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7월 곽재구 시인은 타고르의 시편들을 찾아 산티니케탄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벵골어를 익혀 타고르의 시를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겠다는 꿈을 품은 곽재구 시인의 여행은 540일, 46,656,000초가 지나서야 마무리됩니다. 아래 에세이에 소개된 ‘크와이 멜라’는 산티니케탄에서 걸어가기엔 한참 먼 숲속 벼룩시장입니다. 릭샤왈라(인력거꾼)가 신나게 페달을 밟아 데려다준 크와이 멜라에서 시인은 열 살 소녀의 ‘마법의 보따리’를 만납니다. 시인 가슴에 깊은 탄성을 울린 벵골 소녀의 보따리 이야기를 에세이로 소개합니다. 에세이 다음에는 이 여행기의 서문(책머리에)이 선물처럼 덧붙여져 있습니다. - 편집자
크와이에 있는 벼룩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산티니케탄 사람들은 벼룩시장을 새터데이 마켓이라고도 부르고 크와이 멜라라고도 부릅니다. ‘멜라’는 축제의 의미와 전시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벵골어입니다. 새터데이 마켓보다는 크와이 멜라 쪽이 내게는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군요. 크와이는 숲으로 둘러싸인 평지의 이름입니다. 옆에는 작은 강물도 흐르고 있습니다. 평상시 이 강물에는 소들과 사람들이 함께 목욕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강물을 따라 붉은 황톳길이 죽 이어지는데 숲과 강물이 함께 어울린 이 황톳길을 릭샤(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문득 이 여행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호사스러운 여행인가 하는 생각이 우련 듭니다. 릭샤왈라(인력거꾼)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 페달을 밟고 여행자는 시원한 바따쉬, 바람를 맞으며 숲과 강물과 황토가 빚어내는 고요한 빛의 멜라 속으로 젖어드는 것입니다. 멀리 나무숲 사이로 선홍빛과 노란빛의 사리를 입은 농가의 아낙이 염소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릭샤왈라는 왜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야 하고 나는 선선하게 바람과 빛을 즐길 수 있는가, 하는 심란한 생각에서 잠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크와이는 인도적인 빛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의 이름인 것입니다. 일찍이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또한 이곳의 빛을 인식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산티니케탄의 타고르 박물관에는 타고르가 그린 그림들의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두 그루의 거친 나무가 서 있는 수묵화풍의 그림에 <크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숲속에 벼룩시장을 마련한 사람들의 속내에는 타고르의 그림에 대한 이네들의 존경과 애정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크와이의 강변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타고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농촌 공동체인 아마르 꾸띠르에 이르게 됩니다. 인도의 계급 제도와 극심한 빈부격차를 타파하려는 혁명적 이상을 품었던 타고르는 고향인 산티니케탄에 ‘나의 오두막집’이라는 뜻의 아마르 꾸띠르 공동체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다양한 수공예품을 만드는 공방을 세웠습니다. 타고르의 위대한 이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아마르 꾸띠르에서는 숙련된 주민들이 가죽 금속 직물 등 여러 소재를 이용한 기념품을 공동생산하여 판매하고 있습니다.
크와이 멜라는 오후 3시부터 시작입니다.
사실 오후 3시는 이곳에서 별다른 효용가치가 없는 시간입니다. 우기라고는 하지만 습기를 강하게 머금은 이곳의 더위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 느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이곳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다들 쓰러져 쉬거나 잠을 잡니다. 개도 소도 염소도 원숭이도 이 시간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은행과 서점, 식료품 가게들도 다 문을 닫습니다. 그래서 오후 3시에 문을 여는 크와이 멜라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는 독특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축제인 셈입니다.
나를 태운 릭샤왈라의 이름은 가띡입니다. 그는 산티니케탄의 우체국 앞에서 걸어오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사실 내가 그곳으로 간 것은 그곳에 ‘라떨이’라는 이름의 구면인 릭샤왈라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떨이, 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 떨이, 라는 한국어의 어감이 생각나 혼자 쿡쿡 웃었습니다. 이름 때문에 나는 그의 단골이 되었는데 비교적 장거리인 크와이까지 가기 위해 우체국 앞으로 왔다가 일을 나간 라떨이 대신 그의 친구인 가띡의 릭샤를 타게 되었지요.
그와 나는 오후 3시 5분에 크와이에 도착했습니다.
릭샤를 타고 오는 동안 내가 그에 대해 이런저런 불편한 생각을 했음을 알 리 없는 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연신 웃는군요. 오늘 그는 자신의 노동에 합당한, 혹은 그 이상의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장은 아직 완전히 서지 않았습니다. 열 명쯤의 상인들이 전을 펼쳤고 그만큼의 상인들이 짐을 풀고 있었습니다. 전을 펼친 상인들 사이를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 이 장이 지난겨울에 보았을 때보다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음을 느낍니다. 지금이 혹서기인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막 전을 편 아낙에게서 짚으로 만든 작은 광주리 하나를 뜨리쉬 루피에 샀습니다. 뜨리쉬가 30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았지요. 벵골어 숫자 외우기가 내겐 몹시 어려웠는데 이를테면 10이 도쉬이고 20이 비쉬인데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뜨리쉬가 해결되고 나니 10과 20은 금세 외워질 것 같군요. 이 광주리에 달걀을 넣으면 열 개는 좋이, 망고를 서너 개쯤 운치 있게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낙죽공예로 만든 작은 귀걸이를 파는 사내 곁에 쭈그려 앉아 한 개에 10루피, 250원인 귀걸이 두 쌍과 20루피인 귀걸이 두 쌍을 샀습니다. 도합 60루피인데 50루피 한 장을 건네며, 10루피 디시(DC) 파서블? 했더니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에누리는 시장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만고의 즐거움이며 미덕일 것입니다.
나는 반소리(피리)를 만들어 나온 한 사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는 나를 위해 몇 개의 반소리를 시범적으로 불어줬고 그 소리는 산티니케탄 바울(노래하는 집시)들의 소리에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었습니다. 나는 이 반소리를 파는 사내 앞에서 몹시 행복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내가 산티니케탄에 머무는 동안 바울들로부터 반소리 연주를 공부할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크와이의 신이 내게 준 선물이야. 나는 설레는 감정으로 반소리 앞에 앉아 두 개의 반소리를 골랐습니다.
다다, 둘 중 하나를 골라줘.
노점상의 다다는 당연하게 나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다다는 여기서 아저씨의 통칭입니다. 우편배달부도 릭샤왈라도 대학교수도 아저씨면 다 다다입니다. 여성형은 디디이지요.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아무리 미천한 일을 한다 해도 아줌마는 다 디디인 것입니다. 나는 다른 자리를 구경하고 있던 비슈와바라티 대학의 남학생에게 통역을 부탁했습니다. 남학생으로부터 벵골어를 들은 다다가 말했습니다.
이 둘은 똑같아. 나도 우열을 가릴 수 없어.
나는 둘 중 크기가 조금 작고 마무리가 섬세하게 된 하나를 골랐습니다. 40루피. 일금 1,000원에 나는 근사한 대나무 반소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반소리를 구입한 나는 몹시 고양된 감정의 주인이 되었지요. 그것은 낯선 이국의 벼룩시장들에서 내가 얻었던 감정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는데 무엇보다도 크와이의 제품들이 모두 정성이 가득 밴 수공예품이라는 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충분히 만족한 나는 짜이(밀크티)를 파는 디디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때 내 눈앞에 한 작은 소녀가 주섬주섬 보따리를 푸는 게 보였습니다. 아홉 살 혹은 열 살쯤. 아이의 보따리에서 무엇이 나올까 궁금했습니다. 보따리가 다 펼쳐지고 아이의 진열품이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아! 하고 깊은 탄성을 울렸습니다. 그 아이의 보따리에서 나온 게 무엇이었는지 당신 잠시 생각해볼래요?
그것은 종이배였습니다.
색색의 그림이 그려진 일곱 개의 종이배.
아이는 종이배를 팔기 위해 크와이의 멜라에 나온 것입니다. 나는 잠시 타고르의 화신이 종이배를 들고 이 장터에 나타난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요. 어린 시절 우리 모두는 종이배를 만들어 시냇물에 띄우며 놀았고, 그 종이배가 어딘가 큰 바닷가에 이르기를 바랐습니다. 기탄잘리에 나오는 시편들 대다수가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엄마와 세상 이야기가 아니던가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두 개의 종이배를 골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값을 물었습니다.
아이는 두 개의 종이배 값으로 10루피를 불렀습니다.
10루피면 근교의 식당에서 한 끼의 탈리(인도식 백반)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돈입니다. 나는 아이에게 10루피 지폐를 건넸고 아이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우리의 거래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조용히 웃었습니다. 크와이의 사람들은 나를 조금은 나사가 풀린 사람으로 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사우스코리아 사내, 종이배를 돈을 주고 샀어. 그런 눈빛들이 내 주위에 머무는 것을 느꼈지요.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그 두 개의 종이배와 함께 크와이의 강기슭을 거슬러 돌아왔습니다.
가띡, 난 지금 몹시 행복해. 넌 어때?
영문을 모르는 릭샤왈라도 달리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라딴빨리에 돌아온 나는 가띡에게 100루피 지폐를 건넸습니다. (*)
책머리에
하루 24시간 86,400초를 다 기억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 때였지요. 내게 다가오는 86,400초의 모든 1초들을 다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1초는 무슨 빛깔의 몸을 지녔는지, 어떤 1초는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1초는 지금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 어떤 1초는 왜 깊은 한숨을 쉬는지 다 느끼고 기억하고 싶었지요. 그런 다음에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나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시들을 사랑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이었고 삶의 현실은 척박했습니다. 정치적 피폐함이 극에 이른 시간들 속에서 읽는 타고르의 시편들은 내게 솜사탕 같았습니다. 다가오는 1초 1초들과 따뜻하게 포옹하며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편들을 읽는 순간은 작은 천국이었지요.
2009년 7월 나는 오래 묵힌 마음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2010년 12월까지 이어진 이 여행은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시편들을 찾아가는 여행이었지요. 벵골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며 타고르의 모국어인 벵골어를 익혀 타고르의 사랑스러운 시편들을 한국어로 직접 번역하고 싶었지요. 타고르의 꿈과 이상이 고스란히 남은 산티니케탄에서 벵골 사람들과 살아가는 시간은 기쁨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타고르의 시편들이 내게 건네주는 느낌과 또다른 질감이 있었지요. 자연 속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범상한 시가 지니지 못한 생의 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1초들』은 산티니케탄에서 내가 만난 시간의 향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길을 걸어가면 언제나 안녕, 쫌빠다! 하며 내 이름을 반갑게 불러주었습니다.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아마르 본두, 나의 친구여!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모두들 내게 한 마디의 벵골어라도 더 알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숲의 꽃향기는 은은하고 원숭이들이 즐겁게 뛰어다니고 연두색의 햇살 속에서 아침 새소리는 초록빛의 파도입니다. 반딧불이들이 하늘의 별자리처럼 빛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만난 부엉이는 그 큰 눈을 껌벅이며 안녕, 오늘 하루 좋았어? 묻습니다. 외견상 지극히 가난했지만 아무도 가난에 대해서 구차스러워하지 않았고 불행에 대해서 몰입하지 않았습니다.
산티니케탄에서 나는 내 생애 두 번째, 내 삶이 지닌 1초 1초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540일, 46,656,000초의 시간들. 모든 한 초 한 초들이 꽃다발을 들고 내게 다가와 다정하게 인사하고 다시 손을 흔들고 가는 것입니다. 나 또한 그들을 향해 오래 손을 흔들고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봅니다.
대저 시가 무엇인지요? 그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아니겠는지요.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생의 1초들을 사랑하는 일 아니겠는지요. 이기적이고 모순된 삶 속에서도 우리들이 꿈꾼 가장 어질고 빛나는 이미지들을 우리들의 시간 속에 반짝 펼쳐 보이는 것 아니겠는지요. 한 마리 반딧불이처럼 그들의 삶 속으로 문득 날아 들어온 키 작고 못생긴 한 이방인에게 아무런 연유도 없이 마음을 나누어준 산티니케탄 사람들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2011년 7월
와온 바다에서 곽재구
『우리가 사랑한 1초들』에서 전재(곽재구, 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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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곽재구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사평역에서』『서울 세노야』『참 맑은 물살』『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기행산문집 『포구기행』『예술기행―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낙타풀의 사랑』『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 등을 펴냈다. 신동엽 창작기금과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순천대학교에서 시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