리면 보는 사람은 절대로 안 웃잖아. 절대로 웃기지 않잖아. 정말로 웃기는 사람은 결코 먼저 웃지 않아. 우리는 연주할 때 그래야 해. 그림같이 고요하고 손끝에서만 불꽃을 튕겨야 한다고.
풋,│죄송한 말씀이지만, 선생님에게는 두 얼굴이 있어요. 하나는 숨겨져 있는 어린이 얼굴이고, 또 하나는 겉으로 보이는 노인의 얼굴이요. 환하게 웃으실 땐 어린이 같았다가 입을 다무시면 완전 호랑이 할아버지가 되세요.
황│나는 사실 좀 유치해. 내 스스로 생각해도 어릴 적 그대로야. 영어식으로 좋게 얘기하면 ‘차일드라이크(childlike)’라고. 기자들이 인터뷰를 할 때도 어떤 틀을 만들잖아, 그 안으로 난 절대로 안 들어가. 저절로 그래. 사람들이 와서 내게 물어. 앞으로의 계획이 뭐냐고. 난 계획이 없거든. 그냥 살아. 그리고 계획하는 것도 싫어해. 변하지를 않아. 내가 북촌 가회동에서 났거든. 이대로 부임할 때 북아현동으로 이사 왔는데 차 타면 이대까지 정확히 4분이야. 1974년부터니까 벌써 36년째 그냥 살아. 내가 쓰고 있는 전화기가 362땡땡땡인데 50년대 전화 그대로야. 내가 결혼한 게 1962년인데 그때 마누라 그대로야. 보라고, 내가 하는 악기가 뭐냐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천 년 동안 해온 걸 그대로 내가 하는 거야.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혁신적인 일을 하는 걸로 아는데 그게 아냐. 그냥 물려받은 거잖아. 나는 고대고 아방가르드고 아무런 구별이 없어. 내 안에 그 둘이 다 있다고.
풋,│고 백남준 선생님이나 첼리스트 장한나와 친구이시라는 얘기가 이해가 가요.
황│백남준은 나보다 네 살 위고, 장한나는 정확히 마흔여섯이 어려. 1968년에 『월간중앙』에 내가 백남준을 소개했는데 그게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백남준을 알린 최초의 글이야. 원래 그 사람 집안이 재벌이야. 그러니 어려서부터 피아노도 치고 새 옷을 사다 주면 가위로 막 썰고 자기 하고 싶은 짓은 다 했다고. 그러다 5·16이 터져서 집안이 몰락했어. 한마디로 거지가 된 거지. 그래서 그가 뭘 했느냐, 돈 좀 있다고 까부는 애들도 감히 한다고 나설 수 없는 비디오아트를 한 거야. 그건 국가나 기업이 지원을 못하면 할 수가 없는 예술이야. 앞으로 나는 백남준 같은 예술가는 나올 수 없다고 봐. 역사의 특수적인 과정이 그를 만든 거거든.
풋,│장한나에게 가야금도 가르쳐주셨다면서요. 만나보시니 어때요?
황│한나랑은 보자마자 친구가 되었어. 이래저래 나랑 비슷한 점이 많잖아. 음악인인데 음대 안 나오고 나는 법대, 한나는 하버드에서 철학을 했고. 중요한 일 있으면 이메일 주고받고 그래. 나이가 무슨 소용이야. 내 마누라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아. 가야금 배우러 국악원 왔다가 만났어. 나하고 같은 선생에게 사사했거든. 그러다 좋아져서 사는 거야. 간단해.
풋,│1962년에 결혼하셨는데 연상과의 결혼이 흔치 않던 시절이잖아요. 집안에서 반대는 안 하셨어요?
황│남녀가 만날 적에 좋다 하면 잠깐, 그러고 구청 가서 그 사람 호적등본 떼어보냐. 그래서 나이를 확인하냐. 반은 농담이지만 남녀가 만나는 것은 들판에서 야수가 만나듯 그래야 하는 거야. 가령 들판에서 늑대와 늑대가 만났는데 너는 나보다 위냐 아래냐 이것부터 따지면 되겠냐고. 남녀가 만날 때 왜 만나냐. 딴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 단순해. 좋아서 만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남녀가 만나서 연애할 때도 왜 좋아하는가 목적이 있다면 그건 불륜이야. 로미오와 줄리엣을 봐. 결혼하려고 사랑한 거 아니거든. 그럼 왜 사랑했느냐, 이유가 없는 거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가 창녀인 이유는 돈 벌려고 남자를 만나서인데, 어느날 한 남자를 만났더니 아무 필요 없이 그냥 만나고 싶더라, 그래서 비올레타의 순정이 싹튼 거잖아. 사랑에는 결혼이라는 목적이 앞서면 안 돼. 그만큼 불순한 거야.
풋,│그나저나 사모님이 쓴 소설은 다 읽어보세요?
황│그럼 읽어보지. 난 작업을 2층에서 하고 집사람은 1층에서 해. 우리 서로 바빠.
풋,│사모님 때문에라도 문학에 관심이 많으셨을 텐데요. 처음 작곡하신 곡이 미당의 시에 붙인 거라면서요.
황│처음 작곡을 생각했을 때 일단 문학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어. 쉽고 안정적인 것 말이야. 문학은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인 시들이 있지 않았겠어. 옛날 사람이 쓴 것 같은데 현대적인 거, 그 시어를 음악으로 만들 요량으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골랐어. 그리고 시어 하나하나에 충실한 노래를 썼어. 그게 내 처녀작이야. 그때는 거꾸로 독창성을 배제했지. 그다음이 「숲」이라는 독주곡인데 가야금곡으로는 내 첫 작품이야.
풋,│선생님께서 직접 작곡한 작품 연주해보시면 어때요?
황│원래 내가 과작이야. 많이 못해. 작품이라는 것은 자기가 낳은 아이야. 부모가 반드시 자기 자식에 대해 많이 아는 게 아니거든. 오히려 눈이 멀 수가 있어. 마찬가지로 창작자라고 해서 자기 작품을 잘 아는 게 아니야. 음악의 경우만 봐도 알잖아. 유명한 작곡가들이 자기 작품 연주를 어디 그만큼 하나.
풋,│그렇게 작곡한 곡을 녹음해서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기도 하셨다면서요.
황│그게 백낙청이야. 낙청이가 나하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동창이야. 몰랐지? 내가 창비 발기인 중 하나라구. ‘창작과비평’이라는 이름 지을 때도 함께했었고, 창간호 낼 때 인쇄소에도 같이 갔었어. 낙청이 걔는 학교 공부에 있어 가히 천재야. 걔 기억력이라는 건 상식을 뛰어넘어. 보통 우리가 태정태세문단세 어쩌고 조선시대 임금 이름을 외우지 않냐. 근데 걔는 말이야, 삼국시대부터 외워.
풋,│네? 삼국시대면 신라 백제 고구려 그 삼국요?
황│그렇다니까. 보통 미국에 처음 유학 가면 어학연수를 받잖아. 근데 낙청이는 가자마자 영문학과 독문학을 동시에 전공했어. 걔가 하버드에서 석사만 받고 창작하겠다고 한국에 들어왔다기에 집에 가보니까 영어로 된 책을 러시아 말로 번역하고 있어. 불어도 현대시까지는 다 읽어. 일본 말이야 뭐 저절로 날 때부터 아는 거니까 배울 필요도 없는 거고. 그래서 너는 외국어 잘해서 참 좋겠다, 하니까 낙청이가 그래. 내가 무슨 외국어를 잘하냐, 미국에 가서 보니까 외국어 잘한다 소리 들으려면 최소 20여 개국 이상의 나라말을 해야겠더라, 대여섯 개면 창피한 거다… 진짜 외국어 잘하는 사람이 제임스 조이스야. 나중에는 하다하다 할 말이 없어서 아프리카 어느 부족 말도 했다는데 외국어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한 3개월만 배우면 편지를 다 쓴대. 10여 개 나라 말만 해도 전 세계의 언어가 하나의 틀로 들어온다나.
풋,│선생님도 외국어에 관심이 많으시잖아요.
황│무슨 소리, 난 영어조차 포기한 사람이야. 그래서 지금도 하는 거야. 어쨌거나 외우는 건 재밌잖아. 심심해서 라틴어 독학했고, 그리스어 독학했고, 그래봤자 책 가지고 하는 거니까 잘할 리는 없고 그래도 해. 그냥 해. 수학책 푸는 걸 좋아해서 책상에 갖다 놓고도 시간 없어서 못 풀고 있어. 난 수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내 아들이 원 풀었어. 세계적인 수학자거든. 걔는 정말 수학에 미친 애야.
풋,│혹시 기적을 믿으세요?
황│기적이 안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다, 나는 거꾸로 생각해. 사과를 놓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떨어지지. 그것도 기적이야. 지구상에 몇십억 인구가 사는데 어쩌다 한 사람은 3백 년 5백 년 살 것 같은데 다 죽는 것도 기적이야. 오늘 내가 자네와 만난 것도 기적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 공자가 그랬어. ‘인간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을 아느냐고.’ 또 ‘네가 모른다고 하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게 진짜 아는 거다’라고. 그래서 나는 공자가 좋아.
풋,│선생님 가야금을 듣고 있으면요, 별 이유 없이 그냥 쓸쓸해져요. 이 슬픔이란 과연 무얼까요.
황│사람들은 기쁨으로 사는 거야. 그런데 진짜 기쁨은 슬픔을 삼키고 나오는 거라야 해.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사람치고 안 우는 사람 봤어? 아름다움도 그래. 굉장히 아름다운 거 보면 눈물이 나와. 예술에 있어서의 근원은 슬픔이라고 나는 생각해. 예술적 창작이니 뭐니 하지만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눈물이 나올 정도의 작품을 내놔야 해.
풋,│현재 연대 초빙교수이시지요. 어떤 과목을 가르치고 계시나요?
황│‘한국전통음악의 이해’라고 교양수업이야. 공자가 그랬어.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興於詩 入於禮 成於樂)’라고.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음악에서 완성된다잖아. 공자처럼 음악을 사랑한 사람은 없어. 음악을 좋아하고 또 본인도 음악을 했지. 나는 학생들에게 그러한 경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줄 생각이야.
풋,│제가 집에서 음반을 챙기다 보니까요, ‘침향무’ ‘비단길’ ‘미궁’ ‘춘설’ ‘달하 노피곰’ 이렇게 다섯 장 있더라고요. 국악인으로는 드물게 고정 팬도 많으실 텐데요.
황│사람들이 내 음악 좋아한다고들 하는데 난 굳이 안 들어. 현대인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 내서 음반을 사야 좋아하는 거지,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낸 앨범이 도합 40만 장 정도 나갔거든. 많다고? 뭐가 많아? 20년 넘는 세월인데. 아무튼 내 음악은 대중적인 폭발력이 없어. 오랜 세월을 두고 꾸준해. 내가 처음으로 낸 음반이 ‘침향무’인데 내 음반 판매량 중 아직까지 1위야. 1978년에 나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팔리는 게 똑같아. 근데 왜 ‘미궁’ 얘기는 안 물어? 나 보면 다 그 얘긴데. 그걸 세 번 들으면 죽느니 귀신 소리니 말도 많은데 가만 보면 판매가 제일 부진해. 늘 말만들 실컷이고.
풋,│다시 가야금으로 돌아와서요, 마지막 마무리 말씀 좀 해주세요.
황│나이 칠십 넘어 생각해보니까, 가야금은 내게 숙명적인 존재이구나 싶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다 가야금과 연관되어 일어났거든. 결혼도 그렇고 직장도 그렇고 분단시대라서 북한이 또 중요한데 내가 1990년 민간인으로는 판문점을 발로 넘어간 사람 1호야. 북한방문단 단장이 나였거든. 그때는 냉기가 지금보다 심할 때잖아. 그 엄청난 장벽을 가야금 소리가 뚫었잖아. 결국 내 인생에서 가야금만 남는데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야. 우리 민족이, 우리 조상들이 천 년을 두고 쭉 해낸 거라구. 결국 나는 우리 민족이 나한테 선사한 악기를 가지고 평생을 먹고 놀았으니 그 고마움을 손톱만큼이라도 갚으려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
풋,│근데요 선생님, 우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뭐? 우륵? 따지고 보면 까마득한 선배지 뭐. 『삼국사기』를 보면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라는 게 나와. 요샛말로 하면 ‘업타운 가라’ ‘다운타운 가라’, 그 정도일 텐데 악보가 있어 뭐가 있어. 나는 그냥 「가라도」라는 곡을 한 번 썼을 뿐이야, 우륵을 생각하면서. 보라고, 가장 순수하게 사라지는 게 음악이야. 이렇게 흔적도 없는 게 음악이라고.
평창동 카페에서 나와 천천히 걸었다. 선생은 광화문에서 또 한 차례 약속이 있다고 했다. “안 바쁘면 뭐 해, 늙은이가 바쁘기라도 해야지.” 그날 저녁 신문에 선생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황병기, 엽기 듀오라 불리는 ‘노라조’에 큰 감명을 받아 이번 ‘뛰다 튀다 타다’ 공연에 협연자로 적극 추천”. 그로부터 며칠 뒤 선생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오늘은 좀 춥지만 봄추위가 별수 있겠소. 늙은이 건강이 별수 없듯이… 춘한로건(春寒老健)이지.” 다소 서글픈 내용일 수 있다지만 오늘도 내일도 바쁘실 것을 아는 까닭에 걱정일랑 집어치우련다. 홈페이지 그새 또 업데이트하신 부지런함이라니. www.bkhwang.com 한번 들러 확인들 해보시라. ㉭㉥㉠ 거기서 선생 신나게 ‘놀고(play)’ 계실 것이니. 이 봄에, 그러니까 이 환장할 봄밤에 어김없이 가야금 뜯으시며. (*)
황병기 | 중학 3학년생이던 1951년 부산 피난 중에 처음으로 가야금을 만나 그 인연을 지금껏 58년간 이어왔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59년 졸업과 동시에 서울대 음대 국악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 하버드 대학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이화여대 명예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음악 대표와 연세대 특별처빙교수로 활동하며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주요 작품집으로는 『침향무』, 『미궁』, 『춘설』, 『달하 노피곰』 등이 있으며, 저서로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황병기와의 대화』(나효신 저),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 『오동 천년, 탄금 60년』이 있다. 은관문화훈장·방일영국악상·호암상·예술원상을 수상했다. 2남 2녀를 둔 그는 현재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가야금이 이어준 인연으로 만난 아내 한말숙(소설가)과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