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올해도 어김없이 신춘문예 당선 희곡집이 나왔다. 이름하여 『2008 신춘문예 희곡 당선 작품집』(월인, 2008). 1999년부터 동 출판사에서 독점적으로 출간되어 온 이 작품집은 올해로 벌써 열권째가 되었다. 이번 작품집에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3개 중앙지의 당선작 3편과 3개의 지방지에서 당선된 4편의 희곡이 함께 묶였다. 차례대로 7편의 작품을 통독한 소감을 말하자면,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달까?
책에 실린 첫 번째 작품인 이진경의 「리모콘」은 신혼부부의 고부갈등을 중심축으로 하고, 애완견을 잃어버린 독거 노인의 일화를 부차적인 줄기로 삼는다. 결혼 전이나 후나 외동아들을 끼고 살면서 갓 들어온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방패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젊은 아내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끼어 원치 않는 위선자 노릇을 해야 하는 남편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면서 항상 되풀이되는 드라마 소재다.
미리 말한 것처럼 「리모콘」의 작가는 신혼부부의 고부갈등에다 애완견과 함께 사는 독거 노인의 일화를 삽입하여 두 개의 이야기가 평행선을 그리며 동시에 진행되도록 했다. 이런 고안은 신혼부부의 고부갈등이란 소재가 진부하다고 느낀 작가의 고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내가 발견한 진부함은 결코 소재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리모콘」이 진부한 것은 고부갈등이란 문제를 푸는 작가의 시각이 너무 안이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하는 연속방송극을 볼 수 있도록 해주고서 찾아온 고부간의 휴전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거짓 화해로 버무려지고 마는 신빙할 수 없는 멜로드라마의 관습과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 작품은 KBS2 텔레비전의 인기 방영물인 <사랑과 전쟁>의 밀도에 미치지 못한다.
두 번째로 보게 된 엄현석의 「개」는 카프카의 『심판』처럼 주인공에 닥친 부조리한 재판과 자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진창 같은 상황이 극을 이끌어 간다.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인 주인공은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눕기도 전에 흉악범으로 고소되어 끝내는 재판을 받고 죽는다. 까닭은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자신을 보고 짓는 개를 발로 차서 맨홀에 떨어트려 죽였기 때문이다. 작가가 의도한 역설과 우의는 간단명료하다. 오늘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존재라는 것.
작가는 주인공이 고소당하여 구금되는 순간부터 방송사의 여기자를 판사와 동반하게 함으로써 자칫 단선적으로 진행될 사건을 중층적으로 구성하는 효과를 얻었다. 다시 말해 극을 진행하고 사건을 해석하기도 하는 실황중계는 단순한 극을 풍성히 할 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볼거리로 만들고 여론을 일정한 방향으로 조작하는 언론 권력과 그것에 의해 왜소해진 현대인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의 수준이 과연 이런 해석을 선사 받을 만한가에 대해서는 금세 부정적이 된다. 진부하기로 따지자면 ‘아무 죄 없는 소시민이 당하는 부조리한 재판’이란 주제는 「리모콘」의 고부갈등보다 더 식상하다. 작가는 이 주제에 억지와 빈 웃음 말고는 아무런 새로운 차원을 덧보태지 못한 채 평이함에 머물렀다.
이어지는 조연미의 「꿈꾸는 심해어」는 희곡을 쓰는데 있어서 ‘연극언어’가 아닌 ‘문학언어’에 많이 기울어진 작품이었다. 희곡도 문학의 일부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희곡은 ‘문학언어’와는 또 다른 ‘연극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연극언어’는 ‘문학언어’보다는 더 현실과 밀착해 있으며 극적 행동을 유발하는 힘을 가진다. 「꿈꾸는 심해어」의 대사는 산문이 아니라 운문 투로 작성되어 있으며, 상징주의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연극성보다는 문학성이 강한 ‘읽는 희곡(Lesedrama)’인 까닭이다.
별다른 행동 없이 지루하게 연속되는 두 사람의 대화로 시종하는 박철민의 「문상객담問喪客談」은 시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현실 풍자와 고사(古事)로 범벅되어 있어 정작 어느 부분이 작가의 육성인지 모호할 수밖에 없고, 언술의 독창성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만큼 작품의 전언도 평범하달 수밖에 없다. 하긴 이런 한계는 이 작품만 아니라 모든 골계적인 현실 풍자극에 공통된 난점이다. 희곡은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건만 희곡을 처음 쓰는 ‘초짜’들이 종종 드러내는 희곡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런 류의 글을 희곡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대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극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이 없으면 갈등이 없고 나아가 절정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양구의 「별방」은 최인훈이 자주 구사했던 어눌함과 여백을 닮고자 했다. 최인훈이 그랬듯이 「별방」의 작가 또한 설명을 생략하거나 산문적인 전개보다는 시적인 비약을 선호한다. 주인공인 남자는 바위를 들추고 과거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그 속에서 부모와 재회한다. 하지만 그 남자 주인공이 부모에게 무슨 몹쓸 짓을 하고 떠났는지는 못내 설명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자 주인공이 반인륜적인 행위를 했던 동기도 희미하게 처리되었다.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한집안에 드리운 불행한 범죄와 패륜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용서하는 부모의 내리사랑이다.
작품에 여백을 심는 것도 극작의 기술이다. 온전히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에게 더 많은 것을 암시하거나 작품을 풍요롭게 하는 여백은 그 자체로 작품의 한 부분이지만, 작가 자신도 납득할만한 설명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여지거나 독자가 미루어 짐작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여백은 작가의 책임회피거나 겉멋 부림에 불과하다.
정서하의 「카오스의 거울」은 극작의 기본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아무런 필연적 이유도 없이 등장인물이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을 작가는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한다.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 이래로 극중의 정신과 의사는 내레이터 역을 겸하는 전통이 세워진 듯, 「카오스의 거울」에 나오는 닥터 민도 관객에게 환자의 상태를 직접 보고한다. 극 진행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을 해설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편법이라는 것을 감안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만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환자의 면회객이나 동료 의사나 간호사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관객을 향해 직접 말하는 비연극적인 어색함을 피할 수 있다.
신인 작가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작품을 가지고 세상에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상의 작품들을 보면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싶다. 이런 수준이라면 신춘문예 희곡부문이 지속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극작법에 대한 기본도 갖추어져 있지 않고, 자신이 쓰고 있는 주제에 대한 치열한 의식도 발견할 수 없는 이런 작품으로 등단해본들 얼마나 길게 극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10여 년째 신춘문예 희곡 당선집을 보면서, 좋은 재원들은 소설이나 시로 다 빠져나가고 희곡은 ‘문학 저능아’들만 남아있는 장르가 되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제일 마지막에 실린 김지용의 「그 섬에서의 생존방식」은 그런 절망감을 깨끗이 씻어준 수작이다. 이 작품은 2006년 당선작이었던 김은성의 「시동라사」 이후로 가장 내 눈을 잡아끈 작품이다. 작가는 ‘연극언어’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 그 위에 현실과 대결하고 세계를 포착하려는 대담한 의식을 갖추었다. 이 작품은 무의미한 듯한 말놀이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강타한다. 또한 이 작품은 희곡은 절약과 재사용이란 덕목이 중요시되는 경제적인 장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며, 야구경기처럼 긴장을 점차 구축해가는 계산된 장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희곡부문의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소설이나 시 분야의 당선자들보다 생존율이 많이 떨어진다. 당선작이 마지막 작품이 된 작가들이 희곡분야에는 많고, 작품을 계속해서 쓰는 경우도 소설가나 시인만큼 발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극작이 어렵다는 것일 터다. 시작은 변변치 못했지만, 끝은 장대하기를!
3월 19일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08)은, 모범 독서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이라는 상식을 뒤집는다. 나아가 파리 8대학교의 문학교수면서 정신분석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보아야만 그 책에 대해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한 책들에 대해서도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독서 문화를 뿌리째 흔드는 반달리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겸손해진다면,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도 용기를 내어 말해야 할 까닭을 찾을 수 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고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극히 일부”만을 읽을 수 있을 뿐이라면, “언제라도 자신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놀랍게도 지은이가 말하는 이상적인 독서는 대충 훑어보거나 흘낏 제목만 보고 마는 일이다. 그러면서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진정한 독자라면 바로 “그 관계들을 파악”하고자 해야 하며 교양인이 알아야 하는 것은 책들 간의 “소통과 연결선”이지 “특정의 어떤 책”이 아니다. 기상천외의 발언 같지만, 책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굳이 모든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각종 서평이나 소문을 통해 또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를 통해 독서 아닌 독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독서인이든 간접적으로 책에 대한 정보를 얻는 비독서인이든 자신의 내면에는 한 채씩의 이상적인 도서관이 있고 거기엔 또 한 명의 이상적인 사서가 거주한다. 그래서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나 아나이스 닌의 소설을 나름으로 분류할 수 있고,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자신이 습득하고 있는 “총체적 시각” 속에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읽지 않은 저 작가들의 작품을 국가(언어권)와 장르별로 분류하고 전체성 속에서 평가하며, 자신의 호오를 발동한다. 읽지 않고서도!
사람들이 보통 책 얘기를 할 때는 그 책에 대한 내용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책이 제공한 모티브를 얘기하는 것이다. 때문에 완독 여부가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장권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폴 발레리가 그랬고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듯이,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자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책을 멀리 하거나 제대로 읽지 않는 것이 좋다고 유혹하기까지 한다.
복거일이나 고종석의 저작을 읽으면서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책을 온전히 읽은 게 되지 못한다. 참된 독서란 내 앞에 주어진 개별적인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생성한 유·무형의 생산 현장 전체를 읽는 일이다. 강조하기가 새삼스러울 만큼 평범한 이 교훈이야말로 피에르 바야르가 말하고자 했던 역설적인 주제라고 감히 말한다면,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나의 오독일 것이다.
사족으로 윗글을 쓰기 위해 긁적였던 부스러기들: 1) 독서는 될수록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장소에서, 한 줄씩 그리고 한 장씩 글이 씌어진 차례대로 책장을 넘겨가며 읽는 행위를 말한다. 어쩌다 지하철이나 카페처럼 소란스럽고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책을 펼쳐들 때에라도, 자신의 눈과 지력을 사용해서 글을 읽는 독서의 기본은 유지된다. 손가락 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도 있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독서는 한 권의 책을 직접 읽지 않고서는 체험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도, 바로 그런 경험을 거치고 나서이다. 이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쓴 저자와는 완전히 다른 나의 독서론이다. 2) 저자는 무척 뻔뻔스럽게도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이기에 사실 나는 이런저런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책들은 대부분 내가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이다”고 머리말에 써놓았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의 주장이 농담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3) 어느 책에 대해 말할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독서인이든 간접적으로 책에 대한 정보를 얻는 비독서인이든, 우리의 내면에는 한 채씩의 이상적인 도서관이 있고 거기엔 또 한 명의 이상적인 사서가 거주한다. 그래서 본인이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나 아나이스 닌의 소설을 나름으로 분류할 수 있고,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습득된 “총체적 시각” 속에서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선험성에 힘입어 우리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읽지 않고서도 그의 작품을 프랑스 소설이자 과학소설로 분류하는 일이 가능하며, 아나이스 닌의 소설을 에로티시즘 색채가 짙은 여성 작가의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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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