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최종례의 『미륵의 나라』(우리출판사, 2006)를 읽다. - 미륵이란 범어 마이트레야Maitreya의 음차로, 마이트레야를 의역하면 자씨慈氏, 즉 ‘자비하신 깨달은 이(慈氏覺士)’다.
불교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3대겁(大劫)을 각기 장엄겁莊嚴劫·현겁賢劫·성수겁星宿劫이라고 하는데, 각 대겁마다 천 명의 부처가 출현한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겁에는 ⅰ)구루손불 ⅱ)구나함모니불 ⅲ)가섭불 ⅳ)석가모니불, 네 분의 부처가 출현했다(불교에서 한 겁은 쇠로된 7킬로미터 입방체를 백 년에 한 번씩 하강하는 선녀가 비단 옷자락으로 스쳐서 다 닳아질 때까지의 기간.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이 세계는 생성·존속·괴멸·공무를 되풀이 하는데, 이 네 시기는 각각 20겁이라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말한 대겁은 생성·존속·괴멸·공무로 이루어진 한 순환을 가리키므로 80겁이다).
석가모니불의 제자인 미륵불은 현겁에 출현할 다섯 번째 부처님으로, 입적 후 56억 7천만년 뒤에 지상에 도래한다. 미륵불은 인간의 수명이 8만 4천살이고, 여자들이 500세가 되어서야 시집을 가는 때에 출현한다. 다시 말해 미륵이 하생할 세계는 혼탁하고 악에 찬 때가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정화되고 개조된 지상 낙원이다.
석가모니불과 미륵불의 차이는 본원(本願: 부처나 보살이 성불하기 이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운 서원과 방법론) 차이다. 미륵불의 본원은 ‘나는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더러움과 오욕으로부터 모두 벗어난 후에야, 깨달음을 취하겠다’이며, 석가모니불의 본원은 ‘세상이 악하고 더러울 때, 나는 깨달음을 이룩하겠다’이다. 그래서 미륵불은 미래세에 올 부처가 되는 것이며, 석가모니불은 현재의 중생들에게 법설을 하는 것이다(144~145쪽). 부연하면, 석가모니는 중생 제도를, 미륵불은 정토 건설을 담당한다고 할까?
미륵불 신앙에는 미륵불과 하늘의 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고자 하는 상생신앙과, 미륵불이 사바세계로 내려와 정토 건설을 바라는 하생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잰 네티어 교수의 구분에 따라 그것을 좀 더 세분화하면, 네 가지 형태가 나온다. ⅰ) ‘여기에서/나중에’ 유형: 이 지구상에서 미륵을 만나되 내가 죽은 다음에 만나기를 기대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구상이란 지금의 사바세계가 아니라 56억 7천만 년 뒤 이미 실현된 지상 낙원을 의미. 이 유형은 미륵과 도솔천이 땅으로 내려온다는 전형적인 하생신앙이다. ⅱ) ‘저기에서/나중에’ 유형: 사후에 환상적인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희망하는 유형으로, 정통적인 상생신앙이다. 장구한 세월을 고통과 번뇌의 사바세계에서 기다리느니, 차라리 도솔천에 왕생하여 그곳에서 불도를 닦으며 기다린다는 신앙. ⅲ) ‘저기에서/지금’ 유형: 명상이나 관법을 통하여 지금 즉시 도솔천에 계신 미륵보살을 친견하기를 원하는 유형. 삼매를 통해 도솔천 상생을 체험하는 것이므로 ‘삼매 상생신앙’이라 할 수 있다. ⅳ) ‘여기에서/지금’ 유형: 생시에 이 지구상에서 미륵을 만나기를 원하는 유형. 여기에서 말하는 지구는 오탁학세의 현 사바계로, 이 유형은 미륵이 구세주로서 지금 당장 출현하기를 고대한다. 이 유형은 이를 뒷받침하는 경전이 전혀 없으므로 정통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륵이 출세할 56억 7천만 년이란 세월은 임의로 단축될 수 없기 때문. 그러나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을 때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했던 것처럼, 어지러운 현세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혁명적인 목적을 갖는다(도솔천은 현재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하늘로, 욕계의 여섯 하늘 가운데 아래에서 네 번째 하늘이다. 욕계란 모든 중생이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망에 사로 잡혀 있는 세계를 말하는데, 단계가 위로 올라갈수록 욕망의 정도가 엷어진다. 도솔천이 ‘만족함을 안다’는 뜻이듯, 이곳은 욕망을 완전히 벗어난 것도 그렇다고 해서 침윤된 것도 아닌 곳이다. 도솔천이 인간과 같은 욕계에 속하며, 미륵이 이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은 미륵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 왼쪽부터 경기도 안성 기솔리 석불입상, 충남 부여 정림사지 석불좌상, 속리산 법주사 마애여래의상.
흔히 불상佛像하면 석가모니상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우리나라의 절간이나 산과 들에 산재하는 ‘돌부처’는 거의가 미륵상이다. 자세·수인(手印: 힌두교에서 불교로 넘어 온 것으로, 손의 위치와 손가락의 모양으로 상징과 의미를 나타내는 ‘손짓 언어’. 모든 불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짓는 수인을 지을 수 있지만, ‘번의 수레를 굴린다’는 뜻의 전륜법인은 석가모니불과 미륵불만이 지을 수 있다)·지물(持物: 손에 들고 있는 연꽃이나 탑 따위) 등의 도상圖像에 따라 석가모니상 미륵상, 또는 여느 다른 불보살이 구분 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불상을 구분하는 어려움은 “도상상으로는 약사여래지만 갓을 쓰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미륵의 화신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경기도 안성 기솔리 석불입상), “어떤 이는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으로 보기도 하나, 그러려면 두 손의 손등이 일직선을 이루어야 할 것이므로 미륵으로 봄이 타당할 것입니다.”(충남 부여 정림사지 석불좌상), “이 마애불은 얼굴이 인자하고 허리가 유난히 잘록하며 연화좌의 연꽃이 큼직큼직해서 좋습니다. 이 의상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좌법으로 중국의 예를 따라 통상 미륵으로 간주합니다.”(속리산 법주사 마애여래의상), “보관에 화불이 있고 연꽃을 들었다고 해서 관세음보살로 보고 있는 듯한데 연꽃은 미륵도 가질 수 있는 지물이며 정자관이나 상호가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 미륵보살로 보고자 합니다.”(경북 고령 개포리 관음보살좌상), “이 석불은 도상만 보아서는 석가모니불인지 미륵불인지 전혀 존명을 판단하기 어려우나 지명이 ‘미륵골’이고, 조상 시기가 이르기 때문에 미륵으로 보고자 합니다.”(경주 남산 미륵골 석불좌상),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내장했는데 새끼손가락을 구부렸습니다. 이 우수 내장의 수인 때문에 이 석불을 미륵으로 보고자 합니다.”(경주 장항리 사지석조여래입상) 등에 잘 나타난다.
● 왼쪽부터 경북 고령 개포리 관음보살좌상, 경주 남산 미륵골 석불좌상, 경주 장항리 사지석조여래입상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보이지만 막상 실물을 앞에 두고서 도상 구분하는 건 어렵다. 까닭은 “불상의 도상이라는 것이 반드시 경전만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 그 지방 전통과 풍속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불상 역시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동안 변형과 토착화를 거쳤으며, 각 지역과 개개의 불상 또한 여러 가지 조건상황에 맞추어 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미륵도상을 모색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조상명문彫像銘文” 즉 불상의 연유와 존명을 밝힌 글인 것이다(중국의 불상에는 조상의 연유와 존명을 밝힌 조상명문이 지천으로 많은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금석金石을 불문하고 그리 많지 않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온 우리나라만의 미륵상 특징은 첫째, 여러 가지 모양의 갓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햇빛을 가리고 귀인의 위엄을 나타내던 일산日傘이 자연스럽게 갓으로 변한 것이다(여느 불상이나 쓸 수 있는 갓을 왜 유독 미륵만 쓰게 되었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둘째, 우리나라에서는 불상을 모신 법당이나 불상 좌우에는 석탑을 한 기 이상 배치한다. 원래 정형화된 인도의 미륵불상은 보관(모자)에 탑을 표시하며, 밀교의 미륵상은 손에 탑을 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탑을 분리시켜 별도의 조형물로 만들었다. 셋째, 우리나라의 미륵불상 가운데는 하반신 전체나 일부가 땅에 묻힌 게 상당수 발견된다. 이런 불상을 하체매몰불下體埋沒佛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보다는 지중용출불地中湧出佛이라고 해야 맞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이유로 하체가 매몰되었다기보다 일부러 하체를 땅에 묻어 마치 부처가 땅에서 솟아나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천상에서 하강하는 미륵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친숙한 땅으로부터 오시는 부처님이 미륵이며, 보다 빨리 이 땅에 미륵정토가 구현되기를 소망했던 민초들의 염원이 그런 모습으로 형상화 된 것이다(지중용츨불은 미륵의 경우에만 발견된다). 넷째,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미륵불상은 못생기고, 균형이 안 맞고, 속되고 일그러진 것이 많다. 그런 모습은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못난, 뭔가 부족하고 삐뚤어져 있는, 완벽하지 못한 우리 내면을 투영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졸속拙俗의 미’를 자연스럽게 여긴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의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총 370기의 미륵불상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미륵불상이 많았다는 것은 민초들의 삶이 그만큼 고단했다는 것과, 살기 좋은 지상 정토에 대한 열망이 드높았다는 뜻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륵은 인간정토의 건설을 염원하고 창도하는 미래불일 따름이지, “말세에 임의로 강림하여 악정과 불의를 타파, 제거하고 새판을 자는 소위 ‘구세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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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