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하늘이 끝난 뒤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야 하는가?
마지막 국경선이 끝난 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 모하마드 다르위시Mohmand Darweesh
9·11 사태로 트윈 타워가 파괴되고 난 몇 달 후 이스라엘이 예닌을 폭격했다. 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폐허 더미 아래 시신이 널려있는 거대한 구덩이로 변했다. 예닌의 구덩이는 트윈 타워가 남긴 것과 똑같은 크기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 잔해더미를 파헤치는 생존자들을 빼면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 『시간의 목소리』
인간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 유대인들이 경험한 유랑, 이산, 절멸의 역사는 세계인들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반성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유대인 희생양들의 이야기는 과거사를 반성하고 애도하게 만든다. 그런 만큼 유대인 홀로코스트 담론은 문학, 영화, 미술, 역사, 철학 전 분야에 걸쳐 이제 지배적인 목소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시온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강자가 된 지금, 하는 짓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전시하듯 이스라엘은 수시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폭격했다. 이스라엘인들 중에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나와 폭격장면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면서 축배를 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공중폭격이 불꽃놀이라도 되는 것처럼 즐겼다. 이런 장면을 본다면, 고인이 된 프리모 레비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 담론은 ‘홀로코스트 산업’이 되었고, 이런 담론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른 팔레스타인 난민학살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양국이 처한 권력의 비대칭성만큼이나, 양국 사이 담론의 비대칭성 또한 일방적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영문학자·문학평론가가 안타까워했다시피, 팔레스타인에 관한 이야기들이 세계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는 문학성과 예술성이 떨어지기 때문일까? 현실이 전쟁터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세련된 문학예술로 승화시켜보라는 요구는 정당한가? ‘너희들의 고통으로 우리를 감동시켜’보라는 주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 그들의 고통이 타인의 예술적 쾌락이 되고, 그들의 슬픔이 타인의 미학적 위안으로 사용된다면 말이다.
수전 아불하와의 『예닌의 아침』Mornings in Jenin, 푸른숲, 2013은 무심한 세계인들의 냉정한 요청에 응답하는 이야기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이 주목받지 못한다면, 그들이 당하는 억울함과 부당함은 망각되고 무시된다.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람들이 다같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서구적인’ 기준에 적합한 이야기로 승부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라는 것이 강자들이 사후적으로 구성한 잘 짜여진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자기 이야기가 없는 약소민족은 역사에서 잊혀질 수밖에 없다. 약자들에게 가해진 대학살은 침묵으로 가라앉고 약자들의 목소리는 지워지기 때문이다.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 해인 2002년 이스라엘은 예닌의 난민촌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지적하다시피 예닌에서 일어난 폭격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스라엘의 명분은 분명했다. 이스라엘은 자국군인 13명을 살해한 아랍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했을 뿐 민간인들에게 폭격한 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유엔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예닌에 대학살은 없었다.” 그렇게 보고한 유엔대표단은 예닌에 발 한번 디딘 적이 없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수전 아불하와는 2002년 예닌의 난민촌을 다녀오면서 침묵당한 대학살 현장을 소설화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세련된 미학으로 승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세계인들의 눈과 귀에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길 원한다. 소설은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게 해주고, 애도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극히 허약한 방법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닌의 아침』은 자기 땅에서 난민이 되어버린 아불헤자 가족의 가족사이자 팔레스타인의 역사다. 1948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건국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강제로 쫓겨난다. 아불헤자 가족 또한 예닌으로 추방된다. 난민촌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어느 하루, 늙은 아버지 아불헤자는 의연히 일어나 고향땅으로 걸어간다. 이스라엘군들이 쳐놓은 철책선 너머가 바로 그의 고향이다. 그는 철책 너머 자기 고향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사살된다. 어떤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때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저항 행위가 되기도 한다.
아불헤자의 아들 하산과 결혼한 베드윈족 여인인 달리아에게는 쌍둥이 아들 유세프와 이스마엘이 있었다. 1948년 쌍둥이들의 여동생인 아말이 태어난다. 그해 여름, 이스라엘 군인들이 난민촌으로 들어오고, 달리아는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이스라엘 군인 모세는 자신에게 음식을 대접해주었던 아랍 여인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유괴한다. 남편은 살해되고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은 사라지자, 달리아는 정신줄을 놓는다. 아말은 엄마의 이른 죽음 후 예루살렘에 있는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고아원에서 공부하던 아말은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아말은 미국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의사 마지드와 결혼하여 딸 사라를 낳는다. 의료 활동을 하려고 레바논으로 갔던 마지드마저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충격으로 마음을 닫은 아말은 딸 사라와도 정서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아말은 사랑하는 사람을 수없이 잃는 상실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그녀의 엄마인 달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딸 사라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다.
이스라엘 군인 모세에게 유괴되었던 이스마엘은 다윗이라는 이름을 갖고 이스라엘인으로 살아간다. 그로부터 53년이 지난 2001년 다윗이 누이동생인 아말을 찾아 필라델피아로 온다. 그들은 53년 만에 처음으로 오누이로서 만나게 된다. 2002년 아말은 딸 사라와 함께 마침내 고향땅 예닌을 방문한다. 그날 아침 예닌의 태양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예닌은 이스라엘 군대의 집중폭격을 받았다. 예닌의 집단묘지에는 서른세 구의 시신이 묻혔다. 아말도 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아말은 사라를 구하려고 날아오는 총알을 온몸으로 막았다. 아말은 그 순간만큼은 풍성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딸을 온몸으로 감쌀 수 있었으므로. 예닌에서는 형체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구덩이에 묻혔다. 하지만 예닌에 대학살은 없었다. 미국과 유엔과 이스라엘은 그렇게 발표했다.
팔레스타인인은 유대인들을 맞이해준 주인이었다. 하지만 주인과 손님의 위치는 바뀌었다. 쫓겨난 주인은 적이 되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웃이 있어서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가 이웃/적의 경계를 만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먹고 삼켜서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라는 타자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들의 필연적인 내적 취약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주체가 자율적인 주체라는 환상을 유지하려면, 자기 안의 타자들을 폭력적으로 추방해야 한다. 내 안에 있는 타자들을 토해놓고 배설물로 혐오할 때 주체와 이웃/적의 경계선이 그어진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삼킨 팔레스타인을 토해놓은 다음 그들을 제거해야 할 배설물이자 비체로 상상한다. 하지만 다윗과 유세프처럼 쌍둥이 형제였던 이들은 그 기원에서부터 이미 뒤섞인 존재였다. 다윗은 전투에 나갔다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랍인을 보고 혐오감에 치를 떨면서 그를 학대하고 고문했다. 하지만 형이자 타자인 유세프를 제거하는 것은 곧 다윗 자신의 소멸과 다르지 않다.
다윗과 유세프처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팔레스타인 소년들은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졌다.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돌을 이용해 정착촌을 건설해온 이스라엘의 폭력을 상징적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자살폭탄공격의 공포는 이스라엘의 총, 탱크, 전투기들의 폭력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러한 저항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더 좋든 나쁘건 이스라엘을 그 자신에게 되돌려주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삼인칭 화자는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프로이트와 비유럽인』에서 모세의 혼종성을 분석한 바 있다. 역설적이게도 유대민족의 창시자 모세는 이집트 왕자였다. 모세에게 이끌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는 전쟁포로였고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추방’과 기다림의 역사를 살았던 유랑민이자 난민들이었다. 유대적인 것 자체가 유랑, 망명, 추방과 분리불가능하다. 세상을 떠돌았던 그들이 어딘가에 정착하려면 이웃의 환대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인 모세가 보여주다시피 유대성은 비유대적인 타자성과 그 기원에서부터 쌍생아였다. 『예닌의 아침』에서 모세는 자신을 환대해주었던 아랍 여인의 아이 이스마엘을 이스라엘인으로 키웠다. 이처럼 유대적인 것은 비유대적인 것과 이미 언제나 혼재하고 있으므로, 엄격한 유대적 경계선을 긋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
사이드의 통찰은 유대적인 것과 비유대적인 것이 공존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 점이다. 사이드는 권리와 땅과 재산과 모든 것을 박탈당했던 유대민족 스스로의 과거 경험을 거울삼아 현재를 성찰하도록 호소한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을 묶어줄 수 있는 공통분모가 추방과 박탈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추방과 박탈의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은 또 다른 희생자들을 희생시킨다. 유대인 졸란타는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전부 잃고 “시오니즘의 유혹과 젖과 꿈에 관한 달콤한 약속만 믿고” 홀로 팔레스타인으로 오게 된다. 모세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달리아의 아이를 납치한다. 졸란타는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인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불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아남았지만 죽어가고 있었다. 졸란타에게 아이는 이제 살아갈 이유가 된다. 그녀는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졸란타는 “고통의 에너지를 사랑의 표현으로 바꿨고, 오로지 다윗에게만 그 사랑을 주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여인 졸란타는 자기 행복을 위해 그 아이가 어떻게 자기 손에 들어왔는지 묻지 않음으로써 남편의 범죄와 공모한다.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또 다른 여자에게 그대로 전가한다. 그로 인해 두 엄마는 각자 다른 이유로 평생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달리아는 자식을 잃어버렸다는 슬픔으로, 졸란타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기쁨으로 바꾼 것에 대한 죄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임종시 모세는 아들에게 비로소 진실을 말해주고 용서를 구한다. 그가 팔레스타인인이며, 그를 납치한 사람이 다름 아닌 아비인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팔레스타인인이었던 시절 다윗의 이름은 이스마엘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마엘은 하갈의 자식으로 사막으로 추방된다. 평생 이스라엘인 다윗으로 살아온 그는 격심한 충격에 빠진다. 그는 동족인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하는 이스라엘 군인이기도 했다. 군복무시절 그는 자신과 모습이 닮았다는 것만으로 고문하고 학대했던 사람이 자신의 쌍둥이 형 유세프임을 알게 된다.
다윗/이스마엘과 유세프의 관계야말로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한 ‘민족적 알레고리’다. 이 소설에서 다윗/이스마엘과 유세프는 유대인성이 팔레스타인이라는 타자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윗/이스마엘의 존재는 완전한 유대인도, 그렇다고 무슬림도 아니며, 이스라엘에도 팔레스타인에도 속할 수 없는 혼종성을 상징한다. 혹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공존 프로젝트인 두국가주의binationalism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아랍의 시인 다르위시가 『망각을 위한 기억』에서 노래한 역설적인 존재들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인 다르위시는 유대인 애인에게 “널 사랑하지 않아, 아니 널 사랑해”라고 분열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과 함께 머무는 것이며 사랑의 취약성으로 인해 이웃과의 공존을 모색하려는 모순적인 노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인들은 유럽에서 당한 희생을 ‘홀로코스트 산업’으로 만들면서 희생자로서의 역할을 부각시켰지만, 정작 유대인들의 희생에 아무런 책임도 없었던 팔레스타인들을 학살하고 희생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들은 독일인들에게 무자비하게 당한 것을 어처구니없게도 팔레스타인들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존 쿳시가 말하듯 팔레스타인들을 ‘희생자들의 희생자’가 되도록 만든다. 이스라엘인들은 이웃으로 환대받았지만, 이웃의 환대를 대량학살, 폭력, 추방으로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홀로코스트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