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9일
한승원의 『아버지를 위하여』(문이당, 1995)와 왕원싱의 『아버지를 찾습니다』(강, 1999)를 읽다 - 이 두 권의 책은 단골 헌책방에서 사왔다. ‘위하여’거나 ‘찾’거나, ‘아버지’가 주제인 소설이 나란히 서가에 꽂혀 있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표지 날개에 적힌 두 작가의 약력이 더 재미나다. 두 사람 모두 1939년생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위하여』의 구성은 독특하다. 1장 「아버지를 위하여」는 원로 연극배우 이거석이 자신의 집안 내력을 극화한 일인극으로 꾸며진다. 2장 「다시 아버지를 위하여」는 이거석과 그의 장남인 이신명 변호사가 부엌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으로 ‘응접실극’을 연상하면 된다. 이신명이 아버지를 살해한 대학교수 박기백의 변호를 자처하고 나서자 아버지 이거석이 아들을 극구 만류하며 비난한다. 3장 「아버지의 시간과 아들의 시간」은 이거석의 손자이자 이신명의 아들인 이영호가 쓴 대본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감호소 생활을 하고 있는 박기백과 지옥에 떨어진 박기백의 아버지 박상균의 혼령이 벌이는 연극이다. 마지막으로 4장 「아버지의 추락과 비상을 위하여」는 부도를 낸 이신명(그는 변호사이면서 인조보석 공장을 차린 사업가다)이 숨어 있는 섬으로 아들 이영호가 찾아온 얘기다.
‘작가의 말’에도 나와 있듯이 작가는 이 작품을 연극으로 올릴 의도가 있었다. 그런 만큼 보기 드문 연극적 구성이 눈에 띄지만, 솔직히 그렇게 뛰어난 소설은 못된다. 읽다 보면 지루하고 뻔하기도 해서, 소설로서는 그저 그렇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극화된 구성법 말고도, 몇 가지 손꼽아 볼 특징이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작가의 말’에 설명되었듯이(“김성복이라는 한 남자는 왜 자기 아버지를 살해했을까? [...] 이 소설은 이 시대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정립과 참다운 자유와 삶의 의미를 천착해 보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1995년 3월에 있었던 모 대학 교수의 친부 살해 사건으로부터 집필 동기를 얻었다. 유학을 다녀온 고학력 교수가 수백억 원대의 재력가이자 학교법인의 창설자인 아버지를 살해했던 그 사건은 한국 사회에 굉장한 충격을 안겼다. 이 책의 판권란엔, 1995년 7월 15일이 발행일자로 나와 있다. 저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나자 작가는 곧바로 자료를 모으고 쓰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보통 우리나라 작가들은 실제 사건을 작품에 반영하는 속도가 굉장히 느려서, 나는 그것을 ‘문화적 지체’라고까지 말하곤 했지만, 『아버지를 위하여』는 거의 ‘실시간’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작가들은 이걸 좀 배워야 한다. 이걸 못하니, 매양 ‘독백’이다.
지금껏 문학 작품이나 인류학 저서에서 쉽게 찾아낸 살부殺父 의식의 근원은 성(『오이디푸스 왕』)이나 권력(『황금가지』)이다. 그러면 한승원이 찾아낸 살부 의식의 근원이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살부의 구조는 또 어떤 것일까? 부자 갈등을 겪고 있는 『아버지를 위하여』의 등장인물들을 분석해 보면 그런 유형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제1장 「아버지를 위하여」의 이거석: 이거석의 아버지 이천득은 애꾸눈에 절름발이였던 데다가 간질병 환자였다. 그런 아버지는 아들에게 출세를 강요했다. 이거석은 그저 “우리 동네에서 제일로 고기를 잘 잡는 어부가”되어 “우리 아버지를 괄시하고 박해하는 사람들한테 보아란 듯이” 사는 게 꿈이었으나, 이천득은 어부가 되려는 아들의 “길을 막고”, “학교 안으로 몰아 넣”었다. “검판사가 되어가지고 나라 팔아먹은 놈들, 옳은 일 하겠다는 사람을 뒤에서 모략하고 순사들한테 찔러서 잡아 족치게 하고 마침내 골병들어 죽어가게 한 놈들을 없애라”는 거였다. 아들이 군 내에서 제일가는 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술을 샀다. 하지만 아들은 “어찌할 수 없이 아버지의 강요에 따라 학교엘 다니기는 했지만 그 아버지가 바라는 공부는 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소설집과 시집을 읽고, 몰래 서커스나 신파극을 보러”다녔다.
2장 「다시 아버지를 위하여」의 배달식: 배달식은 이신명의 운전기사다. 그의 아버지 배창순은 동사무소 사무장으로 “동장을 거쳐서 구청장 노릇을 한번 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이다.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자식들에게 투사했던 그는 “너희들은 공부 잘해서 구청장도 되고 시장도 돼”라고 독려했지만, “배창순의 그런 소망에도 불구하고 배달식은 공부를 잘하지 못했고 대학진학을 하지 못했다.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주산 놓기 싫고 부기 공부를 하기 싫어 중도폐지하고 운전을 배웠다.” 결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집을 두 채나 가진 배달식의 아버지는 “이때까지 벌어놓은 돈, 그것을 어디다가 다 쓸까”라며 “절망만 거듭 안겨주는 아들들을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살”았다.
3장 「아버지의 시간과 아들의 시간」의 박기백: 박기백은 이 소설의 동기가 된 1995년 사건의 김성복이다. 작중의 박상균은 김성복의 아버지 김형진으로, 박상균의 일생은 실재 인물의 것과 일치한다. 1·4후퇴 때, 평양에서 단신으로 월남한 박상균은 갖은 수모를 당하며 피란 생활을 한 끝에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된다. “나는 해냈는데 왜 네놈들은 그것을 못해내느냐?”고 자식을 다그쳐온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아들딸들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더 잘되어야 하는 거야. 승어부(勝於父)!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잘하는 것, 그것이 효도”라면서 “나는 너희들한테 결코 힘겨운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처럼 돈을 벌라는 것이 아니었고, 이 아비가 못한 공부를 열심히 하여 내가 못 앉아본 고급관료의 자리에 앉으라는 것이었고, 내가 못 누린 사회적인 명예를 누리면서 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식은 부모의 열매’라는 말은 성경에도 나온다. 위에 열거된 세 부자의 갈등은, 자식의 성공을 자신의 열매로 삼으려는 부모의 희망과 거기에 반발하는 자식들의 홀로서기가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좀 더 파고들면,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풍경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의 성공을 빌어 주는 게 아니라, 자식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원풀이’를 하겠다는 의식이 더 강하다. 자식의 성공이 부모의 원풀이와 동체이기 때문에, 자식의 홀로서기는 더더욱 용납되지 않으며, 반드시 부모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박기백은 이렇게 항변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는 것도 부자지간 이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입니다. 하나의 인격체와 다른 인격체의 만남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부모가 자식들에게 바라는 효는 아주 간단하다. 대부분 그것은 공부 잘하는 것, 펜대를 굴리며 사는 것이고, 그 가운데 최상은 검판사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들은 사장이나 기술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궁상스러운, 교편 잡은 아들을 더 좋아하는데, 공부 잘해서 펜대를 굴리는 게 효도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사士 자리를 차지하는 게 효도의 다란 말이다.
『아버지를 찾습니다』는 드물게 보는 대만 작가의 작품으로, 널리 번역되고 읽히는 현대 중국 소설에 비추어, 이념적으로나 사회체제가 비슷한 대만 소설의 희귀성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까닭은 아무래도 중국과 한반도가 오랫동안 한 몸을 이루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36년간의 일본 식민 지배는 이를 갈며 미워하지만, 중국 인민군의 6·25 참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악감정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념적으로나 사회체제가 우리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은 한 번도 우리들의 역사나 전통과 맞닿은 데가 없는, 영원한 타자他者다.
1973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30여 년이 훨씬 넘은 작품이지만, 전혀 구식 티가 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된 장章과 알파벳 대문자로 표시된 장이 번갈아 진행되는 병렬구조로 되어 있다. 알파벳 대문자로 표시된 장은 일흔에 가까운 아버지가 파자마 바람으로 사라진 뒤,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 현재 시점이다. 이를테면 C장은 “아버지를 찾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4월 14일 집을 나가신 후, 저와 어머니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신문을 보시는 즉시 돌아와 주십시오. 모든 문제는 아버지 뜻대로 하겠습니다. 아들 예 올림.”으로 시작하고, 알파벳 장의 마지막인 M장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지도 벌써 석 달이 가까워 옵니다. 제발 돌아와 주십시오. 모든 문제는 아버지 뜻을 받들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들 예 올림.”으로 시작한다.
거기에 반해, 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된 장은 과거다. 157장으로 구성된 이 장들은 알파벳 장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는데, 각 장은 분량이 고르지 않고 들쑥날쑥이다. 어떤 장은 몇 쪽이나 되지만 “오후 대여섯 시쯤 되면 박쥐가 집 앞을 정신없이 날아다닌다”는 단 문장으로 된 82장이 이 작품의 무정형적이고 시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 판예의 눈에 비친 아버지 판시미엔은 거인이었다. 원래 아버지는 절름발이였으나, 어린 판예의 눈에는 그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들이 판시미엔이 절름발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페이지를 넘겨야 하는데(그건 이 소설의 거의 마지막인 126장에서야 언급된다. “최근 들어 갑자기 아버지가 본래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되었고, 게다가 난생처음으로 아버지가 한쪽 다리를 저는 불구자였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토록 오랫동안이나 그러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바로 그 기간은 판예가 유소년기를 거쳐 청년기에 이르는 세월에 해당하며(위에 인용된 것처럼 판예가 아버지의 불구를 지각하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되어서였다), 그가 자라나면서 거인과 같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점차 왜소하게 되고, 권위는 허물어지며, 아버지의 모든 행동거지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한승원의 『아버지를 위하여』는 아예 연극적인 기법을 취하면서 아예 일인극이나 응접실극을 흉내 냈다면, 왕원싱의 『아버지를 찾습니다』도 희극적인 장면이 여럿 있다. 한승원이나 왕원싱은 집안에서 권위를 확보하려는 아버지의 안간힘과 부자간의 갈등이 상당히 ‘연극적’이라는 데에 공감하고 있다. “이 집 안은 그야말로 무대가 되어 있었다. 그 무대 위에서 두 배우는 격렬하게 갈등 대립을 하고 있었고, 관객들은 조마조마해하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관객 중의 한 사람은 베란다에서 화초들을 손보고 있는 운전기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방에서 살그머니 나온 이거석의 손자 이영호였다.”, “이 집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어찌할 수 없는 연극들일 뿐이다.”(한승원). “아버지의 결점 중에서 아마도 가장 쉽게 느끼고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유치한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코미디, 바로 코미디였다.”(왕원싱)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들은 항상 연극을 한다. 그러므로 아들이 어른이 되는 때는, 아버지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때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판예의 아버지 판시미엔은 처와 자식을 손쉽게 조종하기 여러 가지 꾀병(연극)을 이용했는데, 어느 날 판예는 아버지의 연극을 간파하고, 그것을 무참히 탄로 낸다.
이제 그와 아버지의 언쟁이 그들 싸움의 주요한 항목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갑자기 예전처럼 가짜로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이미 가짜라는 것이 밝혀졌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갑자기 비틀비틀 다리를 가누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 아… 머리가 어지러워.”
그러자 이번엔 판예도 똑같이 흉내 내듯이 자기 손으로 가슴을 꼭 누르면서 신음 소리를 내었다.
“아… 가슴이 아파요!”
아버진 돌연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의 연극을 ‘벌거숭이 임금님’의 그것으로 만들어 버린 판예의 저 행동은 말 그대로 아버지를 죽인 살부에 값하지만(그래서 아버지는 가출을 선택한 것이지만), 그래도 판예처럼 아버지의 연극을 간파하고, 아버지의 연기에 맞추어 아들이 아버지와 연극을 계속하는 것이, 한승원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위하여』를 쓰도록 만들었던 저 비극적인 살부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사족이다. 『아버지를 찾습니다』 152장은 소설과 분리해서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에세이다. 여기에 드러난 가족과 효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유교적 덕목과 자본주의 체제가 겉도는 상황을 오래 겪어온 한국인들에게도 동감할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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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