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저자 스스로가 ‘한 계급의 전기’라고 명명했던 피터 게이의 『부르주아전傳』(독서일기 6회 연재글에서 언급)은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슈니츨러를 통해 흔히 ‘빅토리아 인’이라고 말해지는 19세기 중간계급에 대한 연구서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빅토리아 인’과 ‘빅토리아 여왕시대’를 광범위하게 정의한다. 보통 빅토리아 여왕시대는 그녀가 즉위하고 사망한 기간인 1837~1901년 사이를 문자적으로 가리키지만, 피터 게이는 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패전한 1815년부터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이르기까지를 빅토리아 여왕시대로 본다. 또 그는 ‘빅토리아 인’은 영국 밖에도 존재했으며 그 용어를 “다른 나라에도 폭넓게 적용”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데, “서양의 부르주아는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유사한 성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을 만들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대량동원과 대량살인이라는 “정치 영역”에서만 옳은 견해일 뿐, 우리가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고급문화의 영역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한다. 20세기와 결부된 예술·문학·사상은 “모두 1914년 이전에 싹터서 각 분야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어 왔다. 이처럼 20세기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선조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판단 아래, 저자는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부르주아로 소환된 슈니츨러를 표본으로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중간계급 ‘빅토리아 인’의 전기를 쓴다. 슈니츨러가 표본으로 선택된 까닭은 슈니츨러가 남긴 방대한 일기와 여러 장르의 작품들이, 저자가 선택한 역사연구방법론인 ‘정신분석에 기초한 문화사’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지에 대한 일반론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며, 특히 섹슈얼리티, 공격성, 취향, 사생활에 대한 중간계급의 태도를 중요하게 다룰 것이다.”
저자는 슈니츨러를 가리켜 “구제불능이었다”(112쪽)면서 “슈니츨러는 삶에서든 작품에서든 마찬가지로 섹스에 탐닉”으며 “그의 전공은 간통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의 “일기와 편지, 그리고 간접적이지만 역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희곡과 소설들을 보면 그는 강박관념의 노예였던 듯하다. 그는 새로운 애인을 사귈 때마다 그녀가 처녀이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엄청난 괴로움에 시달리곤 했다.”(이상 105쪽)고 쓴다. 슈니츨러가 남긴 방대한 일기는 “여성이란 신뢰할 가치가 없고 고도의 상상력이 없으며, 거의 예외 없이 창녀”라고 여겼던 슈니츨러의 여성관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에 대해 피터 게이는 “자신과 같은 남자들이 여성을 창녀로 만든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던 듯하다”(이상 79쪽)고 조소했다.
총 9장 가운데 3장까지만 읽은 뒤에, 『부르주아전傳』을 잠시 덮었다. 그리고 소설과 희곡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는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문학과지성사, 1997)를 다시 읽었다. 우리에겐 소설보다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 1999)의 원작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작품에 대해서는, 2001년 3월 15일에 쓴 원고지 10여 매의 독후감이 『장정일의 독서일기』 5권에 실려 있지만, 이번에 다시 읽은 소감은 매우 다르다.
소설의 서두는 큰소리로 동화책을 읽는 어린 딸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의 은밀한 눈짓으로부터 시작한다. 늦은 밤, 어린 아이의 동화(읽기)가 끝나면, 성인들의 동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해피엔드’로 끝맺어지는 아동용 동화와 달리, 성인용 동화는 종종 악몽으로 끝난다.
아이가 보모를 따라간 뒤, 두 사람은 저녁 식사 때 하다가 중단되었던, 어젯밤의 가면무도회에서의 “기묘한 사건”에 대해 얘기한다. 무도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프리돌린은 낯선 두 여자의 환대를 받으며 칸막이가 있는 특별석으로 인도되어 갔고, 남편을 기다리던 알베르티네는 폴란드 남자로부터 유혹을 당했었다.
두 사람은 어젯밤의 가면무도회를 회상하며 서로를 심문한다(“무심한 듯하지만 뭔가를 노리는 질문, 교묘하게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대답들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한 저녁의 심심풀이로 시작되었을 부부간의 사소한 대화는, “감추어진 욕망, 거의 예상치 못했던 욕망 (…) 위험천만한 돌개바람을 칙칙하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욕망”에 관한 영역에까지 접근한다(“어제 하룻밤의 모험에 대해 별생각 없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그들의 대화는 어느덧 진지하게 발전하였다.”) 애인들이나 부부들은 말을 적게 해야 한다. ‘소통’이랍시고, 토닥토닥 얘기를 주고받다가 사랑싸움이나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예는 참 많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서로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독점에 기반한 결혼생활이 얼마만큼 깨지기 쉬운 긴장과 불안 가운데 놓여 있는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아내는 남편의 ‘여성 편력’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남편은 아내의 내면을 수시로 검색한다(‘자기 나 사랑해?’와 같은 질문에서부터, ‘당신 첫사랑은 누구였어?’ 등등. 이런 불시 검문에 홀딱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초등학교 때의 남자 짝’ 얘기만 해도 잠을 못 이룬다). 이때 남성 가부장 사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아내의 남편에 대한 의심은 항상 ‘구체적인 물증’을 가지며, 남편의 아내에 대한 의심은 대부분 남성의 ‘자기 불안’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남녀 사이의 권력관계는 비대칭적이다. 인류가 이런 비대칭적인 부부 관계를 유사 이래 지속해왔던 결과, 여성은 불륜을 행하는 남편에 대해 웬만큼 관대해졌으나(인내심이 생겼으나), 남성은 현실에서 벌어진 아내의 불륜을 감당할 내성을 배양하지 못했다(남성들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여성들이 함부로 불륜을 저지르지 못할 줄 알기 때문에, 여성의 ‘내면’을 조회하는 반면, 여성들은 남성들의 구체적인 불륜을 늘 목격하기 때문에 남성의 ‘내면’에 대해서는 오히려 관대하다. 예를 들어 포르노를 보는 남자의 심리조차 ‘남성의 성적 판타지’정도로 가볍게 보아 넘겨줄 준비가 되어 있다).
잡담을 진지하게 발전시킨 것은 아내 얼베르티네였다. 소설 속에서는 “알베르티네가 두 사람 중에서 보다 참을성이 없거나 또는 보다 진솔했거나 아니면 보다 아량이 넓었던지 마음을 터놓고 먼저 이야기할 용기를 냈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남편보다 더 진솔했던 것이 아니라, 가면무도회에서 두 여자와 사라졌던 남편의 행각이 불확실한 해명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복수를 하거나 아니면 질투를 불러일으키고자(둘 다였을 것이다), 작년 여름 덴마크 해변에서 만났던 남자 얘기를 꺼낸다. 그녀는 낯선 덴마크 남자를 처음 보았던 순간 “내 마음이 그렇게 흔들린 건 생전 처음”이었으며 “날 데려가”달라고 마음속으로 애원했단다.
이[齒]에는 이, 눈[目] 에는 눈. 아내의 고백에 충격을 받은 남편 프리돌린은 “일어서서 방안을 몇 차례 왔다갔다”하다가 “적개심”이 섞인 목소리로 맞대응한다. 아내가 처음 덴마크 남자를 보았던 그날 아침, 자신 또한 이른 아침의 산책 중에 어린 소녀를 만났으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고. 『꿈의 노벨레』를 번역한 옮긴이는 역자해설을 통해 “『꿈의 노벨레』에는 부부가 겪는 에로스의 체험이 대칭적으로 나타난다”고 썼는데, 그건 천천만만에다.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의 ‘에로스 체험’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아내는 마음의 범죄에 머물 뿐 더 진도가 나가지 않지만, 남편은 실제로 “손을 뻗”었다. 새로 쓰는 이번 독후감에서 나는, 부부 또는 남녀가 경험하는 ‘에로스 체험’이 대칭이 아니라 비대칭적이라는 것을 되풀이 말할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봉합된다. 서로를 모욕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놀이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현명하지 않는가?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그런 일이 있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서로 얘기하도록 해요, 알았지요”라는 표면적 화해 이후에 벌어진 대화다. 프리돌린이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여자들 속에서, 난 언제나 당신만을 찾고 있었어”라고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강조하자, 알베르티네는 조롱조로 “그으런가요, 그럼 내가 먼저 남자를 찾아나설 맘이 있었더라면 그땐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반문한다.
이 대목에서 알베르티네는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조롱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태어난 반쪽’이었다고 믿는 프리돌린에게 알베르티네는 단지 그때 ‘당신이 내 앞에 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의 가장 적나라한 표현이 곧이어 나오는 “내가 숫처녀로 당신 아내가 된 것도 알고 보면 내가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런 줄 아시나봐”란 말이다. ‘너와 나는 세상의 반쪽’이라는 운명애의 확신 내지 증거물로 남성은 여성의 ‘처녀’를 든다. 남성의 ‘동정’이 운명애를 믿는 여성의 확신 내지 증거로 채택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여성의 ‘처녀’는 아내의 남편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더할 나위 없는 증거가 된다. 알베르티는 남성들이 빠져 있는 그 기고만장을 원천무효로 만든다(“아아 남정네들이 뭘 좀 알아야 말을 하지.”)
아내의 남편에 대한 사랑은 뭐니뭐니해도 그녀의 ‘처녀’로 입증된다는 믿음을 가졌던 프리돌린은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대체 그게 사랑의 더 말할 나위 없는 증거가 아니라면, 뭘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와중에 프리돌린은 자신의 환자인 궁중 고문관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선다(이상 제1장). 궁중 고문관의 집에 당도했을 때 궁중 고문관은 이미 숨을 거두었고, 아버지의 시체를 앞에서, 프리돌린도 만난 적이 있는 한 대학 강사와 결혼일이 잡혀 있는 궁중 고문관 딸 마리아네가 사랑을 고백한다(이상 제2장).
궁중 고문관의 집을 빠져나온 프리돌린은 “이상하게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꿈의 노벨레』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바로 이 심리로부터 새로 읽어야 한다. 『꿈의 노벨레』는 남녀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와 여성의 불륜으로 상처 입어 본 경험이 없는 남성의 ‘연약한 내면’이 겪는 하룻밤의 혼돈기이면서, ‘낭만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 배우자에 대한 배타적 소유로 유지되는 근대 사회의 부부관계와 결혼생활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것인지를 밝힌다.
궁중 고문관의 집에서 나온 프리돌린은 창녀와 만나게 되고(이상 제3장), “고향을 잃은 사람처럼 바깥으로 내팽개쳐진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다가 허름한 커피숍에서 의대를 중퇴한 대학 동창생 나흐티갈을 만나, 그를 통해 가면을 쓰고 만나는 비밀 연회의 존재를 알게 된다. 프리돌린은 가르쳐 주기를 마뜩해하지 않는 마흐티갈을 다그쳐 비밀 연회에 잠입할 수 있는 암호(“덴마크”)를 알게 된다. 하지만 비밀 연회에 잠입한 그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란 게 쉽게 밝혀지고, 사형私刑을 받으려는 순간, 낯선 여인이 그를 대속해서 처벌된다. 비밀 연회에서 쫓겨난 프리돌린은 새벽에 집으로 귀가하면서 “이 모든 일, 이건 그저 정신 착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이상 제4장).
새벽 네 시에 귀가한 프리돌린은 가면 대여점에서 빌렸던 의상과 가면을 아내 몰래 ‘옷장’에 숨겨 놓고 침실로 간다. 거기서 그는 막 악몽을 꾸고 있는 아내를 소리쳐 깨우고, 아내는 방금 꾼 악몽을 얘기한다. 신혼여행 중에 옷을 잃어버린 두 사람, 옷을 찾기 위해 도시를 헤매는 남편, 그리고 군인들에게 체포되는 남편. 그를 체포한 나라의 여왕은 “자신의 애인이 될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물었고, 그것을 거절한 남편은 지하 감옥에서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린다. “애인의 품에 안겨” 그 장면을 바라보던 아내는 남편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바로 그 순간 “웃음을 터뜨”린다. “나에 대한 신의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여왕의 손을 뿌리치다가 고문을 당하고 결국에는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당신의 행동이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우둔하고 바보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알베르티네가 꾼 이 꿈은, 다시 한번 프리돌린이 밤새 겪은 현실적인 불륜 행각과 비대칭을 이룬다. 남자는 현실에서 육욕의 모험을 감행하지만, 여성은 고작 꿈속에서 행할 뿐이다(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현실이나 의식의 표면층에서 불륜을 행하는 남성보다, 무의식 가운데서 불륜을 소망하고 꿈꾸는 여성의 성애 능력이 남성의 것보다 더 강하고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단, 그것이 가부장 남성 사회에 던져진 여성의 ‘사회적 구속’에서 기인한다는 순환 논법을 버리고서!)
아내의 꿈 얘기를 들은 프리돌린은 “이 여자에게 복수를 하리라고 마음속으로 굳게굳게 맹세했다. 이 여자야 말로 자신의 꿈을 통해 폭로된 그대로였다. 정조도 없고, 잔혹하고, 배신행위를 밥 먹듯 하는 그런 여자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피로에 지친 프리돌린은 잠든 아내의 이마에 키스를 하려다가, 그 충동을 참는다. “이러한 피로가 부부 침실의 미혹적인 분위기를 통하여 그리움에 가득 찬 애정으로 사탕발림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지각은 ‘산업 전사’와 ‘위안부’로 분업화된 근대 사회의 ‘스위트홈’ 신화를 허상으로 만든다. 연이어 프리돌린은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우리 사이에 한 자루 칼’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들의 부부/결혼생활은 두 사람 사이에 ‘한 자루의 칼’을 놓고 “죽이지 않고는 못 배길 원수처럼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이상 제5장).
다음 날 아침, 프리돌린은 ‘왕진가방’에 어제 빌렸던 가면 무도복을 넣어 병원으로 출근하면서 그걸 반납한다. 그리고 병원의 동료 의사가 의대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에 질투를 느끼고, 회진 중에 환자의 유혹을 받는다(“어쩌면 여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똑같은지 (…) 알베르티네도 저런 여자들과 매한가지야.”) 이른 오후의 진료를 마친 그는 평소 습관대로 집안엘 들렀다가 일터로 다시 향하며 “이 모든 균형, 자신의 삶에 관한 이 모든 안정감은 그저 허상과 거짓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식이 다시금 들었다.”
그러면서 아내의 배신행위에 대해 어떻게 “복수극”을 벌일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결론은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 “유능한 의사, 성실한 남편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삶”을 사는 한편, “난봉꾼으로, 호색한으로 (…) 그렇고 그런 년들과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놀아나는 냉소주의자”로 사는 것이다. “이중에서도 가장 멋진 일은, 알베르티네가 평화스러운 결혼과 가정생활의 안정감 속에 푹 빠져서 스스로도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는 망상을 하고 있을 때, 바로 그때 그녀 면전에 대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해 버리고, 그럼으로써 그녀가 꿈속에서 자신에게 준 쓰라린 아픔과 굴욕을 앙갚음해버리는 것이다.”
관을 나서던 프리돌린은 마리아네를 만나기도 하고, 저녁에는 어젯밤 아무런 정사 없이 헤어졌던 창녀의 집을 다시 찾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비밀 연회에서 자신을 구해 준 여자를 수소문한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오늘 새벽 한 여인이 음독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녀가 발견된 호텔과 시체가 안치된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어젯밤 그토록 갈구했던 그녀는 “낯선 여자”일 뿐이며 “창백한 시체”일 뿐이다. 삶에 대한 냉소는 그의 내부에 있는 에로스의 능력을 모두 거두어 가버린 것이다(이상 제6장).
늦은 밤에 귀가한 프리돌린은 잠든 알베르티네의 베개 위에, 오늘 새벽에 자신이 쓰고 다닌 가면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침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트렸던 모양이다. “자기 옆에 있는 남편의 베개 위의 어두운 가면을 놓아둔 그녀의 발상”은 “남편의 얼굴이 그녀에게 수수께끼가 되어버렸음을 의미하는 것”같기도 하고, 어젯밤의 일을 알고 있는 “그녀의 가벼운 경고와 더불어 그를 용서해 줄 각오가 되어 있음을 이미 표시”한 것으로도 보인다. 새 아침이 밝자 남편은 아내에게 지난 이틀 동안의 이야기를 해 준다. “알베르티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이상 제7장).
가면은 부부/결혼 생활에 쓰일 물건이 아니다. 그건 가면 무도회장에서 온당히 쓰여야 하고, 무도회가 끝나면 옷장이나 왕진가방 속에 보관되어야 한다. 가면이 하필이면 부부가 함께 누워 있는 침대의 베게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는 것은, 근대 사회의 가장 극소하고 견고한 기초인 부부/결혼생활이 가식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상징이 아닐까?
『꿈의 노벨레』는 슈니츨러가 반복하는 남성 성애의 이중성(나는 그것을 남녀 권력관계에 연동된 ‘에로스 체험’의 ‘비대칭’으로 표현했다)과 부르주아 사회의 초석인 부부/결혼생활에 대한 회의를 주제로 한다. 그리고 그 너머, “이중 실존”이라는 개념을 통해 슈티츨러는 프로이트가 천착했던 ‘무의식’의 잠재력과 현실 규정력을 포착해 보이고 있으며(137~138쪽), 에로스(성애)와 타나토스(죽음충동)가 서로 길항한다는 것도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프리돌린이 한밤 동안 더 강한 성애 체험(‘비밀 연회’)을 찾아 나선 것은, 궁중 고문관의 죽음에 영향받은 탓도 있다(41~42쪽). 거기에 더하여 그를 비밀 연회로 데려다 준 마차가 “장례용 마차”처럼 생겼다는 것, 또 그를 사형으로부터 구해준 여성의 시체를 보고 “이것이 정말 그녀의 육체란 말인가? - 피어오르는 꽃봉오리같이 매력적이던 그 육체,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고통스럽게 열망했던 그 육체란 말인가?”라고 한탄할 때, 죽음과 성애는 한 몸을 이룬다(궁중 고문관의 딸인 마리아네가 프리돌린에게 사랑을 고백한 장소는 그녀의 아저씨가 주검으로 누워 있는 곳이었으니, 그녀의 심리 또한 죽음충동과 성애 사이의 충동을 감지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꿈의 노벨레』는 슈니츨러가 집요하게 천착했던 모든 문학적 주제들을 모둠으로 보여주었다.
『꿈의 노벨레』를 읽고 나서, 내킨 김에 슈니츨러의 단편을 모은 『사랑의 묘약』(문예출판사, 2004, 제3판)을 읽었다. 여기 실린 작품 가운데 「사랑의 묘약」·「유산 상속권」·「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농익은 사랑이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중단되는 슈니츨러만의 장기로 결말을 본다. 거기에 남성 주인공의 여성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언제나 덤으로 붙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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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