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에코의 서재, 2008)를 읽다. - 성적 도착은 성적 리비도가 정상적인 승화를 향하지 않고, 비정상적인 전환divert, 복귀revert, 회피avert, 전도invert로 발현되는 현상이다. 현대의 정신의학은 도착증의 여러 사례들을 정신병 목록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에 ‘정상/비정상’의 구분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서구 역사 속에서 시대에 따라 의미가 바뀌며 확장되어 온 도착 현상을 분석하고자 하는 이 개념사적인 책은, 잠정적으로 ‘비정상’이란 용어를 써야 할 입장이다.
신학의 시대였던 중세에는 도착이 흔했다. 우리는 그것을 ‘신을 위한 타락’이라고 해야 할 텐데, 수녀들이 소변이나 분변, 토사물에 문자 그대로 푹 잠기는 따위의 행위들은, 육체를 더럽히고 육체에 시련을 주는 것으로 영혼을 정화하는 신성한 행위였으며, 신의 시험을 통과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 “[신비스러운 황홀경으로 유명한 방문수녀회의 프랑스인 수녀] 마르그리트 마리 알라코크는 자신이 너무나 나약해서 추잡한 일에도 심장이 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가 의무를 다하라고 타이르자 마르그리트 마리는 환자의 토사물을 먹어 치울 수밖에 없었다. 더 나중에 마르그리트 마리는 이질에 걸린 여인의 똥을 핥아 먹으면서 상처에 입을 대고 있으면 그 구강 접촉을 통해 그리스도의 환시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몸에 채찍질하는 행위는 남성적인 수도의 방법으로 여겨졌는데, 수도승들은 채찍을 풍기문란과 싸우고 쾌락의 육체를 불멸의 경지인 신비한 육체로 바꾸도록 신이 허락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 “[채찍질은] 육신이 미천해 제 몸뚱이가 형편없는 조직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스스로 마음 깊이 느껴 다른 형태적 존재를 나누어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채찍질은 [스스로 벌을 주는 사람에게] 다른 육체의 느낌을 준다.”
기독교인들에게 육체는 빈궁의 바다요, 영혼의 혐오스러운 옷가지에 불과했다. 하므로 오늘날의 정신의학적 시선으로 보면 도착으로 여겨지는 극단적인 육체 훼손 행위들은, 진정한 성자의 조건으로 여겨져 존경을 받았다. 다시 말해 이 시대엔 도착이 비정상이 아니라, 기도를 뛰어넘어 신과 직접 만나는 황홀 체험이었다. 이런 현상은 육체적 고행이 사악한 열정(예를 들어 채찍질을 성적으로 도구화하는 행위)으로 변질되면서 외향적인 육체 절멸 보다, 자아의 영적인 통제로 대체되어 갔다.
‘신을 위한 타락’에 마침점을 찍은 사람은 사드다. 계몽 시대의 어두운 리비도를 상징하는 사드는 특이하게도 채찍질을 항문성교와 결합시키면서, 생식을 위주로 재단해 놓은 신의 질서와 그 시대의 성 윤리를 거부했다 : “다른 모든 일신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시대에는 동성애가 도착자들의 전형적인 상징이 되었다. 동성애자란 타인을 희생시키며 하는 성행위의 선택이었고, 항문성교는 성의 소위 ‘자연스러운’ 차이를 거부한다는 의미였으며 그 자연스러운 차이는 성교가 번식의 목적을 완수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결론적으로 수음, 펠라티오, 쿤닐링구스 등 규칙을 위반하는 모든 성행위는 도착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사드는 『소돔 120일』에 나오는 무려 150가지나 되는 ‘살인적인 열정’을 통해, 자연과 사회가 만들어 놓은 모든 성 규범과 그 시대의 제도를 파괴한다 : “사드는 이를테면 도착증이 일반화된 사회 모델을 제시한다. 근친상간이 금지되지도 않고 괴물 같은 흉측함과 부도덕함의 구분도 없고 광기와 이성의 경계도 없으며 남녀의 해부학적 분할도 없는 사회 말이다.”
프랑스 혁명과 사드 이후, 프랑스 형법전은 “성행위는 단지 성인 파트너들 사이에 합의된 사생활”이 되었으며, “법은 합의되지 않은 개인들 사이에 저질러진 성적 남용과 폭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만 개입”하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무튼 이제 동물성애, 페티시즘, 동성애, 수음, 펠라티오, 채찍질, 합의된 폭력 등 가장 도착적이라고 판단되는 변태 성행위들도 삶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기에 더는 법이 관여하지 않게 되었고 어떠한 처벌의 대상”도 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사드에 의해 도착은 ‘신을 위한 타락’이 아닌, 쾌락을 위한 전유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착이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다. 도착의 탄생은 그것을 관리하는 기술을 낳았고, 도착은 정신의학의 분류와 감시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뭐, 사드는 불만이 없을 것이다. 도착이 탄생되고부터 그것을 분류하고 억압하려는 노력이 뒤따랐다고 말할 수 있다면, 사드는 도착만 아니라 성과학 담론의 숨은 창시자도 된다.
(…) 제2제정 시절 부르주아들은 자유사상가적 측면에서 쾌락과 악을 탐닉하면서도 공중도덕을 내세워 그러한 행동을 비난했다. 그들은 이 비난의 조건으로 가정에서 인류 생존에 꼭 필요한 번식의 법칙을 존중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부르주아들의 이러한 이중성으로부터 파생된 청교도적 산업사회는 개인적인 섹슈얼리티에 대한 영향력을 사법관으로부터 모두 빼앗았다. 하지만 사창가에서 은밀하게 탐닉하는 성적 도착증은 단죄할 필요가 있었다. 굳이 화형대로 보내지는 않더라도 도착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도착자들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들, 그리고 ‘위험한 부류’ 내지는 ‘저주받은 종족’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이들과 치료 가능성이 있고 고도의 문명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될 만한 이들로 구분하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정신의학의 실증주의적 담론은 그들이 끝없이 꿈꾸었던 윤리를 부르주아 계급에 제안했다. 종교가 아니라 학문을 통해 빚어진 안전한 윤리를. 정신의학에서 파생된 두 학문인 성과학과 범죄학은 인간 영혼의 가장 어두운 면모를 철저하게 탐구하는 임무를 받아들였다.
19세기는 도착을 종교적이나 법적으로 단죄하지 않는 대신, 정신 질환으로 만들었다. 권력을 지닌 엘리트 집단은 정신의학, 인류학, 분류학 등 온갖 지식을 동원하여 “건강과 번식과 쾌락의 억제로 이득을 보는 소위 ‘정상적인’ 섹슈얼리티와 불임, 죽음, 질병, 무익, 향락의 편에 서는 소위 ‘도착적인’ 섹슈얼리티”를 가르려고 했다. 흥미롭게도 이 시대의 성과학이 한사코 도착으로 몰아세우려고 했던 것은, ⅰ) 남성의 자위 ⅱ) 동성애 ⅲ) 여성의 신경증(히스테리)이었다.
다행히도 프로이트는 동성애자, 여성 히스테리 환자, 자위하는 아이로 이루어진 ‘흉악한 트리오’를 도착증 개념의 화신으로 여기는 시각을 얼빠진 소리라고 일축한 당대의 유일한 학자다. 그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재 우리가 접근해가고 있는 결론은 도착증의 토대에 어떤 선천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며, 그 어떤 것이란 모든 인간이 누구나 공유하고 있지만 마치 체질처럼 강약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썼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도착자는 교육과 무의식적인 동일화와 다양한 정신적 외상이 뒤섞인 독특하고 집단적인 역사를 물려받아 그렇게 되며, 반항이든 지양이든 승화든, 또는 그와 반대로 범죄나 자아의 소멸이든 모두 내면에 품고 있는 도착증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한 마디로 도착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공헌은 규범이 병리학을 만들어 내는 실증주의 의학 담론과 달리 “도착증이라는 개념을 인간 고유의 인류학적 범주와 결부”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속성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악성종양이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권위의 필요성을 비관적으로 주장”했던 그는 도착증은 “사랑과 교육, 법, 문명의 가치를 통해 구현된 승화”를 통해 해결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책의 순서에 따라 중세와 계몽 시대,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는 도착의 역사를 따라 읽었다. 중세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도착의 변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탈신성화, 세속화’다. 그런데 ‘아우슈비츠의 고백’이라는 제하에 기술된 이 책의 제4장에 이르면, ‘탈신성화, 세속화’라는 의미망에 잡히지 않는, “도착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변형”을 목도하게 된다. 물론 이건 이 책을 쓴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시각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나치는 사드가 될 수 없다. “사드식 의미의 범죄자는 자신을 결정짓는 야성적인 천성을 따를 뿐 나치처럼 범죄의 법칙에 예속시키는 국가권력에는 절대 순순히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국가가 한 인종을 멸절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나치가 아우슈비츠에서 벌인 범죄는 그 어떤 범죄와 비교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동의하지만, 도착의 개념사를 쓰는데 왜 나치와 아우슈비츠가 한 장을 차지해야 하는지 여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나는 그저 지은이가 ‘폼’을 잡아 본 거라고 생각하고, 이런 유의 책을 읽어 줄 유럽의 독자들에게 ‘아부’한 거라고 생각한다. 또 더 깊이 생각하자면, 서구에서 전개된 도착의 개념사에 아우슈비츠를 끼워 넣는 행위는 그 자체로 아우슈비츠를 탈역사화한 것이다. 나치와 아우슈비츠가 지은이가 쓴 것처럼, 헤스나 멩겔레와 같은 몇 명의 도착적인 인물로 설명된다면, 그건 나치와 아우슈비츠의 범죄를 축소하는 것과 같다.
유대인 혐오자였던 헤스와 멩겔레는 지은이가 말한 것처럼 ‘사드식 도착의 개념’을 가지지 못한 인물들이라서 ‘비천한 도착자’가 된 게 아니다. 앞서 프로이트가 가르쳐 주었듯이, 나치는 유대인·집시·동성연애자·여호와의 증인들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인류의 악성종양이라고 생각했고, 이 악성종양을 ‘승화’시키기 위해 히틀러가 입법한 ‘사랑과 교육, 법, 문명의 가치’라는 세례를 베풀었으니, 그게 아우슈비츠다.
1974년 미국정신의학협회는 게이와 레즈비언을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다. 이 상징적인 조처는 19세기 실증 의학이 만들어 놓은 정상에 반하는 비정상으로서의 도착 개념 자체를 없애고, 사드와 프로이트적인 인간 이해, 즉 도착을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으로 간주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아예 도착을 말살해버리겠다는 이런 시도는, 사드와 오스트리아의 성의학자 크라프트에빙이 개간해 놓은 광활한 도착의 대지를 한 뼘 크기의 땅으로 좁혀 놓았다. 사드는 150개, 크라프트에빙은 그보다 많은 447가지나 되는 도착의 가짓수를 내놓았건만, 오늘날에는 단 두 가지만 도착으로 취급되고 또 법의 저촉을 받을 뿐이다. 어린아이를 성욕의 제물로 삼는 소아성애와 동물을 학대하는 수간(수간은 정신병원의 소관이지만, 동물학대죄를 적용하면 형법의 대상이 된다).
사드가 동물을 욕정의 대상으로 삼았던가? 이상하게도 나는 이 부분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랬건 말건, 최후의 승자가 사드라는 것은 분명하다. “도착자들은 해방 투쟁에서 정신병리학의 분류를 거부했고, 그리하여 사회가 도착자들에 대해 품은 시선과 도착자라고 지칭된 이들이 자신에 대해 품은 시선은 달라졌다.” 많은 도착이 정신질환 목록에서 빠지면서 도착은 없어졌지만, 오히려 도착이 지배하고 일상화된 사회를 맞게 되었다는 게, 이 책의 역설적인 결론이다.
--------------------
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