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골드문트는 빅토르의 갈비뼈 사이를 칼로 찔렀고, 피가 흥건한 그의 시체를 너도밤나무 가지 위에 눕혀두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골드문트는 도대체 빅토르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다. 짐승들이 완전히 먹어치웠을지, 그의 시신 중 일부라도 남아있을지 궁금했다. (…) 벌레들이 다 먹어치우지 않았을까? 두개골의 머리카락과 움푹 들어간 눈 위의 눈썹은 아직 남아 있을까? (…) 아,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인간, 모든 사물이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278쪽.
모든 것이 잘 끝났는데, 그토록 전력투구해서 이루려 했던 그 무엇이 이제야 끝났는데, 뿌듯하거나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한없는 공허감에 빠져들 때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알기에. 무언가에 최선을 다한 후에야 느낄 수 있는 뼈아픈 공허감. 그것은 이 모든 벅찬 감정들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더욱 명징하게 깨닫는 순간이다. 예술가들은 이런 허무감을 더욱 예민하게 느낀다. 그들은 최고의 작품을 힘겹게 만들어낸 후 다시는 이런 작품을 만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예술가들은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 때 오히려 엄청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한 세계를 창조했다는 기쁨은 잠시 뿐. 예술가들은 기존에는 느껴보지 못한 더 깊은 허무감에 빠진다. 예술가가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골드문트가 요한의 상을 만든 후에 느꼈던 공허감도 바로 그런 절망 때문이었다. 최고의 열락을 맛본 후 느끼는 깊은 절망의 나락.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깊은 허무감. 골드문트는 요한의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의 죄를 더욱 똑바로 바라보게 된다. 그는 질문하기 시작한다. 내가 죽인 빅토르, 그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이 순간이 내 인생의 클라이막스로구나 싶은 순간. 오히려 자신의 죄를 똑바로 바라보게 된 골드문트. 그것은 자신의 어둠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전체성’을 향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둠을 뺀 밝음만이 나다운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어둠과 죄악과 실수까지 끌어안은 더 커다란 나를 발견하는 순간. 자신이 그토록 열정을 불태웠던 대상을 완성하게 되자, 그에게는 더 이상 니클라우스 같은 직업적인 장인(匠人)이 되고 싶은 열망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장인이라는 직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예술의 열정을 끊임없이 불태우기 위한 방랑의 자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니클라우스는 자유를 향한 골드문트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니클라우스는 자신의 제자가 더 훌륭한 장인이 될 수 있는 ‘재능’만이 중요했기에, 골드문트가 꿈꾸는 ‘삶’까지 배려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골드문트는 자신이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하나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외부의 자극으로 들어온 이미지가 아니라, 그의 무의식이 끊임없이 갈구하던 이상형이었다. 바로 영원한 어머니 이브의 얼굴이었다. 골드문트는 영원한 어머니 상을 떠올리며 비로소 깨닫는다. 이브의 따스한 품 안에서는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 가장 버리고 싶은 존재, 가장 잊고 싶은 존재, 빅토르처럼 살해당한 존재까지도 조건 없는 사랑의 대상임을. 그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의 창조자로서 최고의 기쁨을 누린 후, 그 기쁨에 비례하는 절망과 공허의 밑바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좌절의 심연 속에서 비로소 영원한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다. 모든 것을, 설령 그것이 가장 삼키기 어려운 고통일지라도, 불길이 타오르는 거대한 가시처럼 아프고 뜨거운 진실일지라도, 그것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그것이 삶이라고. 영원한 어머니 이브의 상징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궁극적으로 ‘분석’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품어 안는 지혜가 아닐까. 용서할 수 없는 모든 것, 세상 속에 속할 수 없는 그 모든 것까지 끌어안는 사랑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가라는 ‘직업’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창조 행위 자체가 골드문트에게 준 선물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골드문트는 감자기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 그것은 영원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 영원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인생의 심연 위로 몸을 숙인 채, 미소를 잃고 아름답고도 섬뜩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영원한 어머니인 그녀에겐 모든 사물이 동등했다. 그녀의 신비로운 미소는 마치 달처럼 만물을 비추었고, 그녀에겐 우울한 상념에 빠져 있는 골드문트와 마찬가지로 생선 시장의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잉어 역시 사랑스러운 존재였고, (…) 한때 골드문트의 돈을 훔치려고 안달하다가 지금은 숲에 흩어진 빅토르의 유골 역시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 헤르만 헤세, 임홍배 옮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