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스탠리 코언의 최근 저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서 발췌한 글을 에세이로 소개합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꿈꿀 필요가 있다」는 아래 본문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 편집자
어떤 사회에 존재하는 ‘시인’(是認, acknowledgement)의 총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측정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시간에 따른 변화양상이나 서로 다른 사회들을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권침해에 대해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반응을 결정할 수 있는 공식을 개발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달라이 라마와 넬슨 만델라가 공동의장을 맡은 ‘국제좋은사람들위원’[가상 단체]에서 인권침해와 인간고통에 관한 보편적 척도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사법부의 양형 기준처럼, 이 척도에서의 각 점수는 인권침해에 대한 적절한 (필수적) 반응 수준을 나타낸다. 예컨대 A2 수준의 인권침해(예, 평화적 시위자 10~15명이 사살되고, 5~10명이 최루탄으로 실명하고, 적어도 30명 이상이 자의적으로 체포됨) 또는 B3 수준의 인간고통(예, 난민촌에서 하루에 200명 이상이 이질로 죽어감)에는 ‘인간 존엄성의 리히터 지수’에서 6점에 해당하는 시인과 대응조치가 나와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 하지만 이러한 프로젝트는 진지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 인권침해의 평가는 주관적이며,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는 행위이다. 동일한 가치관을 지닌 좋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정반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부인’(否認, denial)의 경계선을 매우 상이하게 설정할 것이다.
아렌트의 ‘최소주의’(minimalism)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렌트는 유대인 유격대원들을 도왔던 독일군 하사(나중에 체포되어 처형됨)의 사례를 논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왜 그런 사람이 그토록 적었던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두려운 상황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조건에 순응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의 최종해결책이 제시되었던 나라들 중에서, 대다수의 경우 ‘유대인 최종해결책이 실시될 수도’ 있었겠지만, 모든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것 이상의 행동이 요구되지는 않으며, 상식적으로 이것 이상의 행동을 요구할 수도 없다.”
이보다 더 높은 목표를 지향하는 정치철학자들도 있다. 게라스는 유럽 점령지에서 유대인을 도운 구조자들을 일종의 대안적 윤리 지평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구조자들처럼 타인의 안전을 위해 사회 전체가 책임감을 느끼는 도덕적 문화를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위험에 처하거나 고통받는 타인을 도와야 할 의무가 강력한 도덕적 요청으로 통용되는 전지구적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또한 대체 어떤 나라에서, 뿌리깊은 수동성에 대한 수치심을 ‘사회생활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동원규범’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현실적 유토피아를 꿈꿀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사람들의 ‘부인’을 비판하는 것이 너무 엄격하고 너무 자기중심적일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가 기대하는 ‘시인’―사실을 알아보고, 눈을 뜨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순응하지 않고, 어떤 행동이든 취하고, 내부고발을 하는 것―이 너무 높은 기대일지도 모른다. 사악한 사람들―인권침해를 계획하고 실행하거나, 타인에게 고의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사람들―이 소수에 불과하다면, 자신의 일생을 인권을 옹호하고 인간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바칠 수 있는 시간, 정력, 의지를 가진 사람들 역시 소수에 불과하다. 그 중간 어디쯤에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공적으로 어떤 행동에 나서기가 어려운 사회가 많다.
대다수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역사를 창조’하는 것보다 ‘생계를 꾸리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법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문자 그대로 ‘잔대가리’들로 통하는 ‘로쉬 카탄’(rosh katan)이라는 상태에 의지한다. 너무 큰 문제로 골치를 썩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보통 서민들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인도적 대의명분에 평생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운 좋은 사람들(그리고 흥미있고 보람된 일을 하면서 적당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행동이라도 취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그리고 나 같은 학계의 동조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든 취하라고 할 때 그 ‘어떤’ 것이 어느 정도인가? 살라께뜨는 말한다. “법에서는 보통 시민들에게 준법 시민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보통사람들에게 영웅이 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정의는 분명 법 이상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훌륭한 시민성’(good citizenship)이라는 상태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영웅적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더 고귀한 상태를 말한다. ‘훌륭한 시민성’이라는 덕목은 거창한 영웅적 행동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침묵을 장려하지도 않는다.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서 전재 (스탠리 코언, 창비, 2009)
★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머리말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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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
현재 런던정경대학(LSE) 사회학과 명예교수이다. 인권, 사회통제 및 일탈이론의 세계적 권위자이며, 인권사회학과 정치범죄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영국의 더램대학과 에씩스대학 교수, 예루살렘의 헤브루대학 교수 및 같은 대학 형사정책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팔레스타인 주민 인권운동의 핵심 인물이었고, 제네바 소재 국제인권정책협의회의 설립을 주도했다. 저서로 『대중의 적과 도덕적 공황』(Folk Devils and Moral Panics), 『사회통제의 비전』(Visions of Social Control), 『범죄학의 거부』(Against Criminology) 등이 있다.
역자 소개
조효제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국제 NGO 및 인권 분야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인권의 문법』(2007), 『인권의 풍경』(2008)이 있으며, 편ㆍ역서로 『직접행동』(2007), 『세계 인권 사상사』(2005), 『전 지구적 변환』(2002), 『NGO의 시대』(200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