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에릭 오르세나의 『물의 미래』 마지막 장을 에세이로 소개합니다. 전작 『코튼로드』(2007)에서 ‘목화’를 주제로 세계화의 이면을 이야기했던 오르세나가 이번에는 ‘물의 미래’,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오르세나가 물 부족 위기에 처한 지구촌 여러 나라들을 탐사한 끝에 제시하는 결론은, 물은 늘 차고 넘치고 흐른다고만 여겨왔던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 편집자
왜 생선초밥이 아프리카의 물을 고갈시키는가?
여기 생선초밥이 하나 있다고 하자. 일본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날생선 한 조각 말이다. 우선 생각하기에 참치나 농어, 고등어처럼 바다에 사는 생선들만큼 담수를 축내지 않고도 생산할 수 있는 먹을거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물고기들은 대부분 초현대식 일본 어선들이 저인망을 쳐서 잡는다. 그러므로 모리타니 인근 해역에서 고기를 잡는 영세한 어부들이 어떻게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별수 없이 직업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시장의 진열대에서는 점점 더 생선이 자취를 감춘다. 주민들은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염소며 소 같은 가축들을 먹게 된다. 이 가축들은 고등어와 달리 담수를 필요로 한다.
생선초밥의 역설적이고 애절한 운명이다. 아, 불쌍하고 딱한 생선초밥! 요코하마의 몇몇 미식가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 한 몸을 내어주면서 이 참치는 자신이 아프리카의 지하수층을 고갈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니엘 르노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 지구촌 동물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도쿄의 학회에 모인 일본 환경주의자들이 느꼈을 경악과 불편한 심기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구나 이 이야기를 들려준 프랑스 출신 다니엘 르노는 ‘아무나’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농학자이며, 미국 식량농업기구(FAO)의 대지와 물 분과에서 관개 시스템을 담당하는 국장이다.
가상수(virtual water)란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의 총량을 가리킨다. 가상수의 개념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당신은 혹시 모로코가 유럽에 토마토를 판다고 믿고 있는가? 외견상으로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상수 개념으로 보자면, 모로코 왕국은 물을 수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트럭 1대가 토마토 20톤을 싣고 탕헤르에서 에스파냐로 간다고 할 때, 우리는 1백 대의 트럭, 각각 20세제곱미터의 물을 실은 1백 대의 물차가 그 트럭 1대를 뒤따른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20톤의 토마토를 기르기 위해서는 2천 세제곱미터의 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이 계산은 비교적 쉽다. 1헥타르의 땅에서 45톤의 토마토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4천5백 세제곱미터의 물을 주어야 한다).
몇 가지 숫자를 더 소개해보자.
작물 (1킬로그램) | 가상수 (리터) |
우유 | 790 |
밀 | 1,160 |
쌀 | 1,400 |
돼지고기 | 4,600 |
쇠고기 | 13,500 |
고기 위주의 식사를 하는 미국인 한 명은 하루에 5천4백 리터의 가상수를 소비하는 반면, 채식주의자 한 명은 2천6백 리터만을 소비한다. 이는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물의 수요가 늘어난다는 말이다. 주민들이 쌀만 소비하지 않고 고기까지 곁들여 먹게 되면, 물 수요량은 최소한 열배 이상 증가한다.
가상수 개념은 세계 무역의 방향을 잡아줄 수 있다. 아니, 가상수 개념이 세계 무역의 방향을 잡아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물이 부족하다면, 어째서 쇠고기를 수출해야 할까? 세계 수자원 관리 기구 같은 일부 기관들은 가상수의 흐름을 계산했다.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동남아시아는 확실히 물을 수출한다. 지구상의 나머지 지역은 이것을 수입한다.
이와 같은 움직임도 기후 변화라는 변수를 고려해야만 하지 않을까? 마그레브 같은 일부 지역에서 예상대로 물 부족 현상이 한층 악화된다면, 그럴 경우에도 토마토, 아니 토마토의 가상수를 그대로 수출해야 하는 것일까? 물은 어디까지나 지역적인 재화이며, 따라서 세계 물 시장 같은 것은 결코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선초밥의 논리를 적용해보면, 보다 광범위한 전망을 얻을 수 있다. 이번에도 역시 가상이 현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일곱 가지 결론
가깝고도 먼 이 모든 여행으로부터, 직접 눈으로 본 모든 사물들과 만나본 모든 사람들로부터, 머리에 안전모를 쓰고 직접 방문한 모든 공장과 댐으로부터, 크고 작은 운하를 따라 걸었던 모든 산책으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배워간 모든 구름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모든 빗방울로부터, 책을 읽거나 석학, 열성적인 단체 회원, 정치가, 사업가, 어부, 농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서 얻은 모든 교훈들로부터,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들려준 절망과 분노, 체념이 가득 찬 모든 하소연들로부터, 지구촌 곳곳에서 온갖 종류의 메모지에 온갖 종류의 불빛을 벗 삼아 밤이건 낮이건 쉴 새 없이 적어놓은 모든 기록들로부터,
꼬박 2년 동안의 취재가 끝난 지금, 무엇이 남았을까? 내가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한 조금 더 내밀한, 내밀하기 때문에 걱정스러운 지식이 남았다. 그리고 일곱 가지의 확신도 따라왔다.
하나, 모든 인류의 시초에는 물이 있었다.
모든 존엄성과 건강, 교육, 발전의 시초에도 물이 있다. 중요한 순서대로 말하자면, 그 어느 것도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보다 우선하지 않는다.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배수로 설비가 전제되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물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무능력과 해당 정부의 무관심만큼 죄스러운 무기력이란 있을 수 없다. 2000년 9월 189개국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하게 선포된 새천년 목표는, 내용으로 보자면 사실 소박하기 그지없다. 2015년까지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 배수 설비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지 못한 사람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자는 것이 골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소박한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할 것임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몇몇 국가에서 제공하는 발전 지원금의 5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만이 물 문제 해결에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가장 중요한 물 문제를 제치고 다른 부문에서의 사업이 항상 우선권을 얻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대응이 늦어질 경우 미래에 재앙이 닥칠 것이 뻔한데도, 어째서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90억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미래의 농업이 필요로 하는 여분의 물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배수 설비의 확산 없이 도시 인구가 두 배씩 늘어난다면, 그들은 얼마나 거대한 시궁창에서 살아야 할까?
둘, 물은 자연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수자원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오염 제거 기술만 믿고 환경오염 문제를 경시하는 사람들은 돈 먹는 하마, 아니 그보다 더 고약한 무책임한 사람들이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수원지 근처에 살 수 있는 운 좋은 사람은 극히 드물며, 비란 녀석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 딱 맞춰서, 원하는 양만큼 떨어져줄 정도로 심성이 착하다고 할 수 없다. 또한 거대한 대도시로만 자꾸 몰려드는 주거 형태도 물 공급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이는 천연적인 수원지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주거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은 자연의 선물이라는 말은 이제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 물은 일정한 공정을 거쳐 제조되는(각종 처리 과정) 생산품인 동시에 공공서비스(보급)로 간주해야 한다.
생산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보급하는 데에는 당연히 비용이 든다.
비용을 책정할 수 있는 재화는 더 이상 무료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재화가 물이라면, 우리가 사는 데 가장 필요한 물이라면, 그 재화는 반드시 공유되어야 하는 공공재이다.
셋, 모든 물은 장소와 연결되어 있다.
이 지구상에서 물은 매우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물은 무거우면서 상하기 쉽기 때문에 세계 물 시장 같은 것은 원초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따라서 물에 관한 모든 수요는 지역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아울러, 어느 곳에나 들어맞는 기술적인 해결책도 있을 수 없다. 나쁜 댐이 있는가 하면, 아주 훌륭한 댐도 있다. 바닷물에서 염분을 제거하는 방식이 어느 곳에서는 생태계에 위협이 되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생태계에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으면서 대체 불가능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지리적 여건에 달려 있다. 전 지구적인 진보란 결국 지역적인 진보를 더한 값에 지나지 않는다. 물을 절약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교육적으로 매우 유용하지만, 실제로 캐나다 사람들이 물을 덜 쓴다고 해서 마그레브 지역 사람들이 물 고통을 더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전반적인 물 위기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후 온난화는 오히려 지역에 따른 격차를 극단적으로 삼화시키면서, 전체적인 세계 강우량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다. 인구 폭발에 따른 국지적인 갈등이 증가할 것이다. 지금과 똑같은 나일 강으로 어떻게 2025년에 에티오피아인 1억 2천만 명, 수단인 7천만 명, 이집트인 1억 5천만 명에게 물을 공급해줄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이들을 먹여 살릴 식량 생산에 필요한 관개용수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인가?
넷, 물은 생명의 원천이라는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이중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정치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부 관계 당국(국가, 지방, 도시, 그 어떤 수준의 단위라도 상관없다)은 민간 기업에게 물 경영권을 이양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선택의 문제이다.
다만 이양 과정의 투명성, 정직성, 민주주의 수호 의지 등이 지금보다 훨씬 제고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공기업에서 운영하는 편이 민간 기업에 이양하는 편보다 언제나 더 낫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행정 기구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질병, 즉 조직의 비대함, 책임 부재, 선거로 선출되는 정치인들의 입김, 유권자 눈치 보기 등의 병폐를 잠시 망각하는 것이다…
반면, 민영화만이 살길이라는 듯이 서둘러서 공공 서비스를 민영화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익을 극대화한다는(이로부터 줄기찬 요금인상 압력이 생긴다) 민간 기업들의 존재 이유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설비 투자 문제에서라면, 공기업 쪽이 유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공 기관은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에는, 다시 말해서 장기적인 투자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강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실을 놓고 보면, 이와 같은 믿음을 저해하는 행태도 자주 눈에 띈다. 만일 민간 기업이 30년간의 의무 계약을 체결했다면, 계약 기간 동안에는 당연히 상수도와 하수도 등의 배관 설비를 유지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임기가 끝나가는 시 행정 팀에게는 설비 투자 비용을 아끼려는 유혹이 강할 것이다.
물에 관한 한 민간 이양이라면 절대 반대하고, 모든 사업을 공공 기관에서 관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1990년대에 정점에 도달한 민간 설비 투자는 현저하게 후퇴 중이다. (균형 잡힌 판단을 돕기 위해, 참고삼아 말하자면, 지금까지 민간 기업이 공급한 물은 지구 전체를 놓고 볼 때, 7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다국적 기업들의 자본은 물보다 훨씬 위험도가 낮은(그러니까 덜 근본적인) 부문으로 향하고 있다. 상수와 하수 사업에 투자가(공공 투자이건 민간 투자이건) 시급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 같은 후퇴 양상을 과연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인지 묻고 싶다.
요컨대 기적적인 해결책은 적어도 물과 관련해서는 나타나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니 각 지방자치단체 수장들이 알아서 현명하게 판단할 일이다. 이들의 선택이 가장 투명한 가운데 실현되도록 최종적으로 인가하는 것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물을 나눠 쓰는 방법을 익히는 것은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에 도달해야만 하는 우리 처지로서는 이 같은 배움이 더더욱 유효적절하다. 물 없이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뻗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럴 수 있는 직종도 거의 없다. 프랑스의 지역 수자원 관리 기구들로부터, 안데스 산맥 지역 원주민 단체, 인종차별 정책 이후의 림포포 강 역할을 논의하는 기구에 이르기까지 치수 문제는 하루가 다르게, 위기를 극복할 때마다 민주주의를 새롭게 정의하도록 이끄는 놀라운 실험실이며 용광로이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물 문제는 중요성에 비추어 합당한 자리, 즉 스포트라이트가 환하게 비추는 사회의 최중심이 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물 문제는 우리를 거북하게 만들고,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중에서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림자 같은 어둠이 드리운 밀실에서 혼자 결정하는 편이 훨씬 더 간단한데 말이다!
물을 공평하게 나눠 쓰는 일에는 전제 조건이 따른다. 각자의 물 소비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식이 없다면, 모순되지만 정당한 서로의 요구를 어떻게 조정하겠는가? 계량기 설치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끄럽게도 체제의 불투명성을 약삭빠르게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오직 순진한 사람들만(어쩌면 멍청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이 같은 무질서와 혼돈의 덕을 보는 것은 가장 돈 없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다섯, 두 가지 잘못된 선호 사상은 큰 폐해를 낳는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는 대통령, 장관, 또는 시장들이 너무 많다.
첫째,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 선호한다. 눈에 보이는 해결책(모든 언론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성대하게 거행하는 각종 설비의 준공식을 상상하면 된다)을 이보다 돈도 훨씬 덜 들면서 훨씬 더 효과적인(하지만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따라서 TV 화면에 소개될 수도 없는) 절약과 재활용 전략보다 선호한다. 둘째, 물을 똥보다 선호한다(솔직히 이 점에서만큼은 누가 감히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하수도 설비는 모르는 체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 무료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연대의식을 키우자.
물은 생산하는 데 비용이 들기 때문에 공짜가 될 수 없다면, 물에 합당한 가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물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와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공동체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의식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적어도 하루에 50리터의 물, 즉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은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정책은 천연자원이라는 물의 습성(이는 생각만큼 그렇게 명백하지 않다)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생명의 관계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최소한의 물마저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살인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일곱, 비록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기질을 타고난 여행객이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내부에서 한 가지 불안이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오염, 과잉 생산, 토양 부식, 과도한 도시화. 도처에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줄어들고, 토양은 지쳐간다.
우리는 어디에서, 무슨 땅에서 90억 인류를 먹여 살릴 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세계적인 물의 위기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땅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
『물의 미래』에서 전재 (에릭 오르세나, 김영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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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에릭 오르세나 (Erik Orsenna)
대학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런던 정경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제1대학과 고등사범학교에서 국제 금융과 개발 경제학을 강의했다. 1981년 국제협력부 고문을 맡아 사회당 정부와 인연을 맺었으며, 정확한 불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미테랑 대통령의 문화 보좌관 겸 연설문 초안 대필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고행정재판소 심의관, 국립 고등조경학교 학장, 국제해양센터 원장 등을 지냈으며, 1998년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다. 저서로 로제 니미에상을 수상한 『로잔에서 산 것과 같은 삶』, 공쿠르상을 수상한 『식민지 전시회』를 비롯해, 『로욜라의 블루스』, 『어떤 프랑스 희극』, 『큰 사랑』, 『아홉 대의 기타로 엮은 세계사』, 『새들이 전해 준 소식』 , 『문법은 감미로운 노래』 , 『두 해 여름』 , 『코튼로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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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양영란
번역가. <코리아헤럴드> 기자와 <시사저널> 파리 통신원을 지냈다. 옮긴 책으로 『잠수복과 나비』, 『테오의 여행』, 『식물의 역사와 신화』, 『현장에서 만난 20thC: 매그넘 1947~2006』, 『환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코튼로드』, 『탐욕의 시대』, 『빈곤한 만찬』 등이 있으며,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김훈의 『칼의 노래』를 불어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