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이우환의 에세이집 『시간의 여울』에서 글 한 편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이우환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스물한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까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술가입니다. 또 이우환은 철학을 전공한 미술대학 교수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시간의 여울』은 1987년 일본에서 처음 출판된 후 세 번째로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는 책입니다. - 편집자
마야의 집은 농가다. 파리로 그녀를 그림 공부하러 보낼 정도면 인도에서는 꽤 깨인 집안일 것이었다. 예외 없이 그녀의 집도 가족이 많다. 조부모, 부모, 네 명의 숙부와 다섯 명의 숙모, 두 명의 오빠, 다섯 명의 동생들, 숙부들의 열한 명의 아이들, 네 명의 하인… 이십여 명이 두 개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매운 음식 탓일까, 더운 기후 탓일까, 나만이 온통 땀범벅이 되어 머리에서 김이 오를 것 같은 느낌이다. 많은 손가락들은 쉴 새 없이 절묘한 손놀림으로 밥을 집고 카레를 묻혀 즉시 입으로 가져간다. 커다란 유리그릇에 담긴, 갠지스 강의 어떤 지역에서 길어 왔다는 성수인가 하는 것을 번갈아 돌려 마서가며 식사는 진행되어 간다. 나는 더러운 내 손이 마음에 걸렸지만 빨리 잊기로 했다. 모두가 다 같이 손을 집어넣고 있는 핑거볼만은 사용하고 싶지 않다. 내게 있어서 매운 향신료나 그 강한 향은 양념이라기보다 소독제로 여겨져 온다.
맞은편의 아이들은 반창고가 그대로 붙어 있는 손가락으로 음식을 마구 휘젓고 있다. 내 옆의 남자는 얼굴도 손도 부스럼투성이로, 혹시 불치의 피부병 환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모두는 한 그릇에 담긴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먹고 함께 마신다. 야채에 묻은 진흙이나 음식에 모여 있는 파리를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나뿐인 모양이다.
여기에서는 위생 관념이란 것이 거의 성립될 것 같지가 않다. 약간의 불순물로 위장이 망가질 정도라면 어차피 그 정도의 생명력밖에 없다는 것이리라. 위생 관리라는 말은 일종의 도시 문명인이 만들어낸 무잡균(無雜菌) 인간의 대사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 같은 자는 이미 인공적으로 순수 배양된 진공관 속의 존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여기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남이 입 댄 컵을 다시 씻어서 차를 준다든가, 아무도 손대지 않은 밥상을 자기 혼자 받도록 한다든가 하는 일은 아마도 이 세상의 소외자,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받는 비참한 대우임이 분명하다.
입장이 다르면 당연히 인간의 가치관도 변한다. 이런 시골에 있으니 도시인은 정말로 깨끗함을 좋아하는 걸까라는 묘한 의문이 샘솟는다. 하루에 몇 십 번씩이나 수도꼭지를 틀어 손이며 얼굴을 씻고, 매일 밤 목욕탕에서 온몸을 박박 밀어대고 있는 모습―.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실로 꼴사납고 불결한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강렬한 비눗물과 깔끔한 새 타월로 씻고 닦아내고 하는 것은 세균이나 땀이나 때나 먼지뿐만이 아니다. 모르는 사이에 달라붙은 타인의 냄새, 싫은 말, 불가해한 공기 등, 자신 이외의 모든 것 일체이다. 잘 청소된 로봇마냥 씻고 또 씻어, 신체도 관념도 모두 밋밋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도쿄의 어떤 친구는 결벽증이 지나쳐, 거리를 걷고 있으면 가끔 구토증이 일거나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다고 한다. 타인이 내뱉은 공기를 들이마시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이 알 수 없는 물체나 관념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란다.
꼭 그 친구뿐만이 아니더라도, 많은 도시인들은 일 년 내내 병원을 들락날락하느라 바쁘다. 병이라는 이름의 곤란한 난입자, 그 포용할 수 없는 타자를 약이나 메스나 방사선 따위로 제거해가면서 철저히 세계로부터 몸을 지키고자 안달복달한다. 이리하여 건강이란 정확하게 컨트롤된 정신, 확실하게 관리된 신체를 말한다. 이 우주는 어디를 가더라도 모두 명명백백한 공간 시간으로서, 내 손바닥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다.
파리에서 알게 된 마야의 생가에서 체험한 점심 식사는 인도의 이미지를 더할 나위 없이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녀의 배려로 듬뿍 위장약을 먹은 뒤, 구토증을 억눌러 가며 산보에 나선다. 신비로운 보랏빛 눈과 입술을 가진 아름다운 그녀의 손짓을 따라 모래길을 잠시 걸어 나가니 강이다. 눈앞에 장대하게 펼쳐지는 갠지스 강의 흐름과 목욕 광경이 나타났다. 아이들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몇 백이나 되는 남녀가 강물에 온통 잠겨 있다.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사람, 반쯤 벗고 있는 사람, 벌거숭이 아이들, 손을 모으고 뭔가 읊조리면서 고개만 수면 위로 내놓고 있는 사람, 여럿이서 물을 서로 끼얹어주고 있는 노인네들, 모친에게 몸을 씻기고 있는 어린 나병 환자… 느릿한 보랏빛 흐름에는 개나 쥐의 시체와 함께 때때로 인간의 시체도 섞여 있는 듯하다. 인분이니 토사물, 천 쪼가리, 종이 쪼가리에다 악취를 내뿜는 정체불명의 쓰레기들이 계속 눈에 들어오고, 바라보면 볼수록 이 세상의 강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황당한 흐름이다.
아무리 호기심이 강한 나라고는 해도, 아무렴 이 강에 잠겨 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미인으로부터, 갠지스에서의 목욕이야말로 진정으로 인도를 경험하는 일이랍니다, 라는 말을 들어도 내게는 도저히 무리한 권유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 몸이 무균 상태에 가까운 탓만은 아니리라. 세계를 향해 항상 열려 있을 터인 관념의 문은 마치 갠지스의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고 있는 양, 물 한 방울 들여보내지 않는 완벽함으로 꼭꼭 닫혀 있다. 머리로 아무리 동경하거나 이해한 것 같아도 그것은 자신의 몸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이 강물에 뛰어든다 한들, 거절의 관념을 찢어버리고 강 그 자체를 내 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진정으로 목욕의 의미를 깨닫는 일은 불가능하리라.
눈앞의 멱 감는 이들은 무조건적으로 행복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이 흐름 속에 감사하는 기분으로 몸을 드러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떠 마시며 조금도 더럽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 물로 몸을 정화함으로써 마음이 더없이 맑아지고 영혼을 구원받는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강은 신앙 이상의 세계, 말하자면 생명 그 자체다. 사람들은 강의 자식들, 강의 분신이라는 것일까. 좀 더 말한다면 강과 인간은 자기 동일이며 강안에 인간이 있고 인간 안에 강이 있어서 안팎의 구분은 없다. 곧, 이 우주는 물로 이루어져 있어 그 흐름 속에 자신이 있고, 또 그 몸 안에도 강이 흘러 들어가 그것이 다시 바깥 강으로 되돌아가고, 또다시 체내로 흘러 들어오고…
삼라만상이 이 강과 이어져 있어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영구히 강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방치된 해방의 자유감보다 은총과도 같은 구속의 합일감이야말로 기쁜 것이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물인 이상 언젠가는 갠지스 강으로 돌아온다. 실제로 강 건너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며 죽은 사람을 태우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재를 강에 흩뿌린다지 않는가. 갠지스의 사람들은 강과의 일체감이 있어서, 듣도 보도 못한 사람도 쥐의 시체도 죽음을 가져오는 세균도 모두 내 동포임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사람들은 항상 돌아 갈 곳을 가지며 도피나 거부를 모른다. 여기 사람들은 삶도 죽음도 인간의 명운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내 생명은 유구한 갠지스의 흐름에 있어 영원함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건 그렇고 내 안의 내면을 이루는 강은 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체내에 흐르고 있는 수돗물이 과연 갠지스와 이어져 있을지 어떨지 의심스럽다. 혹 이 명명백백한 수돗물은 어느 강에도 흘러 들어가지 않고 내 몸을 지나 모조리 하수도나 화장실이라는 관념의 단어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있지나 않은지.
나는 진심으로 말하자면,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구별됨으로써 내가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다. 아무리 번지르르한 말을 해 봤자 밖은 밖, 안은 안, 앞은 앞, 뒤는 뒤로서, 내가 너고 너가 나인 것 따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있을 만한 짓거리가 아니다. 비록 육체관계를 갖는 부부나 연인끼리라 해도, 둘 사이는 무색무취의 반짝거리는 플라스틱 인형들의 부딪침 비슷하여 무엇 하나 서로 교류하는 매개물은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에 반해 그녀의 친절은 마약처럼 나를 저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고 내 전부를 파괴한다. 그녀의 사라사에 닿거나 눈길을 받고 말소리를 듣고 가까이서 숨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난다. 사랑이나 육욕의 유혹 때문이라기보다 거절을 넘어 쳐 들어오는 인도라는 어찌할 수 없는 우주감宇宙感에 당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야의 배려와 농후한 체취에 감싸여 내 방위 본능은 점점 마비되어 간다. 빨리 여기에서 도망쳐 나가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산산조각으로 해체되어버릴 것만 같다. 이런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나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거의 화장실을 떠날 수가 없었다. 심한 구토증과 설사에 시달린 탓이다. 내가 세계를 구축할 힘을 잃은 것인지, 세계가 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튼 간에 인도에서 먹고 마시고 한 것 전부가 위로 아래로 한 방울도 남김없이 쥐어짜져 나온다. 뱃속에 고였던 것은 거의 다 나왔을 텐데도 여전히 구역질이나 설사는 멎지 않는다. 인도라는 세계의 편린조차 내 안에 머무르지 못하게 할 작정인가 보다.
빨리 일본에 도착하지 않으려나 하고 기분이 초조해진다. 이미 인도로부터는 상당히 먼 상공을 날고 있을 터이다. 가까스로 화장실에서 나와 창문을 내다보자 뭉성뭉성한 구름만 가득하여 어쩌면 이제 곧 일본 열도의 상공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비행기의 행선지인 도쿄는 진정 내가 돌아가는 곳인가. 아니, 아마도 나는 아무 데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인도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돌아간다고 하는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이란 존재가 뚜렷하게 떠오른다. 더 말해버리자면 자연 속에도 인간 속에도 살 만한 곳 따위는 있지도 않다. 자연과의 인간과의 사물과의 어울림은 나를 초조하고 피곤하게 한다.
나는 살아도 죽어도 외톨이로 어딘가 도중에서 휙 하니 사라질 수밖에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사람들이 버글대는 대지를 밟아도, 나는 자신이 세계의 한가운데 있음을 깨닫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 누구와도 진정한 접촉 따위는 가지지 않은 채 나날을 깨끗하게 살아갈 작정으로, 마치 진공 지대를 홀로 가듯 천애고아를 가장하며 계속 걸어갈 것임이 분명하다. (*)
『시간의 여울』에서 전재 (이우환, 현대문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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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우환
1967년 동경 사토화랑에서 새로운 시도에 의한 개인전 이후 전위적인 예술표현을 추구하면서 국제적으로 활약했다. 1968년경부터 일어난 '모노파' 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로 알려졌으며, 파리비엔날레, 캇셀도쿠멘타 등 다수의 국제전에 출품했다. 루이지아나 근대미술관, 파리 국립 쥬드 폼 미술관, 본 시립미술관(Kunstmuseum Bonn) 등 내외 주요 미술관에서 많은 개인전 개최했고, 유네스코미술상, 호암상, 세계문화상 외 여러 미술상을 수상하였다. 파리 에콜 드 보잘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1973년부터 동경 다마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자 소개
남지현
학창시절의 일본 체류를 계기로 일본문학에 심취, 대학 졸업 후 증권회사 국제부에서 근무하다가 도불, 소르본 대학과 파리 3대학에서 어학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주로 미술 분야의 번역을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