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
조명구의 정치에세이 『양반 좋아하네』(청조사, 1998)을 읽다. - 이 책은 며칠 전에 읽은 김태균의 『빨리 빨리와 전통사상』과 함께 헌책방에서 사 온 것이다. 김태균의 책은 사기 전에 한번 훑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독할 가치를 느꼈지만, 이 책은 그런 확신이 전혀 오질 않았다. 다만 충청도 출신의 언론인이 쓴 흔하지 않은 충청도론(論)이라니 심심풀이는 될 것 같았다. 서문의 일절이다: “(…) 상당수 충청인들은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때마침 저자가 이곳에 내려와 ‘귀양생활’ 6개월을 보내면서 평소 삶의 마디마디에 묻어 놓은 단상과 45년간 충청도인에 대한 보고 느낀 대로를 한 번쯤 짚고 넘어가자는 충동을 여러 차례 느꼈다. 그렇다고 동향인으로서 충청도인을 매도하거나 비판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다만 충청도, 충청도인의 자화상을 반추하면서 ‘약진하는 중청도’ ‘앞서가는 충청도인’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기대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중간결산 보고서’를 외람되게 내놓았다.”
다음은 본문의 일절이다: “영호남 출신들이 용호상박龍虎相搏을 겨루며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충청도인들이 양반 소리만 들으면서 안주한다면 충청도는 그들의 예속물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충청도인들은 하루빨리 무기력·무소신·무감각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뭉쳐야 한다. 충청도 출신 가운데 각계의 선두 주자들은 애향심을 갖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주고 밀어줘야 한다 (…) 충청도인이 새로운 자세로 ‘발상의 전환’과 ‘인식의 전환’을 할 때 충청도는 경상도·전라도인과 나란히 이 시대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3두 마차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저자가 분석한 충청도인의 약점은 ‘결속력’이 없다는 것이고, 거기에 비해 경상도와 전라도가 각 분야에서는 물론이고 중앙 정계에서 잘 나가는 비결은 당연히 강한 ‘결속력’이다. 두 구절을 인용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지연地緣·학연學緣·혈연血緣이다. 어느 조직이든 그 구성원을 보면 이 세 가지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싫든 좋든 같은 고향 사람이거나, 같은 학교를 나온 동문, 같은 문중門中이라면 남보다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 우리나라에서 지연·학연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들이 영호남 출신들이다. 그만큼 똘똘 뭉쳐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다는 얘기이다. 이에 반해 충청도 사람들은 어떤가. 충청도인들도 경향 각지에서 동창회나 향우회를 결속해 서로 친목을 다지고 있지만 영호남 사람들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결속력이 약하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 살 수는 없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줘야 동지애가 싹트고 거기서 도세가 탄탄해지고 나아가 국력도 강화된다. 충청도의 모래알 같은 지역 특성, 결속력이 ‘F'에 가깝다는 타지역 사람들의 지적을 부끄러워하고 되새겨야 한다.”
이 책이 출간되었던 당시, 저자의 직업은 모 신문사의 정치부 차장이다. 아뿔싸, 그런데 어쩌면! 한마디로 기자들은 글을 잘 써야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뭣도 아닌, ‘쓰는 사람’이지 않는가? 그런데 직업 기자들이 쓴 이런 에세이를 보면, 망연할밖에! (그래도 이 책의 제1부 마지막 장은 재미있다).
2008년 1월 1일
솔직히 미술 계통은 거의 저인망으로 훑듯이 사 모으거나 읽어댄 음악 분야의 책만큼은 잘 모르지만, 반 고흐는 매해 새로운 연구물이나 평전이 출간되고 있는 화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 분야라면 단연 모차르트다. 암살설과 자살로 점철된 그들의 불행했던 삶 때문인지 모차르트는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바흐를 간단히 따돌리고 있고, 고흐는 ‘현대 미술의 아빠’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피카소와 상박을 펼치고 있다.
최근에 또 한 종의 고흐 평전이 출간됐다. 클리프 에드워즈의 『하느님의 구두』(솔, 2007). 하지만 너무 가짓수가 많아서 이 매혹적인 신간은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힘들다. 그것은 모차르트 쪽도 거의 같다. 공교롭게도 『하느님의 구두』를 출간했던 동일한 출판사에서 레아 징어의 소설 『모차르트의 연인 콘스탄체』를 작년에 출간했으나, 이미 『람세스』로 한국 독자에게 익히 알려진 크리스티앙 자크의 네 권짜리 소설 『모차르트』(문학동네, 2007)가 독자를 훑어간 뒤였다.
경쟁이 치열한 모차르트나 고흐와 같은 ‘레드 오션’ 속에서 독자의 눈도장을 찍으려면 저자의 지명도가 높아야 한다. 예를 들어 그 많은 모차르트 관련서 가운데서도 칼 바르트 정도의 거장이 쓴 거라면, 저절로 손이 가게 된다. 참고로 그 책의 제목은 『칼 바르트가 쓴 모차르트 이야기』(예솔, 2006). 그런데 클리프 에드워즈처럼 생소한 인물이라면, 지갑을 여는 게 멈칫거려진다. 박홍규의 『내 친구 빈센트』(소나무, 2006)도 아직 사지 못했는데 말이다.
본서는 고흐에 심취하여 세 권의 연구서를 낸바 있는 저자의 두 번째 책으로, 그의 문제의식은 두 가지다. 먼저 후배 화가나 유수의 평론가들이 고흐의 미학적 도전이나 의미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한때 목사 지망생이기도 했던 고흐가 제기하는 신학적 도전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으며, 또 ‘고흐’하면 모두들 그의 방대한 편지를 떠올리지만 누구도 그 편지를 신학 사상의 원천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한 인물이나 작품에 대한 정통적인 해석이 모두 쇠진하고 나면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설이 제출된다. 그러나 본서는 정통적인 해석이 오히려 손쉬운 심리분석에 매몰되어 고흐의 진면목을 가려 왔다고 공박한다. 이를테면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은 노랗게 탄 밀밭을 거대한 도깨비불로, 까마귀를 사악하고 불길한 죽음의 이미지로, 밀밭을 양편으로 나누는 길은 막다른 끝으로 읽으며, 뒤이어 자살을 단행한다는 식이다. 저자는 거기에 반하여 이 그림을 “자연의 복음이며, 대지와 하늘의 시편이고, 둥근 하늘 아래 한데 어우러져 사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을 노래하는 가을의 찬미가”로 해석한다.
● 구두 (A Pair of Shoes)ㅣ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ㅣ1885
일찍이 고흐가 그린 주인 없는 구두를 놓고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 미술사가 마이어 샤피로가 논쟁을 벌인 바 있으며, 가로늦게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가 끼어들기도 했다. 고흐를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영성가”로 생각하는 저자는 고흐가 주인 없는 낡은 구두·빈 의자·빈 방·텅 빈 들녘을 자주 그렸다면서, 그 까닭을 부재 속에서 존재의 충만함을 일구도록 재촉하고 자기만족과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돈 맥클린이 불렀던 <빈센트> 가운데 “이 세상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가사도 나오듯이, 살아생전 한 점 밖에 그림을 팔지 못했던 고흐는 늘 ‘저주받은 예술가’의 전형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그는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하는 삶”이라고 편지에 썼다. 『하느님의 구두』는 고흐의 “기뻐하는 삶”이 비롯한 데와, 그림으로 개종한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복음을 참으로 감동적으로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고흐는 “지상의 평범한 사물들 안에 육화된 진리”를 추구했던 ‘창조 신학자’였다.
사족: 이 글은 원고지 2.5매 분량이 줄어든 이본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한겨레신문> 2008년 1월 5일 자에 게재됐다. 어디를 어떻게 손보면 원고지 9.3매의 윗글을, 주어진 분량인 원고지 7.5매 안에 맞춰 넣을 수 있을까? 우선 제일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인 “저자에 따르면” 이하를 삭제한다.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첫 번째 문단에서부터 세 번째 문단까지를, 단 두 문단으로 줄이는 것이다. 이렇게: 빈센트 반 고흐는 매해 새로운 연구물이나 평전이 출간되고 있는 화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 분야라면 단연 모차르트다. 암살설과 자살로 점철된 그들의 불행했던 삶 때문인지 모차르트는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는 바흐를 간단히 따돌리고 있고, 고흐는 ‘현대 미술의 아빠’라 해도 좋을 피카소와 상박을 펼치고 있다.
1월 8일
방현석의 시나리오 『슬로우 불릿』(화남, 2004)을 읽다. - 슬로우 불릿Slow Bullet은 ‘천천히 날아오는 탄환’이란 뜻으로, 전공에 눈이 먼 현 중위의 간계에 의해 베트콩의 ‘미끼’가 된 이동훈 병장 일행이 맞이하게 될 최후를 가리킨다. 시종 반영웅적인 면모를 보이는 이동훈 병장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한 인물이고, 그의 보호를 받는 ‘순진한 바보’ 신형우 이등병 또한 그렇다. 베트콩 여전사인 쑤언은 침탈당한 조국을 지키는 가열한 ‘전사’이자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기르는 ‘여신’을 동시에 체현한 인물인데도, 그녀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고뇌는 너무 피상적이고 전형적이다.
이 시나리오는 좀 더 단순해야 했다. 초계 작전 중에 미군의 시체를 찾아오라는 새로운 임무(목표)를 맡은 한국군 수색대와 보이지 않는 베트남 민족해방군과의 신경전(장애), 그리고 임무의 완수를 채근하며 수색대의 귀대 요청을 거부하는 본부(갈등)와 정글에 던져진 수색대 대원들 간의 분열(서브 스토리). 거기에 베트남 민족해방군의 갖은 심리전 더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시나리오는 가능했으니(‘6종 관물’의 행방 또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주제가 좌우된다. 스티븐 킹의 원작이 더 좋겠지만, 롭 라이너가 연출한 <스탠 바이 미>(Stand By Me)를 참조할 것), #63 이후의 얘기들은 사족이다. 그것들은 지금껏 만들어진 월남전 영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사족. 이 책의 뒷장에는 ‘2007. 3. 21. 雨. 책나라’라고 적혀 있다. 내가 이 책을 샀을 때, 그 헌책방에는 재고 처리된 게 분명한 이 책이 십여 권이나 있었다. 더 사두었다면, 시나리오 창작 수업 때, 각색용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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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정일
시인, 극작가, 소설가. 1984년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