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도서관, 한가운데
개더스커트를 입은
소녀를 만나다
글_김유진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만의 도서관을 꿈꾼다. 내 마음의 1등 작가와 명작 전집 세트, 너무 비싸서 한 권 살 때마다 손이 덜덜 떨리는 화집 시리즈, 매달 쏟아지는 각종 잡지들이 높다란 천장 끝까지 빼곡하게 쌓인 도서관을 꿈꿔본다. 책장 앞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낡은 문고판 책 한 권을 꺼내고, 풀풀 날리는 먼지와 끝없이 밀려오는 오래된 책냄새에 슬며시 미소 짓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여기, 유일무이한, 상상의 도서관을 거니는 한 소녀가 있다. 그녀는 책장과 책장 사이를 느긋하게 오가며 신중하게 책을 고르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책을 쌓는다. 책은 때때로 구겨지거나, 둥글게 말려 있고, 몇 권은 반쯤 펼쳐져 있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쏟아질 듯 아슬아슬한 책 더미 위에 한 권의 책을 더 얹는 그녀는, 만 스물다섯 살의 장흥 아틀리에 최연소 입주 작가, 서유라다.
아틀리에는 산에 둘러싸여 있었다. 홍대에서 고작 40분 정도를 달렸을 뿐인데, 공기가 달랐다. 연신 새가 지저귀었다. 온통 새하얀 복도를 지나 ‘서유라’라고 적힌 작은 이름표가 붙은 문을 열었다. 작업실은 한쪽 벽의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널찍한 공간에 크고 작은 작품들이 걸려 있거나 벽에 세워져 있었다. 작은 책상과 컴퓨터, 핑크색 이불보로 덮인 침대가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 작업실 한가운데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반묶음 머리, 안경, 말갛고 앳된 얼굴, 하얀 블라우스, 무릎을 덮는 얇은 면 개더스커트, 그리고 버켄스탁 슬리퍼를 신은 발이 보였다. 그녀는 과실 음료 한 잔을 머그컵에 담아 내주었다. 우리는 녹음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곁눈질로 그녀의 그림과 책장에 꽂힌 책의 면면을 살폈다.
김유진(이하 김)│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서유라(이하 서)│계속 작업하면서 12월에 있을 책 그리는 작가展 준비를 하고 있어요. 개인전도 준비해야 하니까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는 중이에요.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 데 몇 개월씩 걸리기도 하니까요.
김│장흥 아틀리에의 최연소 입주 작가라고 들었어요.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서│서울에 집이 있어 작업실과 오가면서 생활하고 있어요. 고향이 여수라 어릴 적부터 바다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처음엔 산에 둘러싸인 게 답답하고 단절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 덕에 작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김│이곳에서의 하루는 어떻게 시작하시나요?
서│일단 잠을 충분히 자요. 밥도 잘 먹고요. 그래야 일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눈뜨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하는 거예요. 하하. 기사를 검색하거나 미술 정보를 찾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요.
김│어떻게 그림을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서│아버지가 취미로 한국화를 하셨는데, 화실에 따라다니면서 자연스레 그리게 되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께 미대에 가고 싶다고 쪽지를 썼어요. 그림 그리는 게 재미있었거든요.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했어요. 부모님은 미술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어요. 전업 작가로 먹고살 수 있겠느냐 걱정하셨거든요. 다행히 개인전 이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운이 좋았지요.
김│학창 시절 영향을 준 화가가 있나요?
서│고등학교 시절엔 모네를 좋아했어요. 편안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을 좋아했어요. 대학에 들어가고부터는 취향이 변했지요. 모리스 루이스나 마크 로스코가 점점 좋아지더라고요. 앞으로는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지만요.
김│고향 여수를 떠나 혼자 타지에 살고 있는데, 항상 마음에 담아두는 고향의 풍경이 있을 것 같아요.
서│고등학교 시절에 교실 칠판을 닦을 때면, 옆 창문으로 펼쳐진 바다를 볼 수 있었어요. 그 풍경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간혹 작품에 고향의 풍경을 그려 넣기도 해요. 여수의 오동도를 책 속에 그려 넣은 적도 있고요. 멀지만 때때로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어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상당히 일찍 데뷔를 하셨어요. 대학 졸업과 대학원, 개인전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힘든 점들은 없었나요.
서│저는 초등학교를 일찍 입학한 데다, 대학 시절도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졸업했어요. 대학원 재학 중에 개인전을 열었고요.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부단히 달려왔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지 않나 싶어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조언해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다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세요. 반대로 친구들은 저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이에요. 제가 제 또래들보다 조금 먼저 길을 가고 있으니까요.
김│2007년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기분은 어땠나요? 부담감이나 두려움은 없었나요?
서│백지에 선 하나 그은 기분이랄까요. 너무 정신없었어요. 전시회 직전까지 그림을 그렸으니까요. 하나하나 일일이 챙겨야 해서 부담감이나 떨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바빴어요. 전시회장에 걸린 그림들을 보고 나니까 비로소 뿌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첫 전시회보다는 작년 개인전이 더 부담이 컸어요. 두 번째니까, 더욱 잘해야 했고, 큰 갤러리에 그림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어요. 그땐 무조건 그림만 그렸어요. 하루는 몸이 많이 아팠는데, 그때도 온통 그림 그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김│혼자 그림 그리는 시간이 외롭진 않아요? 주변이 굉장히 조용해서 밤엔 무서울 것 같아요.
서│외롭기도 하지만, 저만을 위한 커다란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웠어요. 밤엔 새도 울고, 개도 짖고, 귀신 봤다는 선생님들도 계시지만요. 얼마 전에 빔을 하나 장만해서, 요즘엔 밤이면 영화 보는 재미에 빠져 있어요. 최근에 본 영화 중엔 <디 아워스The Hours>가 좋았어요.
김│오랫동안 책을 그리셨어요. 불규칙적으로 쌓여 있는 책들과 책 제목, 얼핏 드러나 보이는 책 속의 그림들로 주제를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셨는데, 특별히 책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이제 다른 새로운 매체들이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서│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이긴 하지만, 저는 책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어온 것도 사실이고요.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던 경험이 있어요. 제가 스스로 책을 내고 나니 즐거운 경험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책에 대한 애정도 자연스럽게 많아졌어요. 대학원 시절에 무엇을 그려야 재미있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늘 생각했었어요. 하루는 도서관에 갔는데,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마구 뒤섞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럼 책이 가진 딱딱한 이미지를 재미있게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책이 담고 있는 방대한 주제와 내용, 이야기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서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며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때부터 책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주제에 따라 쌓아올린 책의 모양, 책 속의 이미지, 책의 구겨진 형태에 다양하게 변화를 주게 되었고요. 예를 들어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면, 하트 모양으로 구겨진 책을 그린다거나, 스타를 주제로 한다면 별 모양으로 책을 배치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김│책은 모두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서│네. 실재하는 책들도 있고, 제가 주제에 따라 상상해낸 책들도 있어요.
김│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 너머로도 책이 끝없이 쌓여 있을 것 같아요. 다양한 모습의 책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힘이 느껴지고 참 재미가 있어요. 이런 작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고 싶으세요?
서│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았을 때,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꼈으면 좋겠어요.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이고, 저의 그림이 새롭다고 느끼길 바라죠. 책이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느낌, 살아 있는 것 같고, 팔딱팔딱 뛸 것 같은 생생함을 느꼈으면 해요. 기존의 딱딱한 책의 이미지가 아닌 부드럽고 유연한 느낌을요.
김│책을 직접 쌓아보기도 하나요?
서│네. 책을 직접 쌓아올려보고, 그것을 기본 바탕으로 사이사이 다양한 책의 이미지를 상상해서 끼워 넣어 그리고 있어요. 비현실적인 것을 가능한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책 속의 그림이나 사진을 겉으로 드러내 보일 때가 있는데, 그때 실재와는 다르게 왜곡된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예를 들면 패션 잡지 속 모델의 실제 사진은 아름답지만, 그걸 동그랗게 말아버리면 얼굴이 일그러지잖아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주제가 상당히 보편적이고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중과도 친숙하고요.
서│사람들이 처음 제 그림을 접했을 때, 어렵지 않고 편하고 친숙한 그림을 많이 그리는 편이에요. 저희 엄마나 아빠가 보아도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요. 저만의 견해가 강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편하고 친숙한 이미지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김│앞으로도 책 작업은 이어지는 것인지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으세요?
서│다음 전시회까지는 좀 더 다양한 방식의 책 그림을 시도해보고 싶어요. 실제 책과 같은 입체적인 작업을 구상 중이에요. 앞으로 제 그림이 어떻게 변할지는 저조차도 알 수 없답니다.
김│마지막으로, 그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세요?
서│그림은 저에게 중독인 것 같아요. 항상 먹지만, 질리지 않는 밥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가끔은 스스로를 너무 힘들게 하는 독이 될 때도 있어요. 동시에 저를 치유해주는 약이 되기도 하고요. 힘든 일들이 있을 때마다 저를 지탱해주는 것은 역시 그림이 아닐까 합니다.
서유라 | 학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07년 ‘책을 쌓다電’, 2008년 ‘불후의 명작展’ 등 두 번의 개인전을 연 바 있고, 다수의 기획전 및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8~2010년 장흥 아틀리에 입주 작가로 선정되었다.
김유진 |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 『늑대의 문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