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민음사, 2005)을 읽다. - 원래 이 책은 넬리 아르캉의 『창녀』(문학동네, 2005), 에르난 미고야의 『모두가 창녀다』(북스페인, 2007)와 함께 읽었다. 제목 가운데 ‘창녀’라는 단어가 들어간 소설만 골라 읽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건 악덕도 아니고 악취미도 아니다. 출판사가 증정한 넬리 아르캉의 책을 뺀 나머지 두 권을, 우연히 단골 헌책방에서 동시에 구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날 읽기 시작해서 같은 날 끝내기로 했던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마르케스의 작품만 먼저 읽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옮긴이에 따르면 마르케스는 1982년,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자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을 일곱 시간 동안 지켜보며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작업은 쉽게 진척되지 않았고, 도움을 얻고자 재독한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으로부터도 아무런 해결책을 얻지 못했다. 그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의 집』을 처음 읽게 되었고, 마르케스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쓰고 싶은 유일한 소설”이라고 흥분했다고 한다. 그게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마르케스가 『잠자는 미녀의 집』의 첫 문장을 자기 소설의 제사題詞로 쓰고 있다는 사실로 넉넉히 증명된다.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대개의 것과 달리, 이처럼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강한 작품을 읽으면서, 새로운 텍스트(『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모범이 되었거나 영향을 준 전前 텍스트( 『잠자는 미녀의 집』)를 읽지 않고 건너뛰기란 참 힘들다. 그래서 마르케스의 작품을 읽자 곧바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의 집』(不二出版社, 1968)을 찾아 읽은 것이다.
두 작품을 고작 한 번 읽고 비교한다는 건 만용이다. 특히 상호텍스트성이 형식주의 이론의 층위에서만 벌어진다면(그러니까 작품의 구조나 기술만의 문제라면) 이해나 분석이 손쉬울 테지만, 상호텍스트성이란 그보다 더 넓은 층위에서 벌어진다. 이를테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마르케스의 두 작품 사이에는 이질적인 동·서양 문화가 가로놓여져 있다. 때문에 두 작품의 상호텍스트성을 설명하기로 한다면, 동·서양 문화라고 뭉뚱그려 일반화하기조차 어려운 일본과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가치들, 적어도 두 작품에 공통적인 두 문화의 사생관死生觀·애욕관愛慾觀·여성관女性觀 등이 발본되어야 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의 첫 문장은, ‘잠자는 미녀의 집’을 관리하는 여종업원이 에구치 노인에게 “점잖지 못한 장난을 해선 안 돼요, 잠든 여자의 입에 손가락을 넣는 건 못써요”(불이출판사 번역)라는 당부로 시작한다. 이처럼 잠자는 젊은 미녀는 에구치가 밤새도록 만지고 껴안을 수 있는 이부자리에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들은 결코 노인들에게 성性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인들의 손에 닿지 않는 피안 지대에 설정된 젊은 여자들은 관능의 경계에서만 노인들과 나누어져 있을 뿐, 죽음의 이쪽 편에 있는 노인들의 동류다. 수면제를 먹고 자는 중에 급사한 미녀가 차에 실려 사라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놀랍고 허무하다: “검은 처녀를 실어내는 차 소리가 나더니 멀어만 간다. 후꾸요시 노인의 시체가 간, 수상한 온천여관으로 싣고간 것일까.”(인용문 속의 ‘검은 처녀’는 피부가 검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며, 후꾸요시는 일전에 잠을 자다가 협심증으로 죽었던 노인이다).
‘잠자는 미녀’는 동북아시아의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동녀童女 모티프의 현대적인 번안이자, 그것은 동양의 양생술養生術이 권하는 비술 가운데 하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창조한 현대판 동녀인 잠자는 미녀들을 “‘잠든 미녀’는 부처와 같은 게 아닌가”, “혹은 옛날의 얘기같이 이 처녀가 무슨 부처의 화신化身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일어났다. 창녀나 요부가 부처의 화신이었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라고까지 추켜세운다.
그런데 어쩌자고 부처와 같았던 잠든 미녀가 선행善行 가운데 죽는단 말인가?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에까지 사념이 뻗는다. 그의 죽음이 환기시키는 우리 삶이란, 쓸쓸한 데다가 불쌍하기 짝이 없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서 예순일곱 살의 에구치 노인은 아흔 살의 또 다른 노인으로 변한다. 주인공의 고향이 교토에서 콜롬비아의 바랑키야 해안으로 바뀐 것처럼, 두 작품은 세부와 주제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에구치 노인이 자신과 함께 늙어 온 아내를 둔 것과 달리 마르케스의 주인공은 한 번도 결혼을 한 적이 없다. “열두 살이 되기 조금 전”부터 육체적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 이 조숙한 주인공은 “한마디로 나는 창녀들 때문에 결혼할 시간이 없었다”는, 그런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난봉을 그친 지 이십 년 만에, 바랑키야에서 가장 유명한 ‘마담 뚜’에게 전화를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의 서두다: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선사하고 싶었다. 나는 로사 카바르카스를 떠올렸다.”
저녁 10시가 되어 노인이 열네 살의 어린 소녀 델가디나와 만나기 위해 로사 카바르카스의 매음굴로 갔을 때, 하루종일 셔츠 공장에서 단추를 달고 온 소녀는 잠에 빠져 있었다. 노인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바라보다가 따라 잠이 들었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소녀를 잊지 못한 노인은 매일 밤 그곳으로 찾아가 잠에 취한 소녀를 바라본다. 매음굴의 여주인이 “난 당신이 다시 그 아이에게 손도 대지 않은 채 밤을 보낸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하자, 아흔 살 난 노인은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오”라고 대답한다. 잠에 취한 소녀를 보면서 그는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해방감 [...] 마침내 열세 살 때부터 나를 옥죄어왔던 굴레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잠자는 소녀를 만나면서부터, 반세기가 넘도록 신문에 고리타분한 칼럼과 연주회 평을 연재했던 노인은 갑자기 연애편지 같은 칼럼을 써서 “홍수처럼 밀려드는 독자 편지”를 받기도 한다. 여태껏 그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늘 생각해 왔”으나, 그녀를 알고부터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늙고 외로운 나 자신이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의 것도 사실임을 깨”닫게 된다.
소설이 끝나도록 노인이 소녀와 성행위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시도조차 묘사되지 않는다. 대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우리는, 자신의 회고록을 쓰고자 했던 아흔 살 노인의 사랑과 노년에 대한 감동적인 정의를 듣게 된다: “[쉰 살이 되기 얼마 전부터] 나는 내 생애를 일 년이 아니라 십 년 단위로 재기 시작했다. 오십 대의 삶이 결정적이었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나이가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육십 대는 이제 더 이상 실수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장 열심히 산 시기였다. 칠십 대는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기간일 수 있다는 생각에 끔찍했다. 그러나 아흔 번째 생일에 델가디나의 행복한 침대 속에서 살아 있는 몸으로 눈을 뜨자, 인생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어지러운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석쇠에서 몸을 뒤집어 앞으로 또 90년 동안 나머지 한쪽을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흡족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3월 5일
디완 찬드 아히르의 『암베드카르』(에피스테메, 2005)는 간디나 타고르와 동시대인이면서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그들보다 위대했던 또 한 사람의 인도인을 소개한다. 불가촉천민의 해방자 또는 현대 인도불교의 중흥자로 칭송되는 바바사헤브 암베드카르가 바로 그다. 그는 독립을 쟁취한 인도의 첫 번째 법무장관으로 헌법을 초안했으며, 인도의 삼색기 중앙에 붓다의 법륜法輪을 그려 넣은 사람이다.
『세계사 교과서 바로잡기』(삼인, 2007)의 필진으로 참여했던 이옥순은 현재 우리나라 모든 중·고등학교 교과서가 수드라를 천민과 노예로 설명하지만, 그것은 고대 경전 상의 구분이며 오늘날에는 평민으로 통한다. 하지만 『암베드카르』는 천부인권이나 평등이 상식이 된 이제도 천민이나 노예 계층으로 취급되는, 카스트 밖의 계층(out-caste)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접촉하면 더럽혀진다는 뜻에서 고대부터 불가촉천민으로 구분되었던 이들은 자신이 뱉은 침이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목에 오지그릇을 달고 다녀야 했고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 몸에 빗자루를 매달아야 했다.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난 암베드카르는 부모의 교육열과 후원자들의 도움을 얻어 미국과 영국에서 경제학 박사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1927년 3월, 뭄바이의 공공 저수지를 개방시키기 위해 만여 명의 불가촉천민과 함께 행진했던 일이다. 인도 현대사에서 이 사건은 간디가 반영투쟁의 일환으로 강행했던 1930년의 ‘소금행진’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 사건 이후 암베드카르는 공개적으로 <마누법전>을 불태우고 저수지에서 힌두 사원으로 진로를 바꾸어 불가촉천민의 사원 출입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간디와 암베드카르의 출생성분은 다르지만 부당한 권력에 투쟁하는 방법으로 똑같이 ‘비폭력’ 수단을 개발했다. 그러나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을 반영투쟁에 사용했고, 암베드카르는 인도 안의 식민지였던 불가촉천민을 위해 사용했다. 두 사람은 불가촉천민 문제를 놓고 번번이 마찰을 일으켰는데, 간디는 불가촉천민의 정치적 독립을 영국의 분열책이라고 본 반면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독립적인 선거구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간디가 또 한 차례 단식을 벌였음은 물론이다.
인도는 국가(state)보다 사회(society)가 강한 나라라고 한다. 1949년에 공포된 인도 헌법에 따라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이 완전 금지되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단적인 예다. 법이나 제도보다 종교와 관습의 규정력이 더 큰 것이다. 20여 년 넘게 불교를 연구했던 암베드카르는 죽기 한 달 전에 한 군중집회에서 50여만 명의 불가촉천민과 함께 불교에 귀의한다. 이런 그를 가리켜 힌두 사회의 철벽을 두드리고자 했던 시타르타의 재래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년에 화제를 일으킨 나렌드라 자다브의 『신도 버린 사람들』(김영사, 2007)을 보면 암베드카르가 1억 6,600만이나 되는 불가촉천민들에게 주었던 영향을 실감할 수 있다.
사족으로 윗글을 쓰기 위해 긁적였던 부스러기들: 1) 힌두 경전 가운데 하나인 <마누법전>은 불가촉천민이 “베다를 들으면 귀에 납물을 부을 것이요. 베다를 암송하면 그 혀를 자를 것이며, 베다를 기억하면 몸뚱이를 둘로 가를 것이다”고 명시해 놓고 있으며 실제로 불가촉천민은 마을 밖에서 동네 사람들이 맡긴 온갖 천한 일을 하면서도 힌두 사원에 입장하는 게 금지됐다.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던 암베드카르는 힌두 사회가 만들어 놓은 종교적 불평등과 힌두 보수주의자들이 보존하려고 했던 사회 전통에 저항했다. 2) 그의 초등학교 시절은 불가촉천민이 겪어야 하는 온갖 멸시로 얼룩졌다. 공동 시설 이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지낼 때가 많았으며 일부 교사들은 부정을 타는 게 두려워서 그에게 질문을 하거나 공책에 손을 대는 것조차 꺼렸다. 산스크리스트어 교사는 아예 불가촉천민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아, 암베르카드는 혼자서 브라만의 언어를 깨우쳐야 했다. 3) 현대 인도에서는 힌두 사제의 영역만 여전히 브라만이 독점할 뿐, 나머지 계급은 힌두 경전에 언급된 카스트의 규정력을 모두 잃어버렸다. 오늘날의 카스트가 보여주는 피라미드는 권력관계를 나타내는 모형이 아니라, 인구 구성비에서 브라만은 소수고 수드라는 다수를 뜻할 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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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