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작정 시골 땅으로 돌아가 15년째 살고 있는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 낭만적인 전원이야기가 아니다. “개개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현대문명’과 ‘자본주의’라는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저자는, 과학기술 시대를 살면서 그들 식대로 고민하고 걸어간 길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농사짓기’, ‘학교에서 벗어나기’, ‘병원에 덜 의존하기’, ‘자발적 가난뱅이가 되어 없이 살기를 실천해보기’…. 세 모녀가 겪어내고 살아낸 변화와 고투의 기록 앞에서, 여전히 의존적인 내 삶이 한없이 겸손해진다. - 나비
내가 땅 앞에 겸손해진 이유
농촌에서 태어난 내가 도시로 갔던 것은 순전히 나 혼자만의 선택이었을까? 내가 태어난 1960년대와 학교를 다닌 1970년대 1980년대를 생각해본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우리는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박정희 식의 위대한(!) 국가 프로젝트를 철저히 수행해야만 하는 무수한 톱니바퀴들 같은 존재들이었다.
젊고 능력이 있으면 고향을 떠나 도시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돈을 버는 것이 당시에는 거의 유일한 ‘성공’의 기준이었다. 다른 대안을 들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반란을 모의하려 해도 혁명을 하려 해도 도시에 가야 했다. 시골에서 태어난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개발, 출세, 성장 귀신이 쓰여서 도시로 가는 물결에 휩쓸렸고, 나도 그랬다.
농촌은 우리가 버리고 떠나야 할 곳이었다. 그래야 이농한 노동력들이 값싼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근대 국가 건설의 역군’으로 불철주야 일해서 대한민국을 부유하게 할 자동차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들지 않겠는가. 그게 시대 흐름이었고 근대화와 산업화란 것은 그런 것이었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조금이라도 도시에 나가 살 능력이 있고 학교 공부를 잘하면 너도나도 고향을 떠났고, 떠나고 있다. 남아 있으면 못난 바보 취급한다. 농촌은 도시를 위해서 끝까지 착취당해야 하는 식민지일 뿐이다. 인간이든 땅이든 식량이든 모두 그렇다. 자기가 태어난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기도 전에, 마치 새벽녘에 남루한 사내가 창녀촌을 서둘러 벗어나듯이 우리는 시골을 벗어났다. 그리고 어쩌다 시골에 올 때는 땅 투기꾼이라는 기둥서방 혹은 부재지주라는 포주가 되어 거들먹거리며 나타나곤 한다.
상급 학교 진학 때문에 도시로 갔던 내 경우를 떠올려본다. 고등학교 이후부터 내 삶은 어느 시기까지 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따라갔던 삶이었다. 분명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태어난 땅은 떠나고 잊어버리면 되는 곳이었다. 나는 도시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두둑한 보수가 보장되는 성공한 사람이 되면 그만이었다.
나는 혹시 이런 암시를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최고 교육을 받고 무엇이 되건 간에 성공만 하면 되고, 그 성공은 너의 개인적인 삶을 위해서 맘껏 쓰면 된다고. 네가 받았던 교육을 네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위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고향에 자선을 좀 베푸는 거야 좋은 일이겠지만 너의 출세는 너의 안위를 위해 쓰라는 암시 말이다.
물론 나는 도시에서 성공하지 못했고 으스댈만한 출세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퍽 안도가 되는 일이다. 독자 중에 못 믿겠다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 삶에서 그나마 자랑스레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성공하지 못했고 물질적 욕심을 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만약 도시에서 성공했더라면 나 역시 시골에 꼭 농사짓겠다고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내 삶에서 아주 귀한 깨달음을 놓쳤을 터였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나도 아직 젊음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때 땅에 깃들어 살겠다고 한 결정은 참으로 잘한 일 같다. 그러니까 이 체제 속에서 한 자리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한테는 아주 귀한 약이 된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없이’ 겸손해져서 이 지구에 해를 덜 끼치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귀한 장점이다.
도시에 간 나는 가난한 집에 손 벌릴 수 없는 자가 겪어야 하는 갖가지 경우의 수를 밟으며 청춘을 보냈다. 운 좋게 주어지던 장학금들, 과외 아르바이트 일들, 임시직일들로 생활비를 벌면서 대학을 졸업했고 기숙사, 자취방, 더부살이, 반지하방, 옥탑방, 지상의 방 한 칸, 낯선 외국 대학 기숙사 등으로 옮겨 다니다 보니 3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넉넉하게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기죽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아마 젊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름답던 청춘의 힘이 내게도 있었다. 또 당시에는 지금처럼 극성스런 배금주의가 지배적이지 않은 분위기였고, 이상을 가진 좋은 이들과 친구하며 살았던 것도 내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인생의 쓴맛을 꿀꺽 삼킨 상태로 시골로 왔다. 이리저리 고민하고 결정했다기보다는 막무가내였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삶의 터를 도시에서 시골로 옮기려 할 때면 누구나 여러 가지 고민과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돈은 어떻게 벌 것인가, 어떤 생활수준을 유지할 것인가,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요모조모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뭔가를 준비할 여유도 없었고 누구랑 상의하고 말 것도 없었다. 인생의 큰 전환기였는데 아이들 빼고는 가진 게 없다 보니 머리가 텅 빈 바보처럼 스스럼없었다. 그때는 아직 ‘귀농’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전이었다.
처음 내가 어린 자식과 짐을 푼 곳은 농사짓는 공동체였다.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골이라서 기뻤다. 찢어진 비닐이 펄럭여도 농약으로 오염된 땅이어도 무엇인가를 심고 가꾸고 기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조건 좋았다. 당시의 내게 기뻐할 능력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신기했다.
그곳에서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둘째를 낳았다. 고맙게도 시골 살면서 많은 분들의 넘치는 도움을 받았다. 정말 감사한다. 힘든 시기마다 세 모녀가 어떻게든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매 시기마다 우리를 사랑하고 도와준 그분들 덕택이다.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 번 정도 이사를 다녔다. 전부 작은 시골 마을들인데, 아는 분의 호의로 거저 빌린 임시 거처도 있었고 약간의 돈을 주고 빌린 허름한 농가들도 있었다, 집주인이 빚 때문에 야반도주한 후 수년 동안 방치된 폐가를 무료로 빌려서 고쳐 살기도 했다.
늘 주머니가 가벼웠기에 고생은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하다고 여겼다. 돈쓰고 소비하는 식의 생활은 거의 해보지 못했다. 그런 욕망 자체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책을 맘껏 사보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은 많았고, 도시에서 열리는 좋은 음악 공연 같은 것들을 가끔씩 그리워하긴 했다. 그럴 때는 문화적 사치이고 허영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어찌 보면 고립되고 폐쇄적인 삶이었다. TV도 없었고, 신문도 안 보고, 라디오조차 안 듣고, 영화 같은 것은 정말이지 전혀 보지 않았다. 인터넷 같은 것도 당시의 내겐 먼 나라의 일이었다. 세상일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시기였다고나 할까. 오직 땅과 아이들, 농사짓고 살아가기, 이런 것들만이 내 관심사였다. 이 땅이 내게 허락하는 것이 무엇이고 거절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걸 배우고 싶었다.
어쩌다 너무 고독해져서 우울함이 치밀고 올라오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는 애꿎은 어린 아이들에게 온갖 신경질을 부려댔다. (정말 부끄럽다!) 신경질이 가라앉으면 죄책감으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해답 없는 고민을 했더랬다.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을 하거나 좋은 책을 찾아 읽으며 위로를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어딜 가든 집 주변에 푸성귀를 기를 만한 너른 텃밭이 있었고 오밀조밀한 산과 들이 있었다. 어린 자식들과 손잡고 시골길과 산길을 걷거나 텃밭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 평화롭고 행복했다. 산길을 걸으며 내 어린 시절에 불렀던 동요들을 아이들과 큰소리로 함께 부르며 웃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대담하게 꽤 큰 밭을 빌려서 온갖 농작물들을 조금씩 심어보는 재미도 누렸다. 덩달아 내 안에서도 신경질과 두려움과 우울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세월과 함께 조금씩 걸러져 나갔다. 이런 걸 두고 요새 유행하는 ‘치유’라고 하나보다.
아이들도 자랐다. 세 모녀가 아옹다옹 치고받고 싸우다 보니 아이들은 무럭무럭 쑥쑥! 나는 흰 머리가 하나, 둘, 셋, 넷, 우수수! 그렇게 세월은 강물처럼 무심히 흘러갔고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 실력도 조금씩 늘어갔다.
미래를 먹는 인간
팀 플래너리란 고생물학자는 이 지구에서 멸종한 동물들을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인간을 ‘미래를 먹는 존재(Future Eaters)’라고 불렀다. 인류가 환경의 일부로 살아가기보다 환경을 지배하면서 중요한 자원의 기반을 잠식해가는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나도 이런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우리 인류는 풍요로운 생명의 나무에서 다른 생명의 존재들과 어느 시기까지는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 깔깔대며 사랑도 하고 서로의 몸에서 이도 잡아주고 말이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자기 발밑의 나뭇가지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무슨 이익이 있었나 보다. 그러자 너도나도 자기의 발밑 가지를 자르더니 곧 남이 앉아있는 가지까지 자르려고 덤벼들었다. 이것은 순식간에 유행이 되어 버렸고, 이제 사람들은 이 일에 너무나도 열중하고 있다. 많은 가지가 잘려 나갔고 누군가는 아래로 떨어졌다. 저 아래의 캄캄한 허공을 얼핏 본 몇몇이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쳤지만 대다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시끄럽게 왜 소리치고 난리야? 남들 다 하잖아!
미래를 먹는 습관은 현대 인간의 거의 보편적인 특성이 되어 버렸다.
이런 걸 두고 ‘대중의 패닉 상태’라고 하는 것일까? 자기 혼자만 소외될까 봐 두려워서 옆 사람이 누구든 그 행동을 미친 듯 따라하는 군중의 맹목적인 모방행위 말이다. 네가 가면 나도 가고, 네가 다이어트하면 나도 하고, 지금 유행이라면 한 달 전에 산 휴대폰도 과감히 쓰레기통에 처넣는다. 우린 너무 고독하거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면 뭐라도 할 거야. 소비든 폭력이든 생태계 파괴든 상관없어.
미래를 먹어버린다는 것. 그것은 결국 우리 후손이 살 공간과 자연을 앞질러 파괴해버린다는 뜻이다. 자손을 남기고 번식하고 그 사슬이 이어지도록 애쓴다는 생명의 법칙에도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자살골을 넣으러 가고 있으면서도 환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도시에 나가 살면서 그리고 다시 땅으로 돌아와 살면서도 내 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느낌이 늘 존재했다. 비록 농사를 지으며 개인적인 치유와 작은 만족을 얻고는 있으나 세상이 갈수록 파괴되고 있다는 절박한 느낌을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이다. 나 개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암울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괴로워서 그냥 잊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애써 시를 읽는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중에서
나도 바로 보고 싶다. 사물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이 지구의 생리와 한도와 명석함을 제대로 알고 싶다. 특히 인간의 우매함을 똑바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뭔가를 해야 한다면 그걸 열심히 한 다음에 스스럼없이 미래를 후손에게 남겨주고 싶다. 나도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미래를 먹어치우지 않고 죽을 수가 있을지,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는 미래가 있을지, 정말 고민이다.
하여간 우리는 땅으로 돌아왔고,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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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도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방송 구성작가와 대안학교 교사로 일 했으나, 손에 흙 묻히고 농사짓는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아이들 손에까지 흙을 묻히려고 애쓰는 중년 아줌마다. 학교에 안 가는 두 아이와 산골에서 지지고 볶는 삶을 살면서 흰머리와 함께 비로소 철이 들어가고 있다. 자연이 훼손되는 걸 무척 아파하지만, 그래도 살면서 탐구해볼 거리들이 많아 인생에 대해 두근두근 호기심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여연
학교 안 가고 엄마와 토닥대며 농사일을 해내고 있는 씩씩한 첫째 딸. 클래식 기타 치는 일에 푹 빠져 지냈던 청소년기를 지나 지금은 자기 인생의 길찾기를 하고 있는 열아홉 살 청년이다. 음악, 미술, 과학 분야의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뭐든 배우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하고픈 일도 많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소박한 삶과 분주한 도시의 삶, 모두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하연
학교를 안 다녀서 자기 인생이 꼬였다고 구시렁댈 때도 있지만, 그래서 인생이 느긋하게 피어나고 있다고 싱글벙글할 때가 더 많은 열다섯 살 둘째 딸. 가족들과 깡촌에 처박혀 있음에도 원하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고 떵떵거리고 있다. 그런데 정작 가출하는 곳은 매번 마을 뒷산. 자기가 거느린 식솔들(강아지, 고양이들, 병아리들)이 먹어대는 양식이 엄청남을 깨닫고 작년부터 긴 물장화 신고 가족 손모내기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자연관찰, 동식물 키우기를 비롯해 갖가지 것들에 관심을 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