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편안한 죽음』(아침나라, 2001)을 읽다. - 이 책은 저자가 일흔 여덟 살에 암으로 입원한 어머니를 6주간 지켜보며 쓴 기록이다. 여기엔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족에 대한 추억과 현대 의료 체계에 대한 짧은 소견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성찰이 포개어져 있다.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결혼 생활에 대해 “부르주아의 결혼이라는 것이 자연에 거슬리는 제도라는 사실은 어머니의 경우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76쪽)고 썼다. 저 논평이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에 대한 보부아르의 해명임은, 저 글을 읽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964년. “지난 수요일 수술이냐 안락사냐 하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126쪽)는 구절을 보면, 거기서는 그때부터 ‘안락사’가 공공연히 얘기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도덕은 아직 안락사의 편이 아니었고(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속으로만 되뇌었을 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전문성(수술)을 내세운 의사들에게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중병을 선고받은 환자와 가족들은 이미 서로 다른 세계에 서 있다. 그걸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는 우리가 자신 곁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어머니가 서 있는 세계와 다른 쪽에 서있다.”(128쪽). 자신이 중병이라는 것을 모르는 환자는 회복될 수 있다는 집념과 인내와 용기로 충만하지만, 그 안간힘은 주위 사람들 즉 가족과 의료진들의 속임수에 의지해 이루어진다.
노환이나 중병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특히 평소에 독립심이 강하고 자존심 높았던 데다가 결벽증과 같은 청결이나 성정을 가졌던 환자에게 중병이나 노환으로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 일을 끔찍하다 못해 슬프다. 환자는 자신의 나신을 함부로 노출하거나 주위의 시선 가운데 배변을 보는 일에 차츰 무감각해져야 하며, 옆 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에 하등 주저함이 없어지고, 자신의 신체 가운데 일부나 신경이 활동하지 못하는 것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본인에게도 충격이지만, 자존심 높던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마저 참혹하게 만든다. 환자의 그런 변화는 죽음과 벌이는 경주의 일종이면서, 그것 자체로 또 다른 종류의 죽음이라 할만하다. 노환이나 중병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가 받아 들여야 하는 그것은, 생물학적 죽음보다 먼저 찾아오는 인격적인 죽음과 같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자연사란 없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어떤 일도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세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비록 그가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당한 폭력이다.”(241쪽) 나는 보부아르처럼 생각하지 않는다(않으려고 한다!).
사족이다. 역자는 이 책의 번역 후기에 『편안한 죽음』이 “자전적 이야기이긴 하나 한국식 장르 개념으로 정확히 분류하기 어”(244쪽)렵다고 써놓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가능했거나 프랑스에서 통용되는 ‘프랑스식式 장르’가 뭔지는 밝혀주거나 설명해 주어야 했지 않았을까? 아래는 『편안한 죽음』을 번역한 함유선이 보부아르의 저작에 달아 놓은 장르 명칭과, 홍상희·박혜영이 『노년』을 번역하면서 보부아르의 저작에 달아 준 장르 명칭을 비교해 본 것이다(흠, 별일도 다 하게 되는군. 이래서 이런 말도 들리더군. 한국에는 전문가가 없기 때문에, 누구나 다 어느 분야에서든 ‘도사’가 되어야 한다고. 그게 우리들의 비극이라고!).
제목(괄호 안은 홍상희·박혜영) | 함유선(2001) | 홍상희·박혜영(2002) |
초대받은 여자 | 소설 | 소설 |
피뤼스와 시네아스 | 철학 평론집 | 에세이 |
사람은 모두 죽는다(모든 인간은 죽는다) | 소설 | 소설 |
군식구(무위도식자들) | 희곡 | 희곡 |
타인의 피 | 소설 | 소설 |
애매성의 모랄에 대해서(모호성의 윤리를 위하여) | 철학 에세이 | 에세이 |
미국에서 보낸 나날(미국에서의 나날) | 미국여행기 | 사회적·정치적 에세이 |
제2의 성 | “여성을 둘러싼 신화 연구를 기초로 한 여성론” | 사회적 연구 |
레 망다랭 | 소설 | 소설 |
특권 | 평론집(철학에세이) | 에세이 |
대장정 | 중국여행기 | 사회적·정치적 에세이 |
얌전한 처녀의 회상 | 자전적 이야기 | 자전적 이야기 |
성년의 힘(나이의 힘) | 자전적 이야기 | 자전적 이야기 |
사물의 힘 | 자전적 이야기 | 자전적 이야기 |
편안한 죽음(매우 달콤한 죽음) | “암으로 사망한 어머니의 투병과 임종을 다룬 이야기” | 자전적 이야기 |
아름다운 영상(아름다운 영상들) | 소설 | 소설 |
위기의 여자 | 소설 | 소설 |
노년 | 철학 에세이 | 사회학적 연구 |
결국 | 자전적 이야기 | 자전적 이야기 |
이별의 의식(작별의 의식) | ? | 자전적 이야기 |
위의 비교표를 보면 함유선이 ‘철학 평론집’이나 ‘철학 에세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보부아르의 몇몇 저작에, 홍상희·박혜영은 ‘에세이’나 ‘사회학적 연구’라는 명칭을 선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차이는 보부아르를 읽을 독자들에게 두 개의 시각을 양분해 준다.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저술가로 여길 것인가, 연역적인 방법을 중시하는 철학적 저술가에 좀 더 가깝게 볼 것인가.
3월 30일
『잘가, 청춘신기루』(연극과인간, 2008)는 최원종의 첫 번째 희곡집이다. 도합 여섯 편의 장·단막이 실려 있는 이번 희곡집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대략 난감’이랄까? 하지만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이 느낌이 비록 부정적인 어조를 머금고 있더라도, ‘무난한 평이함’이란 독후감보다는 훨씬 긍정적이다.
여섯 편의 작품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실주의적 극작을 유지하고 있는 「청춘, 간다」와 「청춘은 아름다워」로 두 작품은 내용적으로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30대의 방향 상실을 다루고 있다. 다른 하나는 「외계인의 열정」·「연쇄살인범의 열정」으로 사실주의적이기보다는 표현주의적이며 내용적으로도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사도-마조히즘적인 병리현상을 극화하고 있다. 나머지 작품인 「이모티콘 러브」와 「회전목마와 세탁기」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전자와 후자를 절충한 작품들이라고 보면 된다.
「청춘, 간다」의 주인공은 35살 동갑내기로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6년째 동거 중인 대환과 수아. 고학력자들인 이들의 직업은 변변치 않아서 대환은 고등학생들에게 글쓰기(소설 특기)과외를 하고 있고, 수아는 그 나이가 되도록 흔한 강사자리 하나 얻지 못하고 대학가를 배회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겪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집주인이 올린 전세금을 낼 돈이 없다는 것. 이제까지는 그럭저럭 부모에게 돈을 융통해서 쓴 모양인데, 더는 집에서 돈을 주려고 하지 않으려는 건지 아니면 나이가 부끄러워 이제는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 싫은 건지 하여튼 오른 전세금 때문에 두 사람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두 사람이 섹스가 잘 안 되는 것도, 대환이 수아에게 엉덩이를 맞고 싶은 것도, 수아가 변비에 시달리는 것도 모두 그놈의 돈 때문이다. 그러니 북한의 핵실험과 미국의 북한 폭격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이런 설정은 이 작품의 사실성을 훼손한다).
전세금이 두 사람의 동거를 위협하는 공통의 현안이라면 서로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스러운 고민도 있다. 대환은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여고생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수아 역시 자신에게 강사 자리를 주겠다는 모교의 교수에게 성상납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랑에 죽고 사는 ‘낭만적 관계’ 속에서는 서로의 비밀을 알고 나서는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난 뒤 화해 혹은 결별로 이어지는 게 자연스럽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되거나 눈치채고 나서도 아무런 감정적 기복 없이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이다. 까닭은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든 정서적 안정에 대한 희구에서든 두 사람이 ‘조합적 관계’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남녀관계 속의, 사랑은 죽었다.
사랑의 죽음은 「청춘, 간다」에 독특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삽화적이고 만화경적인 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현대 연극 속에서 삽화적·만화경적 구성은 흔하디흔한 것이지만, ‘낭만적 사랑’이 해체되는 것과 함께 ‘전조→갈등→파국→대단원’이라는 일직선상의 ‘연극적 달리기’도 형해화되고 말았다는 것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인영이나 민규 같은 일화적인 인물이 비중을 차지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작가가 연극을 달려가게 하기보다는 펼쳐보이려 했기 때문이며, 이런 자잘한 일화들의 펼쳐짐은 뭐니뭐니해도 절정을 향해 연극을 달려가게 만드는 동력으로서의 ‘낭만적 사랑’이 소실되고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청춘은 아름다워」는 전작인 「청춘, 간다」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33살 난 8명의 고등학교 동창생들의 현재 처지는 한마디로 지리멸렬. 근호는 이혼하고 재혼한 전 아내와 우연히 만나 정사를 가진 탓에 간통죄로 고소를 당한 중이고(고교 동창생이었던 그녀 역시 고소당했다), 고등학교 동창생이면서 교사 부부인 형석과 기영은 각기 자신의 제자와 성 관계를 맺고 협박을 당하거나 고민을 하고 있다. 또 증권회사에 다니는 성룡은 러시아로 유학을 떠난 여자 친구와 화상채팅으로 고독을 달래고 있으며, 진형은 코스튬 플레이어를 하는 21살의 미혼모와 사귀고 있다. 희준은 막 아이의 아빠가 되려고 하고 있지만 왠지 아버지가 되는 게 자신이 없고, 영진은 줄창 짝사랑만 한다.
「청춘은 아름다워」는 다섯 명의 남자가 사우나에서 벌거벗은 채 수다를 떠는 것으로 시작해서, 진형이 개업한 코스프레 숍에서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끝난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어색하고,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들이다. 극의 서두인 사우나장에서 “아빠가 된 걸 축하한다”는 친구들의 덕담에 희준은 “나 아직 어린애거든, 어린애가 무슨 애를 키워?”라고 질색하며 반문한 끝에 “무서워, 무서워 죽겠어”라며 흐느낀다. 한밤에 모교를 찾아가는 주인공들의 행각이나 각기 자신의 제자와 성 관계를 맺은 형석과 기영의 비도덕적 일탈은 물론이고 영진의 습관적 자위행위 등은 모두 성숙하기를 도외시하거나 나이 먹기에 저항하고 학생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무의식적 돌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어른, 마냥 어린아이로 살고 싶은 「청춘은 아름다워」의 주인공들은 「청춘, 간다」의 대환과 수아가 이미 선보인 ‘아이-어른’들이다. 대환은 「청춘, 간다」에서 “난, 결혼 같은 거 절대 하지 않을 거야. 결혼 같은 거 하면 불행해질 거야”라고 ‘아이-어른’의 특성을 내비친 바 있고, 수아 역시 “아,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거든 바 있다.
앞의 두 작품을 읽고나서 이어지는 「외계인의 열정」과 「연쇄살인범의 열정」을 읽게 되면, 너무나 경향이 달라서 두 명의 작가가 2인 희곡집을 낸 게 아닌가라는 착각도 불러일으킬 만 하다. 「외계인의 열정」은 어서 죽기를 바라는 선천적인 비만녀와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 ‘죽이고, 죽는’ 극단적인 방법의 상호소통을 시도한다. 「연쇄살인범의 열정」 역시 죽음을 통해서야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로부터의 소외를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피비린내나는 공포극을 보여준다.
최원종이 보여주는 두 개의 상반된 극작은 그러나 동떨어진 두 개의 세계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의 적실한 예가 두 경향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는 「이모티콘 러브」와 「회전목마와 세탁기」다. 두 작품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최원종의 주인공들이 어떤 사회적·심리적 트라우마에 기인하고 있는지를 비교적 친절히 설명하려고 했던 작품이며, 극의 형식 또한 사실주의나 표현주의 어디에도 경도되지 않고 두 경향을 적절히 융합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두 작품이 없다고 하더라도 최원종 내부에 온존하는 두 개의 상반된 경향이 별도로 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라기를 거부한 어른, 그리하여 아이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리적 퇴행의 끝은 당연히 죽음이다. 마치 바깥의 인형을 벗겨 내면 점점 작은 인형이 나오는 것처럼, 아이로 퇴행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욕구도 불사하게 된다. 「외계인의 열정」과 「연쇄살인범의 열정」이 「청춘, 간다」나 「청춘은 아름다워」와 동일한 심리적 궤적의 필연적인 결론이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무난한 평이함’보다는 ‘대략 난감’을 선사해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굳이 나누자면 작가가 보여준 두 개의 경향 가운데 ‘청춘’ 연작은 무난한 평이함이란 인상을 주었고, 대략 난감하기로는 ‘열정’ 연작이었다. 작가가 어느 길로 매진하게 될지는 미리 점칠 수 없지만, 어느 길을 가든, 좀 더 깊은 사회학적 상상력과 긴밀한 현실 연관을 고려하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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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