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혁 | 오늘은 베르베르의 신작 『파라다이스』를 놓고 이야기해보자.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베르베르의 『개미』는 흥미롭게도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판매량이 높은 소설이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한국에서 베르베르의 인기는 식지 않은 것 같다. 근데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과 다르게 그동안 평자들은 베르베르의 소설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 않아왔다. 이는 우리 시대 문화에 대한 어떤 증후를 보여주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번 좌담이 베르베르 소설에 열광하는 대중의 무의식과 베르베르 소설에 무관심한 비평가의 무의식을 살펴보는 한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물론 그 같은 무의식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꼼꼼한 독해가 필수적이다. 먼저 베르베르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스케치를 해보자.
박 진 | 베르베르 소설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유머’와 ‘매혹’을 들 수 있다. 『타나토노트』에서 잘 드러나듯 베르베르는 ‘죽음’을 가지고도 농담을 하고, 아무리 심각하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장난 치고 싶은 욕구를 누르지 못한다. 이를테면 오직 한 가지, “유머를 갖고는 장난치지 말아야”(『파라다이스』 2권, 「농담이 태어나는 곳」, 104쪽) 한다거나, “유머 감각이란 뇌의 진정한 건강 상태를 재는 종합적인 척도이자 의식의 맥박”(『뇌』 상권, 130쪽)이라는 표현들에, 유머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장성규 | 박진 씨가 ‘매혹’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 전에 ‘상상력’이란 키워드를 추가하고 싶다. 아무래도 이게 먼저 나와야 할 것 같아서… (웃음)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정말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상 그 이상을 보여준다. 『파라다이스』의 경우, ‘있을 법한 미래’나 ‘있을 법한 과거’의 텍스트들에서 그려지는 미래상과 과거상은 일반적으로 언론 매체에서 만들어지는 미래상이나 역사 담론에서 만들어지는 과거상의 범주를 완전히 넘어선다. 이런 기발한 상상력은 단지 특이한 소재를 등장시키는 데 국한되지 않고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직조된다. 과학적으로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특이한 소재에 상당히 많은 과학적 인포메이션이 첨가되면서 상상력이 빚어낸 베르베르의 이야기들은 설득력과 재미를 동시에 지니게 된다.
김남혁 | 유머와 상상력 그리고 과학, 두 분에 따르면 이것들은 독자들이 베르베르 쪽으로 건너갈 때 밟게 되는 징검돌이다. 징검다리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징검돌은 아마도 박진 씨가 말해줄 ‘매혹’일 것 같은데?
박 진 | 그럴 것 같다. 베르베르는 자신이 다루는 구체적인 대상들에 실제로 완전히 매혹당해 있다. ‘개미’가 그렇고 ‘뇌’가 그렇다. 분석하고 탐구하기 이전에 사로잡혀버린다고 할까. 나아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 세계에 대해서도, 그는 설계자나 건축자이기 이전에 홀린 듯 빠져들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 매혹에 동참할 수 있는 독자라면, 베르베르의 소설이 충분히 즐길 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베르베르의 매혹은 감상적인 몰입이나 정서적인 연루와는 좀 거리가 있다. 어떻게 보면 그의 매혹은 과학자적인 호기심과 연결되어 있다. 방금 장성규 씨가 베르베르 작품이 과학적이라고 말했는데, 그런 특성은 소재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인간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문제 삼을 때, 그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갈등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종(種)을 관찰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의 눈으로 인간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김남혁 | 그렇다. 베르베르는 인류를 마치 과학자처럼 실험하려고 한다. 『파피용』 속 등장인물의 말로 표현하자면, “시원(始原)에서 인류의 실험을 시작”(299쪽)해보고자 하고, 인간의 “뇌를 세척”(265쪽)한 후 현실에서 벗어나 “진공 속으로의 탈출”(278쪽)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시원과 진공 속에서 깨끗한 뇌를 지닌 인간은 과연 과거의 구태에서 벗어날까? 이런 의문이 베르베르 소설에서 연속적으로 드러난다. 간단히 말해 지구 밖으로 나가서, 또는 인간 존재 밖으로 나가서 지구와 인간을 관찰한다. 이 같은 두 분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래도 궁금한 게 있다. 베르베르가 작품의 메시지를 상상력과 유머와 과학자적인 태도를 기반으로 해서 아무리 흥미롭게 전달한다고 해도 그 메시지 자체는 너무 식상하지 않나?
장성규 |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해주면 좋겠다.
김남혁 | 『나무』에는 「투명피부」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의 메시지는 한국인 여성의 말에 담겨 있다. 투명피부로 기괴하게 변한 남자에게 그녀는 "변화는 두렵지 않아요. 정체와 거짓이 훨씬 더 나쁘죠."(64쪽) 라고 말한다. 그런데 현시대 사람들은 이런 메시지가 전달하는 교훈을 정말로 모르는가? 몰라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마치 독자들이 이런 교훈을 몰라서 변화 대신 정체를 추구한다고 보는 것 같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소설의 문제의식이 상당히 낡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현시대 독자는 정체보다 변화가 더 좋다는 걸 몰라서 정체된 삶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체된 삶을 추구한다. 이런 점을 문제 삼아야 한다.
박 진 | 일단 「투명피부」는, 내가 보기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설이 아닌 것 같다. 나는 그 소설을 ‘정체’와 ‘변화’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로 읽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는 모두가 끔찍해서 피하는 투명피부의 사람에게 한 여성이 다가가 목 부분을 들여다보며 ‘아, 이래서 내가 목이 아팠구나, 이제야 알 것 같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다. 「투명피부」는 이런 감수성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것이 어쩌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전하는 소설로 읽는 게 더 어울릴 듯하다.
장성규 | 문제의식과 관련해서는 베르베르 작품 안에서 편차가 있는 것 같다. 문제의식을 뚜렷하게 내보인다기보다 특이한 소재가 현실적인 문제들과 부딪힐 경우 나름대로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를 살리는 것 같고, 사랑 얘기처럼 일반적인 소재로 접근하면 상당히 진부해진다. 베르베르식 유머이긴 한데 재미가 없어진다. 이렇듯 문제의식의 편차는 작가의 세계관에 따라 좌우된다기보다 오히려 베르베르가 택하고 있는 소재에 따라 좌우된다. 하지만 문제의식이 약하다고 해서 베르베르의 장점마저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한국문학에서 간과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 지적인 재미들, 개미의 삶처럼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재미들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베르베르의 상상력이고 그의 장점이다.
박 진 | 소재와는 별개로 베르베르 소설에서 연속되는 문제의식은 전체주의와 상품사회, 그리고 대중의 심리에 대한 것이다. 그는 다양한 소재와 상황들을 다루고 있지만,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 어린 비판, 막장에 도달한 상품사회의 아이러니, 대중 조작과 획일화의 문제 등을 반복적으로 논점화한다. 이 문제들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기도 하고. 그런데 베르베르 작품을 즐길 때 포인트는 문제의식이 아니라 유머와 상상력이다. 작품의 포인트를 문제의식에 두고 볼 때 ‘고작 이 얘기 하려고 이렇게 많은 얘기를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베르베르 소설에서는 문제의식이나 메시지보다는 거기로 가는 과정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김남혁 | 그렇다면 베르베르의 특기인 유머와 상상력은 장편이나 단편이라는 장르적인 제약과 무관하게 모두 동일하게 드러나는가? 베르베르에게서 장편과 단편의 특징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장성규 | 베르베르에게서 장편과 단편은 특별히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 박진 씨가 말한 것처럼 과학자적인 태도도 지녔지만, 시니컬한 태도로 팔짱 끼고 인류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약간은 잘난 척도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그리고 결론으로 ‘쏘 왓(so what)?’하는 분위기를 제시하는 방식. 이런 것들이 장편과 단편에서 연속된다.
박 진 | 그렇다. 문제의식이나 유머, 상상력 등은 장편과 단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베르베르 자신도 말했지만 짧은 이야기들이 긴 이야기들의 ‘발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장편과 단편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특히 문제의식의 ‘깊이’라는 차원에서 장편과 단편을 비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장성규 | 베르베르가 장?단편 구별 없이 뻔하고 상식적인 얘기들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많이 읽는 이유를 생각하면, 베르베르가 성실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장르문학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상에 대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인포메이션을 최대한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법을 그는 알고 있다. 더불어 독자들이 탐색 과정에 동참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고.
김남혁 | 그럼 장편 『개미』를 통해 느꼈던 재미를 독자들은 『나무』나 『파라다이스』에 실린 단편들에서도 똑같이 느끼게 된다고 생각하나?
장성규 | 그렇진 않다. 베르베르가 상상력과 유머를 동원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크게 구별되지 않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의 효과는 분명 다르다. 베르베르는 콩트의 법칙을 잘 살릴 때 장점이 나타난다. 콩트가 길어지면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야기 중간 중간 개연성 있는 사건도 배치해야 하고, 인물의 변화도 이끌어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일반적인 문학에서 요구되는 문법들을 필연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이때 서사 구조에 구애받지 않는 톡톡 튀는 유머와 상상력이 주는 재미가 반감된다. 예컨대 『개미』는 좀 짧게 쓰였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모험 내지는 과학적인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들, 이런 과정 자체의 재미를 강조하려는 건 충분히 알겠는데, 그러다 보니까 지루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베르베르가 잘 하는 건 짧은 분량 속에서 콩트가 지녀야 할 장점들, 유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을 잘 배치하는 것이다. 분량이 길어지면 베르베르답지 않게 심각해진다. 나는 베르베르 소설 중에서 짧은 소설들이 더 좋았다.
박 진 | 아무래도 장성규 씨는 『나무』에 실린 단편들을 편애하는 것 같다. (웃음) 『나무』와 『파라다이스』에 실린 단편들의 상상력이 철저히 아이디어와 순발력에 의존한다면, 장편들에서는 과학적이고 신화적인 지식과 자료들을 토대로 한다. 단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두뇌 체조나 생각의 워밍업을 하는 느낌으로 읽으면 좋을 만한 얘기들인데, 장편은 아무래도 서사적으로 훨씬 더 복잡해지다보니 단편과는 호흡이나 느낌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짧고 읽기 편한 단편의 경우 특별히 거부감만 없다면 누구라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겠지만, 분량이 상당한 장편들은 다루고 있는 테마와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단편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경우와 훨씬 더 읽기 힘든 경우가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장편 『뇌』와 『개미』는 단편들보다 좋았지만, 『신』과 『타나토노트』는 좀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이건 역시 취향의 문제일 텐데… 『뇌』와 『개미』는 상대적으로 신화적 요소보다는 과학적인 요소들의 비중이 높고, 또 스릴러적인 구성을 부분적으로 활용해 긴박감 있고 단단하게 짜여 있는 편이다.
김남혁 | 나는 베르베르의 장편이 장성규 씨의 말처럼 일반적인 문학에서 요구되는 문법들을 잘 활용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앞서 말했듯이 『파피옹』은 인류가 지구를 탈출해서 새로운 행성에 정착할 수 있는지 여부를 실험하는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이렇게 기발한 실험에 집중하다보니 장편소설이라면 으레 갖춰야 할 미덕을 많이 포기하고 있다. 개연성 없이 행동을 바꾸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개성 있는 인물이 없고, 서사와 무관하게 좋은 인상을 주는 장면이 없다. 인물 고유의 개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독자들은 불어로 된 복잡하고 어려운 이름을 자주 까먹고 헷갈리더라도 서사를 즐기는 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장성규 | 베르베르는 깊이가 있는 작가가 절대로 아니다. 깊이만으로 본다면 저급의 작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깊이 외의 다른 장점이 많은 작가다. 문학을 대하는 기존의 관점으로 베르베르 소설을 재단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베르베르의 작품을 문학이라기보다는, 절대로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그냥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박 진 |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베르베르 소설은 내면을 성찰하거나 인물을 성격화하는 데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는 소설이다. 인물이나 내면이 아니라 행동과 스토리가 훨씬 더 중요한 소설인데, 여기에다 성격이 다른 소설들에 적용해온 익숙한 관점을 대입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김남혁 | 알겠다. 베르베르의 작품이 워낙 많이 소개되어 있다 보니 스케치가 조금 길어졌다. 이제 『파라다이스』로 넘어가보자. 한때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처럼 분량은 짧지만 감동의 여운이 긴 이야기들이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은 적이 있었다. 베르베르의 『나무』나 『파라다이스』 는 굳은 ‘머리를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파라다이스』 는 어떤 소설인가?
박 진 | 장성규 씨는 베르베르가 장편에서 심각해진다고 말했는데, 짧은 이야기 중에도 메시지가 선명하고 심각한 게 있다. 반대로 장편 중에도 유머가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장편 『타나토노트』는 우주여행을 하듯 천국을 탐사하는 소설인데, 죽음을 통해 무거운 철학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대신 신화적 상상력 위에서 다채로운 농담들을 구사하고 있다. 반면, 『파라다이스』에 실린 「맞춤낙원」이나 「상표전쟁」과 같은 단편들은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앞서 말했듯이, 베르베르의 소설들은 주제나 의미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이 전개되고 이야기가 굴러가는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소설이다. 그 과정을 즐기는 게 베르베르 소설에 어울리는 독법인 셈이다. 메시지만 보면 그리 심오하거나 남다를 게 없으니까. 그래서 『파라다이스』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메시지 지향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들은 단순하고 뻔해 보이는 측면이 있다.
장성규 | 그런데 메시지가 선명하다, 혹은 단순하다는 점은 베르베르 소설이 유독 한국에서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한 원인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문학으로 불리는 이야기들은 메시지가 심층적이어야 한다고 간주되어 왔다. 그런 관점에 따라 베르베르 소설을 읽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베르베르 소설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진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베르베르를 읽는 코드가 메시지의 진정성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메시지가 너무 파격적이면 독자들에게 사유의 부담감을 준다. 베르베르는 독자들을 이런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이런 방식이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문학에서는 이런 부담감이 편파적이라고 할 정도로 강요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남혁 | 두 분이 지적해준 대로, 베르베르는 메시지를 복잡하게 만드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복잡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인류에 대한 사랑 운운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만 전달하고, 전체주의나 상품사회처럼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안전하게 비판할 수 있는 대상들만 문제 삼는다. 그러니까 그의 상상력과 유머가 아무리 흥미로워도 메시지나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읽으면 분명 흥미가 떨어진다.
박 진 | 동의한다. 하지만 베르베르 소설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이건 『나무』와 『파라다이스』의 차이점이기도 한데… 『파라다이스』에는 『나무』보다 분량이 조금 긴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근데 단지 길이만 긴 게 아니다. 『파라다이스』에서는 풍자와 냉소, 유머와 아이러니의 어조 등이 교차하면서 메시지에 혼선이 빚어지는 단편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소설들은 명료하고 단조로운 단편들보다 좀 더 흥미롭다.
김남혁 |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이 그런가?
박 진 | 「환경 파괴범은 모두 교수형」(1권)이 대표적인 예 아닐까?
장성규 | 어, 나는 그 작품 안 좋게 봤는데. 일단 이 작품은 흡연을 금지하고 있으니까 안 좋았다. (웃음) 농담이고,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재미있지 않았다. 환경문제가 전면화 되면서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베르베르 작품답지 않게 길고, 결말에서 반전이 있을 것 같았는데 재미있는 반전도 없고, 메시지 측면에서 보면 진부하고, 또 이야기의 재미를 살리기에는 분량이 길었다. 길면서 질질 끄는 게 흥미를 잃게 했다. 「농담이 태어나는 곳」은 베르베르 소설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메타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떠오르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뭐든지 버려라”(?농담이 태어나는 곳?, 『파라다이스』 2권, 125쪽)라는 농담의 법칙이 나온다. 이 법칙과 다르게 「환경 파괴범은 모두 교수형」은 여러 가지 이야기 선들이 엮이고 분량이 길어지면서 유머를 놓치게 됐다.
박 진 | 장성규 씨가 말한 것처럼 환경문제와 관련된 메시지만 읽어내면 이 작품은 확실히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실은 좀 더 복잡하다. 우선 환경문제에 대한 다소 진지한 비판이 깔려 있는데, 이 테마가 정치사법적인 공권력과 치안의 문제, 무한경쟁 시장 논리에 대한 냉소적 풍자와 맞물리면서 이리저리 비틀리게 된다. 달리 말하면 환경보호라는 당위적 명제가 정치적 술수와 세력 싸움에 이용되고, 공권력에 의한 엄청난 폭력의 명분이 되며, 환경상품 개발을 위한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과 손을 잡으면서, 그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희화화되는 것이다. 또 목적지로 승객을 ‘쏘는’ 투석기를 개발하는 데 골프 전문가와 궁술 전문가들이 동원되는 장면이나, 가축들의 방귀가 메탄가스의 원천이라며 소, 돼지, 양 떼를 모두 없애라고 명령하는 장면 등은 냉소나 풍자보다는 유머 그 자체의 감각에 충실하다. 한편 환경 파괴를 일삼는 부분별한 행위들에 대한 경고는 흥미롭게도 감각적 쾌락의 순수한 열정에 대한 긍정과 포개져 있다. 이렇게 되니 작가가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지는 경향이 있다. 메시지를 통합하기 어려운 하나의 거대한 아이러니나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이 되어버리는 건데… 장성규 씨 표현대로 ‘쏘 왓?’이라 할 수도 있고, 그걸 우리말로 하면 ‘어쩔~!’이겠지만. (웃음)
김남혁 | 문제의식과 메시지에만 집중하는 내가 보기에도 (웃음) 이 작품은 재미있었다. 과거 자본주의는 항상 환경파괴의 주범이었는데, 현시대 자본주의 체제는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환경을 보호하자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욕망은 자발적으로 억압되고 전체주의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미래로 갈수록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하게 되고 환경보호 운동이 강화되며 그 결과 과거의 잔재인 전체주의 사회가 도래한다. 미래로 갈수록 인류는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과거의 구태를 또 다시 반복하게 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 소설에도 만족스럽지 않은 게 있다. 유엔사무총장은 왜 맹인이어야 하는가? 이 소설에서는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서사의 흐름과 무관하게 설정된 이러한 디테일들이 거슬린다.
장성규 | 베르베르 소설은 개연성을 따지면서 읽는 소설이 절대로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는 경직된 독서에 대해서 장난치는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박 진 | 「환경 파괴범은 모두 교수형」에서 껄끄러운 점은 그런 사소한 디테일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이 소설의 장점이 다른 관점으로 보면 거슬릴 수 있다. 환경문제는 이 시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거대담론이라고 할 정도로 쉽사리 비꼬고 빈정거릴 수 없는 문제다. 이런 무거운 문제를 갖고도 가벼운 상상의 놀이를 하고, 환경보호를 당위적인 명제로 내세우면서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가 엉뚱하게 딴청을 부리는 것, 이런 점이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김남혁 | 장성규 씨는 짧으면서 블랙코미디적인 유머가 있는 작품들을 베르베르적인 특성으로 보는 것 같고, 박진 씨는 유머와 메시지가 복합적으로 섞여서 메시지 지향적인 경향을 탈피하는 이야기를 베르베르적인 특성으로 보는 것 같다. 『파라다이스』에 실린 작품들을 놓고 더 말해보자. 각자 이 작품집에서 좋았던 작품을 말해보자. 먼저 장성규 씨.
장성규 | 「안개 속의 살인」이 좋았다. 작가의 약력을 보니까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도 같다. 저널리즘 쪽에 있었다고도 하니까.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엄마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건을 처음으로 취재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한다. 이때 편집장은 주인공이 보기에는 진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시민 전체의 이익을 고려할 때 진실을 밝히는 게 유익할 것 같으냐고 말한다. 그러면서 편집장은 기사를 완전히 바꾸어버린다. 살인이 아니라 사고사로 처리하고, 그렇게 바꿔야만 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주인공에게 설명한다. 만약 그 여자가 감옥에 가면 지방 소도시에서 성매매 여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범죄율이 더 높아질 거라는 등등.
박 진 | 이 엄마가 아이를 살인한 것이 밝혀지면 또 다른 모방범죄가 발생할 것이라고도 말하고.
장성규 | 그렇다. 이 작품에는 베르베르의 소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 드러나 있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유통되는 과정에서 가장 매끄럽고 실용적인 효과를 주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후 그와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른 기자가 취재해서 기사화한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톤으로 작품이 끝나는데, 베르베르는 당위적이고 계몽적인 이야기들 대신에 ‘쏘 왓’ 이런 분위기의 ‘쿨’한 이야기를 지향하는 것 같다.
박 진 | 나도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소설은 진실을 조작하는 언론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진실을 말하는 게 무조건 좋을 수는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렇게 베르베르는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대신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의 난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진실을 말하라, 또는 진실을 은폐하라, 이런 식이 아니라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딜레마를 보여주는 게 재미있었다.
김남혁 | 박진 씨도 「안개 속의 살인」이 가장 좋은 작품이었나?
박 진 | 그 작품도 괜찮았지만, 딱 하나만 고르라면 「영화의 거장」을 꼽고 싶다. 「환경 파괴범은 모두 교수형」과 비슷하게 복합적이면서도, 어딘가 불편하게 만드는 찜찜한 면이 없이 산뜻하다. 3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라는 종의 자기 파괴를 막기 위해 전쟁의 원흉이었던 국가, 종교, 역사를 금단의 열매로 규정한다는 설정도 재미있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끔찍한 전체주의적 통제와 치안 사회를 낳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래도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망은 더 강렬해져서 국가, 종교, 역사의 빈자리를 영화가 채우게 된다는 상상력도 흥미롭다. 이것이 영화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영화 ‘산업’과 대중의 우상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는 점도 좋다. 특히 스탠리 큐브릭의 자손인 영화감독이 ‘아포칼립스’ 이전으로 초소형 카메라를 보내 찍은 ‘실제’ 장면들이 최고의 영화로 각광받게 된다는 설정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반대 방향에서 뒤집는 참신한 발상이다. 허구가 실제와의 경계를 지우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가 허구의 지위를 점하며 각광받는다는 점, 그래서 조상들의 기억을 복원해야 한다든가 하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는 솜씨, 이런 게 좋았다.
김남혁 | 두 분이 언급한 작품들처럼 『파라다이스』에는 뚜렷한 메시지보다는 상상력과 유머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작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파라다이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박진 씨도 「상표전쟁」 같은 소설은 메시지가 선명해서 좋지 않았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장성규 씨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다.
장성규 | 박진 씨 얘기처럼 굉장히 일반적인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미래에는 국가의 경계는 사라지고 기업의 상표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시 과거처럼 기업에 의한 국가의 경계가 강화된다. 인류는 미래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과거를 반복한다. 뭐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메시지보다는 이 작품에 추신처럼 붙어 있는 마지막 말이 흥미로웠다. “추신: 언급된 모든 상호에 대한 저작권은 보호받음.”(「상표전쟁」, 『파라다이스』 2권, 238쪽). 농담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픽션이라는 안도감을 독자에게 줄 때 농담이 된다. 만약 이 거리감이 무너지면 더 이상 농담이 아니라 심각한 문제를 고민해야 하니까. 개그 콘서트의 동혁이 형이 만약 정말 급진적인 샤우팅을 하면 그건 개그가 아니라 선동이 되지 않겠나. 그럼 당연히 심각해질 것이고 재미는 반감된다. 개그라는 걸 먼저 인지하게 하는 구조가 필요한 거고, 그건 베르베르의 농담도 마찬가지다. 추신 같은 형식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거리감을 확보하고, 독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 이런 것이 베르베르식 농담의 인기 요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구에서 만든 건 ‘미에틱’(MIE-tic, Made In Earth+tic) 하다고 했는데, 이 표현이 익숙한 것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면서 독자에게 공감을 얻는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상표전쟁」은 메시지의 측면에서는 진부하지만 베르베르식 농담의 기술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박 진 | 내가 『파라다이스』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건, 단지 몇몇 작품들이 선명하고 직선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대중(성)이란 문제를 다루는 베르베르의 방식이 가장 불편하다. 「당신 마음에 들 겁니다」와 「허수아비 전략」이 그렇다. 전체주의를 혐오하는 그는 대중의 획일성과 맹목성을 신랄하게 비꼬는데, 이 과정에서 대중을 매우 단순하게 파악하고 얕잡아보는 태도가 엿보인다.
장성규 | 내 느낌도 비슷하다. 특히 「당신 마음에 들 겁니다」가 그랬다. 베르베르는 굉장히 재미있고 대중적이고 어깨에 힘을 빼서 좋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불쾌했다. ‘난 그런 방식으로 웃기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가 거북하다. ‘난 결코 대중적이지 않아’와 같은 식의 태도가 베르베르 답지 않았다.
박 진 | 사실 그는 누구보다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반대로 ‘나는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는다’, ‘대중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저급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나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거스르면서, 오히려 대중을 선도하고 이끌어간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자기를 대중작가라고 부르는 데 대한 불만과 방어심리가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가치의 측면을 떠나 그의 소설은 분명 대중적일 만한 요소들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데, 그의 이런 태도는 궁색하고 모순적인 자기변명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장성규 | 이 작품의 스타일은 분명 다른 작품과 괴리되는 것 같다. 「농담이 태어나는 자리」 같은 작품들에서 그는 분명 농담에는 이런저런 타입이 있고 그것들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말했는데 말이다. 이 작품에서 베르베르는 자신이 다른 작품에서 말한 대중적인 농담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고, 그것을 미디어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대중의 변덕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다.
박 진 | 『파라다이스』에 실린 작품은 아니지만 『나무』에 들어 있는 「달착지근한 전체주의」에서도 베스트셀러 작가를 희화화한다. 베르베르 작품들 가운데 대중과 관련된 것을 모두 단순하고 어리석다고 취급하는 태도가 드러날 때, 그리고 자기 자신을 대중주의와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부각될 때 상당히 불편하다. 더구나 그의 소설이 실제로 무척이나 ‘달착지근’하다는 걸 떠올리면… (웃음)
김남혁 | 듣고 보니 참 아이러니하다. 『파라다이스』에서 더 하고 싶은 말 없나?
장성규 | 마지막으로 이 작품집에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점을 하나 더 말하고 싶다. 나는 이 작품집 마지막 소설로 왜 「아틀란티스의 사랑」이 배치됐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파라다이스』에 실린 작품들과 비교할 때 톤이 많이 다르다. 이 작품은 동양적인 것을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입화 한다는 점에서도 불만족스럽지만,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다. 문제는 왜 하필 이 작품이 마지막에 수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아틀란티스의 사랑?은 『파라다이스』에 수록된 작품 전체를 베르베르 특유의 유머와 농담 대신, 사랑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통해 다소 무겁고 진지한 톤으로 수렴시킨다. 베르베르의 선택인지, 아니면 출판 에디터의 선택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어색하게 『파라다이스』에 무게감을 주려는 듯한 의도가 엿보여 다소 거슬린다.
박 진 | 무게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책을 마무리하여 대중 취향을 강화하는 전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김남혁 | 좋다. 이제 작품 밖으로 나가보자. 나는 이 책 읽기가 상당히 고역이었다. 프랑스 식 유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베르베르의 유머는 시종 썰렁했고, 거기다가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마저 식상하니, 도무지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두 분이 베르베르 소설의 장?단점을 명쾌히 지적해주셨는데, 내가 생각하는 단점을 몇 가지 더 언급하고 싶다. 베르베르는 주제적으로 인류를 대상으로 기발한 실험을 하지만, 소설 그 자체를 갖고서 미학적으로 실험하지는 않는다. 그는 기존의 소설 독법으로 읽어내기 어려운 여러 가지 형식 실험이나 언어적인 실험을 시도하지 않는다. 또 하나, 말도 안 되는 유머를 구사하는 박형서나 여담을 늘어놓는 천명관이나 기발한 발명품을 제시하는 김중혁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은가? 베르베르가 이들과 특별히 다른 게 있는가?
장성규 | 김남혁 씨의 언급은 베르베르 작품이 그렇게 독창적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열광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인 것 같다. 이에 답해 보겠다. 좌담 처음 시작할 때 했던 말인데, 문학이라고 보고 들어가면 베르베르를 해석하기 힘들 것 같다. 말을 바꾸면, 베르베르 작품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지니고 있는 미덕과는 거리가 있다. 박형서와 천명관과 김중혁이 지니고 있는 미덕과 베르베르 작품이 주는 미덕은 분명히 다르다. 김중혁의 수집광들, 박형서 특유의 지적인 농담, 천명관의 ‘이야기’ 자체에 대한 탐색은 단지 말장난에 그치지 않고 풍자적인 성격을 지니며 문학적인 의미도 지닌다. 평론가들은 베르베르 소설이 김중혁과 박형서와 천명관 소설의 미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베르베르를 멀리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베르베르 텍스트들이 상당히 낯설었다. 이것을 굳이 문학이라고 부르고 그 문학의 자장 안으로 귀속시킬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렇게 낯선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책도 분명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독자들이 계속해서 베르베르에게 열광한다는 점은 역으로 한국문학에서 이렇게 황당하고 낯선 이야기가 상당히 경시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박 진 | 동의한다. 베르베르 소설이 특히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베르베르 같은 소설이 우리에겐 너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신기하고 기발하게 느껴져서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기존의 장르소설들과 비교하면 사실 베르베르가 보여준 상상력은 그렇게 새롭거나 낯선 게 아니다. ‘사람 흉내’를 내는 전자제품들을 혐오하지만 실은 자신이 ‘기계’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남자 이야기(『나무』의 「내겐 너무 좋은 세상」), 방사능 유출에 견딜 수 있도록 인류를 개량하는 과학자 이야기(『파라다이스』의 「내일 여자들은」) 등은 차라리 식상하고 상투적인 모티브에 가깝다.
장성규 |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은 정말, 어떻게 끝날지 미리 짐작이 가는 얘기였다.
박 진 | 그래서 장르소설 마니아들은 오히려 베르베르 소설을 재미없고 시시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제는 장르소설의 고전이 된 아이작 아시모프나 필립 K. 딕 같은 작가가 우리나라엔 없었고, 우리에게 소설은 유독 재현적이고 사실적인 경향의 작품들이 지배적이었다. 또 우리는 메시지 중심의 심각한 독서에 익숙하고, 오랫동안 주로 그런 경향의 소설들을 배우고 읽어왔다. 그런데 이렇게 가볍고 경쾌하게, 이야기 그 자체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소설도 있다는 것이 일반 독자들에게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 때문에 베르베르 소설은 비평가들에게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 같다. 베르베르 소설의 매력이나 특징은 곧 문학적인 약점이나 한계와도 통한다. 김남혁 씨처럼 이런 점들을 꼼꼼히 짚어주고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관점도 꼭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소설을 철저히 외면하고 배제시킨다든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기준들로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베르베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통해, 우리 문학 전반이나 독서 관습의 편향성을 돌아보는 일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김남혁 | 우리 문학이 해소해주지 못했던 갈증을 베르베르 작품이 풀어준다면 우리에게 베르베르 소설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근데 대중들이 베르베르 소설에 열광하는 만큼 베르베르가 아닌 다른 스타일의 작품들에도 관심을 갖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베르베르 소설은 우리에게 문학의 갈증을 풀어준다기보다 문학의 다양성을 사장시키는 게 아닐까? 현시대 대중들은 유독 베르베르에게만 열광하는 건 아닐까?
박 진 | 그런 상황은 비단 베르베르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마케팅의 힘이 막강해진 요즘 베스트셀러가 문학의 다양성을 사장시키는 경향은 내가 볼 때도 무척 심각한 문제다. 온 국민이 다 같은 책을 읽는 이런 현상은 솔직히 끔찍할 정도이고, 분명히 비판해야 할 현상이다. 근데 모두가 베르베르를 읽는 것이, 모두가 하루키를 읽거나 신경숙을 읽는 것보다 정말 더 나쁜 일일까? 나는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베르베르는 문학인 척, 있는 척 하면서 문학을 한다기보다, 기본적으로 즐길 만한 이야기라는 전제에서 글을 쓰는 작가다. 하지만 베르베르 소설이 문학적이지 못한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유독 저급하고 나쁘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태도는 상당히 모순적이라고 느껴진다. 오히려 대단한 문학이라는 포즈를 내세우면서 대중의 취향을 충실히 따라가는 베스트셀러들이 혹시 더 해로운 건 아닐지?
김남혁 | 더 생각해봐야 할 어려운 문제제기를 해준 것 같다.
장성규 |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베르베르의 성공은 출판 마케팅의 측면에서도 분석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컨대 『파라다이스』의 경우 ‘있을 법한 미래’와 ‘있을 법한 과거’가 서로 맞물려 배치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출판 에디터의 감각이 발휘된 것일 듯싶은데… 미래에 대한 기발한 과학적 상상력을 제시해주고, 바로 뒤에서 익숙한 과거를 통해 독자에게 안도감을 주는 형식은, 텍스트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출판시 ‘배치’의 문제가 『파라다이스』의 성공에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원작과는 다르게 한국어판에서만 일러스트가 새롭게 삽입된다거나, 텍스트 소재에서 베르베르의 주 시장인 한국이 유독 빈번히 나타난다거나 하는 것들은 베르베르 현상이 출판 마케팅의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김남혁 | 중요한 지적이다. 대중 문학에서 정치성을 발견해내는 데 탁월한 이론가인 슬라보예 지젝의 말로 이 좌담을 정리해보자. 그는 더러운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단지 대중적이어서, 아니면 소설이라면 으레 지녀야 할 미덕을 지니지 않아서 베르베르 소설에 무관심했던 비평가들에게 이 같은 지젝의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베르베르 소설은 본격 문학의 깨끗한 물을 오염시켰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베르베르 소설에 담긴 다른 미덕들마저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지젝은 물의 오염이 아이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말라고도 당부하고 있다. 이 말은 오로지 베르베르 소설에만 열광하는 독자들에게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문학의 다양성이라는 대의를 오염시키는 원인은 문화 산업의 마케팅 전략과 손쉽게 손잡을 수 있는 대중성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베르베르의 대중성에서 독특한 문학성을 발견하면서도 그러한 대중성이 자본주의의 전략에 포섭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이야기를 해준 두 분께 감사한다. (*)
----------
좌담자 소개
김남혁
문학평론가. 2007년 <중앙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P선배의 계획을 엿듣고 따라 세운 계획인데, 『이광수와 그의 시대』(김윤식), 『김수영 평전』(최하림), 『발자크 평전』(츠바이크) 등등과 같이 멋진 평전을 쓰기를 바라고 있다.
박진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작가세계> 편집위원. 저서로 『문학의 새로운 이해』(공저),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 평론집 『달아나는 텍스트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