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일
작심삼일. 나에게 2009년, 새해는 버림받았다. 새해엔 행복해지자고 결심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것이 세계의 남루함이고, 독서의 비참이다. 세계가 부조리하고 고통스럽다면, 그것을 반영한 책 또한 그럴 것이며, 독서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신년 벽두에 읽은 이란주의 『말해요, 찬드라』(삶이 보이는 창, 2003)는 새삼 세계와 책과 독자가 얽혀 있는 유마維摩적 관계를 상기시킨다.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혼인신고조차 되지 않는 네팔 노동자, 프레스에 오른손 손목을 몽땅 잘렸으나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태국 청년, 연수생 비자라는 현대판 노예문서에 저당 잡힌 방글라데시 노동자, 한국에 와서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린 미얀마 청년… 먼저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혹여 이 책을 읽게 될 독자에게 미리 경고하고 싶다. ‘아무리 당신이 목석이더라도, 나처럼 마음 아프게 될 거야.’
나는 미처 시청하지 못했지만,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네팔 여성 찬드라의 이야기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영되기도 했다. 한국에 돈 벌러 왔던 그녀는, 어느 날 주머니의 돈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밥값을 내지 못했다. 음식점 주인은 그녀를 경찰서에 신고했고, 경찰은 한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그녀를 정신지체행려자로 여기고 행려병자 보호소에 넣었다. 재활병동에서 만난 의사가 ‘나는 네팔인’이라는 그녀의 말을 믿고, 한국의 네팔공동체에 연락해서 풀려나기까지 흘렀던 시간은 장장 6년 4개월. 한 인간이 겪었던 엄청난 수난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보상은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해, 송년 술자리에서의 건배사는 주로 ‘한 해 동안 욕봤습니다!’였지만, 『말해요, 찬드라』를 읽고 나면, 이게 우리들만의 구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부가 외국인 노동력을 본격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한 1991년부터, 우리나라의 숱한 ‘찬드라’들은 구타·구금·저임금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위탁 관리하고 있는 민간단체에서는 오히려 외국 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강화하고, 악용한다. 20여만 명이 넘는 불법체류 노동자가 생긴 이유다.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이 우리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비판도 있지만, 원래 외국 노동자란 자국의 일손이 모자라서 도입된다. 비난 되어야 하는 것은, 불법체류자 양산으로 국내의 저임금을 창출하는 사용자들이며, 그런 불합리를 가능하게 한 세계화 구조다. 1세계가 기반 산업과 경제를 수탈한 3세계의 노동자는 일자리를 찾아 1세계로 몰려들고, 중간 기착지인 한국에 몰려든 외국인 노동자들은 브로커에게 줄 만큼의 돈을 벌어, 일본이나 미국으로 밀항한다. 이 대열에 한국이라고 언제까지 열외일 수 있을까? 세계화의 비참이다.
1월 4일
이윤설의 첫 희곡집 『불가사의 숍』(연극과인간, 2007)을 재미나게 읽었다. 여기엔 2004년 신춘문예 등단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2005년도 국립극장 신작희곡페스티벌 당선작 「불가사의 숍」, 그리고 같은 해 거창국제연극제 세계초연희곡 공모 대상작 「해피 오 해피」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집은 위에 거론된 순서대로, 작가 특유의 능력이 확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분량만 따지더라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원고지 100매가량이지만, 160매 분량의 「불가사의 숍」을 거쳐 「해피 오 해피」에 이르면 200여 매의 필력을 과시하게 된다(이 매수는 어림짐작이므로, 차이가 날 수 있다).
매해 양산되는 신춘문예 당선 졸작 가운데, 그나마 눈에 띄었던 몇몇 작품 가운데 하나가 이윤설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다. 문학사의 한 장면을 되새기게 하는 역설적인 제목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권력에 의해 전방위적으로 감시받는 ‘시민 노예’들의 마비된 일상을 보여준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백수, 쓸데없는 고령자,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 그리고 플라톤이 건전한 사회의 적으로 규정한 시인…
막이 오르면, “어디선가 본 듯하고, 어디나 있을 법한 평범한 동네”의 새벽을 흔들어 깨우는 <새마을 노래>와 함께 “구민 여러분, 오늘은 쓰레기 분리수거의 날입니다”라는 방송이 들린다. 그러면 구민들은 미리 입을 봉한 채 자루 속에 넣어 입구를 봉한 집안의 ‘잉여인간’들을 들고 나와 미화원들에게 넘겨준다.
작가는 ‘쓰레기 분리수거’라는 은유를 통해, 무능력과 비생산을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제도와 권력의 전방위적 감시를 보여준다. ‘새로운 도시’는 오웰이나 푸코식의 자율 권력이 작동하는 도시며, 그런 도시에서 ‘시민들의 합창’은 억압에 대한 공손한 응대거나 절규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2~5장 사이에, 재활용 개조소를 탈출한 4명의 저항을 작중에 삽입해 놓고 있지만, 그들은 가족의 고발과 협력으로 몽땅 체포된다.
확성기 |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 셋을 셀 동안 자수하라. 하나!
백수 | 나는 쓰레기가 아니다!
마담 | 나도 쓰레기가 아니다!
곽씨 부 | 나… 나도다!
확성기 | 둘!
가족들 | 아버지! 아버님! 장마담!
백수 | 잠깐, 음악을 틀어다오! 신청곡 홀리데이!
음악, 비지스 <홀리데이>가 흘러나온다.
백수 | 동지들! 헤어질 때가 왔습니다.
마담 | 동지!
곽씨 부 | 동무!
그들의 눈빛에 결연함이 감돈다. 음악 소리 점점 커진다.
백수 | 무전유죄 유전무죄!
마담 | 아 한 많은 이년의 팔자!
곽씨 부 | 나는 억울하다!
이씨 | 나는 살고 싶다.
확성기 | 셋!
암전
마지막 장인 6장은 다시금 울려 퍼지는 <새마을 노래>와 함께, 재활용 개조소에서 순치된 백수·마담·곽씨 부가 미화원들의 보조가 되어 등장하고, 일전에 이들을 분리 쓰레기로 내어 쳤던 가족들과 구민들이 다른 가족과 구민들에 의해 분리 쓰레기가 되는 순환 구조로 끝난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강압적인 공권력이 아니라, 자율 권력과 위생 권력으로 위장되어 있는 작금의 권력 작동 방식을 얼핏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너무 빤한 소극笑劇으로 주제의 복잡성을 파헤치다 말았다. 그리고 작가가 활용한 지강헌의 <홀리데이> 일화는 시·소설은 물론이고 이미 영화와 연극으로까지 만들어진바, 안이한 착상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로 소극으로 불리는 파스farce는 ‘만두 속을 채우다’, ‘순대 속을 채우다’와 같이 ‘속을 채우는 것’과 상관된 용어다. 그것은 오늘처럼 전자 미디어가 없던 시절, 하루 저녁에 필요한 오락을 메운다는 뜻에서 ‘가벼운 연극’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극작술이기도 하고 배우의 연기술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 광대가 미끄러지면서 숙녀의 치마를 찢고, 그 탓에 숙녀에게 뺨을 맞은 맞고 반 바퀴를 돈 광대가 다시 숙녀의 남자 애인에게 주먹다짐을 당하고… 이처럼 웃음의 연쇄적인 축적이 자동기술적으로 반복되는 게 소극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불가사의 숍」 역시 소극적인 분주함과 부조리극적인 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돈으로 행복을 사고파는 자본주의의 진면을, ‘아이’를 사고파는 은유에 담아 놓았다. 그러면서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신의 아이’도 구해 올 수 있고(매니저 : 견습! 인류 최초로 우리 가게에서 신의 아이를 입수했어!), 돈만 있으면 ‘신의 아이’를 살 수 있다고 덧붙인다(귀부인 : 우린 가족이 필요해. 제일 비싼 아기로 보여줘. 날개 달린 신의 아이면 좋겠는데. 인간의 아이는 모순과 부조리를 통해서 성장하는 바보천치들이니까. 그쵸 여보?).
마지막으로 읽은 「해피! 오 해피!」는 이윤설의 회심작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극에서 종종 간과되곤 철학적 깊이에 다가간다. 막이 오르면, 소장과 견유학자(견유학자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개다)가 지키고 있는 황량한 사막 속의 분실물 센터로 부인·교수·경찰·도둑이 차례로 찾아온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열거된 차례대로 사랑·용기·믿음·소망. 하지만 이들의 진짜 목적은 제각기 잃어버렸다는 사랑·용기·믿음·소망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이 보관소에 “알렉산더 대왕이 잃어버린 물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걸 훔치러 온 것이다. 그러면 알렉산더 대왕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통 속의 철학자 디오니소스와 알렉산더 대왕의 조우를 떠올려 보라면 도움이 될까?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불가사의 숍』에 실린 세 작품은 현실에 대한 개괄적인 파악은 능하지만, 개괄 이상의 분석이나 현실을 돌파하는 사유를 보여주진 못한다. 그런 원인을 이 작품들이 분류될 ‘희극’ 장르와 순환 구조에서 찾는다면 답이 될까? 희곡쓰기에서의 순환 구조는 무난한 완결이 담보되기 때문에 자주 남발되는 작법인데다가, 순환 구조 자체가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고 있기에 어떤 결말에서는 끝내 양보하기 힘들다. 그러면 ‘희극’ 장르가 『불가사의 숍』의 모든 한계를 뒤집어써야 하는가? 이 대목은 다른 기회를 빌려 재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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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