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8일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제작한 1,000여 대의 현악기 가운데는 바이올린이 가장 많지만, 그는 첼로의 전신인 비올라 다 감바를 비롯해 비올라·첼로·기타는 물론이고 하프까지 만들었다. 바이올린과 함께 그의 성가를 드높인 것은 현재 50여 대 가량이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첼로다. 토비 페이버의 『스트라디바리우스』가 거의 바이올린을 위주로 기술된 것과 달리, 볼프 본드라체크의 『첼로 마라』(생각의 나무, 2005)는 첼로, 그것도 오직 단 한 대의 첼로에 바쳐진 책이다.
토비 페이버의 『스트라디바리우스』에서 보았듯이 모든 스트라드에는 고유의 애칭이 있다. 주로 옛 소유자들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은 스트라드의 애칭은, 그 악기에 인간의 삶과 똑같은 연륜과 생생한 개성을 부여한다. 이런 관례에 더 잘 부응하려는 듯이 『첼로 마라』를 쓴 볼프 본드라체크는, 아예 곡절 많은 한 대의 첼로를 의인화시켜 버린다. 그래서 이 책은 도서관의 ‘예술/음악’ 서가가 아닌, ‘소설/독문학’ 서가에 버젓이 꽂혀 있다. 『첼로 마라』는 ‘마라Mara’를 주인공으로 한 전기 소설인 것이다.
내 이름은 첼리스트로 활약했지만, 악덕·여자·사치·방탕한 술꾼으로 더 악명 높았던 조반니 마라(1744~1808)에게서 따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잘생겼던 보헤미아 출신의 그를 가리켜 위대한 천재라고까지 말하지만, 그가 온 힘을 기울인 데는 독주자로서의 경력을 가꾸는 일보다 여자들을 유혹하는 거였다. 프로이센의 왕자 하인리히가 그를 궁정 악사에 임명하자, 그는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행운을 이용하여, 궁정 오페라 여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엘리자베스 슈맬링과 눈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매니저요, 부정적으로 말하면 팔자가 늘어진 ‘셔터맨’의 삶이 펼쳐진다. 그는 아내의 고액 출연료를 가로채,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마시고 바람을 피우거나 싸움을 일삼았다. 당대를 기록한 이런저런 회상록에는 그의 악행이 기록되어 있는바, 슈맬링은 시퍼렇게 멍이 든 눈가를 화장으로 가린 채 프리드리히 대왕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마라는 아내의 출연료도 모자라 빚을 얻곤 했는데, 곧 돈을 꾸는 일에는 누구 못지않게 될 모차르트는 “모두들 주제넘은 마라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라고 아버지에게 써보내기도 했다.
아내를 앞세워 유럽 각지를 누볐던 마라는 끝내 이탈리아 플루트 연주자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는 유일한 재산인 나를 영국인 궁정 악사 존 크로스딜에게 팔고 네덜란드로 갔는데, 알코올 중독이 된 채 허름한 술집에서 선원들을 상대로 밤새 춤곡을 연주하다 죽었다. 한편 영국의 왕 조지 4세의 음악 선생이기도 했던 크로스딜은 나를 8년 동안 왕실이나 귀족들이 사는 별장으로 끌고 다녔다. 그때는 유리 섬유가 없는 때여서, 첼로 케이스는 나무 관官처럼 묵중했다. 하지만 이 점잖고 착실했던 궁정 악사는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면서 연주회와 멀어져 갔다. 이후로 고만고만한 숱한 첼로 애호가들이 나를 일시 소유했으나, 여기 그 이름을 다 열거하진 않겠다.
1902년, 아르헨티나의 첼리스트이자 열렬한 하이든의 애호가인 카를로스 톤퀴스트는 나를 아르헨티나로 데려갔고, 24년간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동거 끝에 헤어졌다. 새로 만난 사람은 노력한 만큼 재능이 발휘되지 않았던 딱한 첼리스트 앤서니 피니였는데, 예술의 희생자라고도 할 수 있는 그는 우울증으로 죽었다. 400년 동안 진화하고 이후 400년 동안 퇴화하는, 총 800년이나 되는 나의 수명을 감안하면, 이런 사별이 불가피하다고나 할까?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트리에스트테 삼중주단의 명 첼리스트 아마데오 발도비노에게 팔려 대서양을 건넜다.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남미 순회공연을 하러 다시 아르헨티나행을 했던 게, 내겐 다시없는 비극이었다.
짙은 안개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몬테비데오 공항이 폐쇄되자, 삼중주단은 라 플라타 강을 운항하는 배편으로 몬테비데오를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다. 그런데 그 배가 한 밤에 사고를 당해 침몰한 것이다. 다행히도 삼중주단원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하류로 떠내려온 나는 케이스 속에서 산산조각 난 채로 물에 불었다. 내 비참한 운명은 1949년 지네트 느뵈와 함께 아조레스 제도에서 산화한 스트라드, 또 4년 뒤 자크 티보와 함께 알프스에서 수명을 다했던 스트라드, 그리고 허리케인에 휩쓸려 간 또 다른 스트라드 형제인 ‘붉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거였다. 그러나 장장 9개월 동안의 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부활했으니, 당신들은 내 육성을 오스트리아의 첼리스트 하인리히 시프의 연주로 들을 수 있다.
오늘날 500만에서 600만 달러를 호가하는 나의 명성에 필적하는 또 다른 스트라드 첼로는, ‘다비도프Davidov’다. 자클린 뒤 프레가 다발성 경화증으로 마흔두 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자 요요 마를 새 주인으로 맞은 다비도프는, 1838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유럽 최고의 첼로 비르투오조로 칭송받았던 카를 다비도프의 이름을 땄다. 이 형제에 대한 얘기는 단지 여섯 대의 스트라드 명기만을 집중 소개했던 토비 페이버의 『스트라디바리우스』에 자세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스트라드는 엄밀히 말해 스트라디바리 생전의 원모습이 아니다. 바이올린 연주가의 왼손이 지판(finger board) 위아래로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넥(neck)을 뒤로 기울이고 쐐기형의 지판을 잡기 쉽게 납작하게 바꾸었던 것처럼 첼로도 그와 비슷한 개량을 거쳤는데, 그 모두는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성형’이었다. 첼로는 바이올린보다 먼저 각종 동물의 내장으로 만든 거트gut 현絃을 강철 현으로 대체했고, 몸통 밑에 엔드핀(end-pin, 받침못)을 설치했다. 엔드핀은 음색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연주자가 두 무릎으로 첼로를 고정시켜야 했던 불편에서 벗어나, 활을 좀 더 쉽게 움직이고 왼손으로 자유롭게 지판 상하를 이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그것은 여성들에게 첼리스트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는데, 엔드핀이 있기 전에는 첼로를 두 다리로 고정시키는 것이 너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간주되었다.
스트라드에 관한 연구 논문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확인되지 않은 낭설 또한 거기에 버금간다. 그런데 참 특이하게도 이 책을 쓴 볼프 본드라체크는 스트라디바리에게 무슨 비법이 있었다고 결코 믿지 않는다. 저자는 말한다. 확실한 것은 “스트라디바리가 최고라는 사실” 그리고 스트라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귀해지며 주인이 바뀌면 “가격은 올라간다”는 것을! 하지만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이 델 제수란 막강한 적수를 가졌듯이, 스트라디바리 첼로에게도 몬타냐나라는 만만찮은 경쟁자가 있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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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