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입사入仕 동기인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를 에세이로 소개합니다. 「보임안서」는 『한서』 권62 「사마천전」에 실린 글이지만 옮긴이 김영수가 『사기』의 마지막 편인 「태사공자서」와 함께 묶어 총 130편 『사기』의 서문으로 소개하는 글입니다. 기원전 97년 사마천(당시 49세)은 ‘한 무제의 심기를 건드린 죄(역적을 두둔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사마천은 집필 중이던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자처해 받고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아래 소개될 편지글에는 이 같은 『사기』의 집필 배경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마천의 생사관生死觀, 시대에 대한 인식, 역사 기록의 의지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선비였던, 사마천의 동기 임안은 무제 때 파격 기용되어 익주자사益州刺史라는 요직에 오르지만, 기원전 91년 어느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사마천은 임안이 익주자사 시절 보내온 편지의 답장을 차일피일 미루다 임안의 투옥 소식을 듣고 답장을 쓰게 되는데, 그 답장이 「보임안서」입니다. 사형을 선고받아 옥에 갇힌 친구(후에 처형당함)에게 한때 사형을 선고받아 옥에 갇혔다가 궁형을 자처해 목숨을 부지한 사마천이 부친 편지글, 일독을 권합니다. - 편집자
보임안서報任安書 -임안에게 드리는 답장
한국어 번역문
답장이 늦어진 연유를 말하다
미천한 태사공1 사마천, 삼가 답장 올립니다2
소경(少卿, 임안의 자) 귀하
지난번 보내 주신 편지에서 저에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밀어주는 것을 책무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의 뜻과 기운이 너무 간절하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소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속된 사람들의 말에 따른다고 생각하시어 나무라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만, 저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리석긴 하지만 장자의 유풍이 어떤 것인지는 얻어들은 바 있습니다. 저는 비천한 처지에 빠진 불구자입니다. 무슨 행동을 하든 남의 비난을 받으며, 잘하려고 하여도 반대로 더 나빠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우울하고 절망적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습니다.3 왜 그랬겠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위하여 단장합니다.4
하지만 저는 몸이 벌써 망가졌으니 아무리 수후나 화씨의 주옥과 같은 재능이 있다 한들, 또 허유나 백이와 같이 깨끗하게 행동한다 한들, 영예는커녕 도리어 남의 비웃음거리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일이 고작일 것입니다.
소경의 편지에 진작 답을 드려야 마땅하지만 마침 황제를 따라 동쪽의 지방을 다녀온 데다 제 개인적인 일에 쫓겼습니다. 만나 뵌 지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바빠서 저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지금 소경께서는 불미스러운 죄를 지으신 지 한 달이 지났고, 이제 형을 집행하는 12월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천자를 따라 또 옹 지방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갑자기 당신께서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당하시고 저는 저대로 저의 불만을 끝내 가까운 사람에게 말할 수 없게 된다면, 당신의 혼백은 영원히 가고 저의 한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고루한 생각을 대략이나마 말씀드리고자 하니 오랫동안 답장 올리지 못하였다고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사마천,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해명하다
자신의 몸을 수양하는 것은 지혜의 표시이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짊의 실마리이며, 주고받는 것은 의리가 드러나는 바이며, 치욕을 당하면 용기로 결단하게 되며, 뜻을 세우는 것은 행동의 목적이라 들었습니다. 선비는 이 다섯을 갖춘 다음에야 세상에 몸을 맡겨 군자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려다 도리어 벌을 받는 일보다 더 참혹한 화는 없으며, 마음을 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슬픔은 없으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동은 없으며, 궁형5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궁형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을 비교하고 헤아린 바는 없으나, 한 세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옛날 위衛나라 영공이 환관인 옹거와 수레를 함께 탔기 때문에 공자는 그곳을 떠나 진陳나라로 갔습니다. 상앙이 환관 경감의 주선으로 군주를 만나자 조량은 떳떳하지 못한 일로 여겼습니다. 환관 동자가 황제의 수레를 함께 타자 원사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이처럼 옛날부터 사람들은 환관과 관계를 가지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대개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도 환관과 관련된 일이라면 기분을 상하지 않은 경우가 없는데, 하물며 꼬장꼬장한 선비라면 말하여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조정에 아무리 사람이 없다 한들, 저같이 궁형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더러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선친께서 물려주신 가업으로 인하여 황제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벼슬하면서 죄받기를 기다린 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우선 충성을 바치고 믿음을 다하며, 훌륭한 계책을 세우고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칭송을 들으면서 현명한 군주를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정치의 모자란 것을 메우며 어질고 재능 있는 자를 추천하거나 초야의 숨은 선비를 조정에 드러나게 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밖으로는 전쟁에 참여하여 성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워 적장의 목을 베거나 적군의 깃발을 빼앗은 공도 없습니다. 끝으로 오랫동안 공로를 쌓아서 높은 지위나 후한 녹봉을 받아 친지들에게 광영과 은총을 가져다준 적도 없습니다. 위의 넷 중 어느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으며 구차하게 눈치나 보면서6 별다른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전에 저는 외람되게 하대부의 말단 대열에 끼여 조정의 논의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라의 법전에 근거하여 시비를 논하지 못하였고, 깊게 생각하고 살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지러진 몸으로 뒤치다꺼리나 하는 천한 노예가 되어 비천함 속에 빠져 있는 주제에 새삼 머리를 치켜들고 눈썹을 펴서7 시비를 논하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조정을 업신여기고 같은 시대의 선비를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아! 아아! 저 같은 인간이 새삼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새삼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릉 사건의 전모를 밝히다
또 일의 시작과 끝은 쉽게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젊어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자라면서 고향 마을에서 어떠한 칭찬도 들은 바 없습니다. 그런데 요행히 주상께서 선친을 봐서 저의 보잘것없는 재주로나마 궁궐을 드나들 수 있게 하셨습니다. 대야를 머리에 인 채 하늘을 볼 수8 없기에 빈객과의 사귐도 끊고 집안일도 돌보지 않고 밤낮없이 미미한 재능이나마 오로지 한마음으로 직무에 최선을 다하여 주상의 눈에 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저의 뜻과는 달리 크게 잘못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릉과 함께 궁궐에 들어와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지만 평소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취향이 서로 달라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없고 은근한 교제의 즐거움을 나눈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지조 있는 선비였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것은 효성스러웠고, 신의로 선비들과 사귀며, 재물에 대하여는 깨끗하고, 주고받음에 공정하며, 위아래 사람을 대할 때는 양보할 줄 알고, 공손하고 검소하게 남에게 몸을 낮추었습니다. 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발하여 나라의 위급함에 몸을 바칠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평소 쌓아 둔 바를 보면, 나라의 큰 선비로서의 기풍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무릇 신하된 자로서 만 번을 죽는다 하여도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려는 행동이야말로 갸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 가운데 하나가 마땅찮다고 하여 자기 몸 하나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하는 데 급급한 신하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사소한 잘못을 크게 부풀리니 참으로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이릉은 5,000이 채 되지 않는 보병을 이끌고 오랑캐 땅 깊숙이 들어가 왕정을 활보하면서 마치 호랑이 입에 미끼를 들이대듯9 강한 오랑캐에게 마구 도전하여 수만 군대와 맞서서 선우10와 열흘 넘게 계속 싸운 결과 아군 수의 반 이상이나 되는 적을 죽였습니다. 오랑캐들은 사상자를 구조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고, 흉노의 군장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리하여 좌·우 현왕을 불러들이고 활을 쏠 줄 아는 사람은 모조리 징발하여 온 나라 전체가 이릉을 공격하며 포위하였습니다. 그렇게 싸우기를 천리를 전전하였으나 화살은 다 떨어지고 길은 막힌 데다 구원병도 오지 않으니 죽고 다치는 병사들이 쌓여 갔습니다. 그러나 이릉이 큰 소리로 군사들을 격려하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몸을 일으켜 피로 얼굴을 씻고 눈물을 삼키며 맨주먹으로11 칼날에 맞서 북쪽을 향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적과 싸웠습니다.
이릉이 아직 적에게 항복하기 전에 사신의 보고를 접한 조정의 공경 왕후들은 모두 술잔을 들어 황제께 축하를 올렸습니다. 며칠 뒤 이릉이 패하였다는 소식이 전하자 주상께서는 식욕을 잃으셨고, 조정 회의에서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셨습니다. 대신들은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비천함도 헤아리지 않고 주상의 슬픔과 번뇌를 보고는 저의 어리석은 충성을 다하려고 가만히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릉이 평소 사대부들에게 좋은 것은 양보하고 귀한 것은 나누어 주어12 기꺼이 목숨을 바칠 사람을 얻은 것을 보면 옛날 명장도 따르지 못할 정도입니다. 몸은 비록 패하였지만 그 마음은 적당한 기회에 나라에 보답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일은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패배 못지않게 공로 역시 천하에 드러내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갖고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뢸 길이 없었는데, 마침 주상께서 하문하여 곧 이러한 뜻으로 이릉의 공적을 추천함으로써 주상의 생각을 넓혀 드리고 평소 이릉을 고깝게 보던 다른 신하들의 비방을 막아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을 다 밝힐 수 없었으며 주상께서도 제 뜻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제가 이사 장군을 비방하고13 이릉을 위하여 유세한다고 생각하여 결국 법관에게 넘겼습니다. 간절한 저의 충정은 끝내 드러나지 못하였고, 근거 없이 이사 장군을 비방하였다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재물14도 없었고, 사귀던 벗들도 구하려 들지 않았으며, 황제의 측근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몸은 목석이 아닌데 홀로 옥리와 마주한 채 깊은 감옥에 갇히는 영어15의 몸이 되었으니 누구에게 제 사정을 하소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정말이지 소경께서도 직접 겪으셨듯이 저의 처지 또한 다를 바 없지 않았겠습니까? 이릉은 살아서 항복함으로써 그 가문의 명성을 무너뜨렸고, 저는 거세되어 잠실16에 내던져져 또 한 번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슬픕니다! 슬픕니다! 이런 일을 일일이 아무에게나 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기』 저술의 동기와 목적을 말하다
저의 선친께서는 조정으로부터 ‘부부단서’17와 같은 표창을 받는 특별한 공적을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천문과 역법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지만 점쟁이나 무당에 가까웠습니다. 주상께서는 악사나 배우처럼 희롱의 대상으로 여기셨고, 세상 사람들도 깔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죽임을 당한다 하여도 아홉 마리 소에서 털오라기 하나18가 없어지는 것과 같고,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도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절개를 위하여 죽은 사람으로 대접하기는커녕 죄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평소에 제가 쌓은 것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19 사람으로서 가장 좋기로는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 그다음이 자신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 그다음이 자신의 도리와 체면을 욕되이 하지 않는 것이며, 그다음이 자신의 언행을 욕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몸이 속박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이요, 그다음은 죄수복을 입고 치욕을 당하는 것이며, 그다음은 손발이 묶이고 매를 맞는 치욕을 당하는 것이며, 그다음은 머리를 삭발당하고 쇠고랑을 차는 치욕을 당하는 것이며, 그다음은 발이 잘리고 신체를 훼손당하는 치욕이며, 가장 못한 것이 극형 중의 극형인 부형20을 당하는 것입니다.
“형벌은 위로는 대부에게 미치지 않는다”21고 하였으니, 이 말은 선비가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힘쓰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깊은 산중에 있을 때는 모든 짐승들이 두려워하지만,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 호랑이도 꼬리를 흔들며 음식을 구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갈수록 위세에 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선을 긋고 감옥이라며 들어가라 하면 기세상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무 인형을 깎아 형리라고 하면서 심문을 한다 하여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형벌을 받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손발이 묶이고 맨살을 드러낸 채 매질을 당하면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 옥리만 보아도 머리를 땅에 처박게 되며, 심지어 감옥을 지키는 노예만 보아도 겁이 나서 숨이 막힐 지경이 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기세가 위세에 눌리기 때문입니다. 이러고도 뻔뻔하게 치욕이 아니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서백은 백작으로 유리에 갇혔습니다. 이사는 재상의 몸으로 다섯 가지 형벌을 다 당하였습니다. 한신은 왕의 신분이었지만 진陳이란 곳에서 붙잡혔습니다. 팽월이나 장오도 한때 왕 노릇을 하였으나 감옥에 갇혀 죄를 받았습니다. 강후는 여씨들을 타도하여 권력이 오패를 능가하였으나 청실22에 갇혔습니다. 위기후는 대장의 몸으로 붉은 죄수복을 입고 목과 손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졌습니다. 계포는 주가의 집에서 목에 칼을 쓴 노예가 되었습니다. 관부는 거실23에서 치욕을 당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왕후장상의 몸으로 이웃 나라에까지 명성이 알려졌지만 죄를 짓고 판결이 내려졌을 때 자결이라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혀 더러운 꼴을 당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한 상황에서 어찌 치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용기와 비겁은 기세이고, 강인함과 나약함은 형세에 따른 것24으로 잘 살피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법에 따라 처벌받기 전에 일찌감치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꾸물대다, 매질을 당하기에 이르러서야 절개를 지키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여도 이미 늦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 사람들이 대부에게 형벌을 함부로 내리지 못한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삶에 애착을 가지고 죽기 싫어하며, 부모를 생각하고 처자를 돌보려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의리에 자극을 받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부득이합니다. 저는 불행히도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고 가까운 형제도 없이 홀로 외로이 살아왔습니다. 소경께서는 제가 처자식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셨습니까? 진정한 용사라 하여 명분뿐인 절개 때문에 꼭 죽는 것은 아니며, 비겁한 사람이라 하여도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가볍게 버리는 경우가 왜 없겠습니까? 제가 비록 비겁하고 나약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였지만 거취에 대한 분별력은 있습니다. 어떻게 몸이 속박되는 치욕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겠습니까?
천한 노복이나 하비도 얼마든지 자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 같은 사람이 왜 자결하지 못하겠습니까? 고통을 견디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한 채 더러운 치욕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제 마음속에 다 드러내지 못한 그 무엇이 남아 있는데도 하잘것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후세에 제 문장이 드러나지 못하면 어쩌나 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부귀하였지만 이름이 사라진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오로지 남다르고 비상한 사람만이 일컬어졌습니다. 문왕은 갇힌 상태에서 『주역』을 풀이하였으며, 공자는 곤경에 빠져 『춘추』를 지었습니다. 굴원은 쫓겨나서 「이소」를 썼으며, 좌구명은 눈을 잃은 뒤에 『국어』를 지었습니다. 손빈은 발이 잘리는 빈각25을 당하고도 「병법」을 남겼으며, 여불위는 촉으로 쫓겨났지만 세상에 『여람』을 남겼습니다. 한비는 진秦나라에 갇혀서 「세난」과 「고분」 편을 저술하였습니다. 『시경』 300편의 시들도 대개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그 무엇이 맺혀 있었지만 그것을 밝힐 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일을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볼 수 있게 한 것26입니다. 좌구명과 같이 눈이 없고 손자와 같이 발이 잘린 사람은 아무런 쓸모가 없지만, 물러나 책을 저술하여 자신의 분한 생각을 펼침으로써 문장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한 것입니다.
저도 불손하지만 가만히 무능한 문장에 스스로를 의지하여 천하에 이리저리 흩어진 지난 이야기들을 모아 그 사건들을 대략 고찰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공과 실패, 흥기와 멸망의 요점을 살핀 바, 위로는 황제 헌원부터 따져 지금에 이르기까지 10편의 표, 12편의 본기, 8편의 서, 30편의 세가, 70편의 열전, 총 130편을 저술하였습니다. 아울러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꿰뚫어 일가의 문장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27 그러나 초고를 마치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하였습니다만, 완성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극형을 받고도 부끄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이 일을 마무리하고 명산에 깊이 보관하여 제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이 마을 저 마을로 퍼져 나가 지난날 치욕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벌을 받는다 하여도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지혜로운 사람에게나 할 수 있지 아무에게나 털어놓기는 어렵습니다.
마무리
지세가 낮은 곳에서 살기란 쉽지 않고, 하류들은 비방이 많습니다. 제가 말을 잘못하여 이런 화를 당하여 고향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 무덤에 오르겠습니까? 백대가 흐른다 하여도 씻기지 않을 치욕입니다. 그러니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장이 뒤틀리고,28 집에 있으면 망연자실 넋을 놓고 무엇을 잃은 듯하며, 집을 나가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중서령에 불과한 몸이지만 어떻게 자신을 깊은 동굴 속에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세속을 좇아 부침하고 때에 따라 처신하면서 그럭저럭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던 상황인데 소경께서 저더러 훌륭한 인물을 밀어주라고 충고하시니 어찌 제 뜻과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이제 와서 새삼 제 자신을 꾸미고 미사여구로 변명하여 보아도 세상에 무익하고 믿지도 않을 뿐더러 부끄러움만 더할 따름입니다. 제가 죽고 나야 시비가 가려지겠지요. 이 글로 제 생각을 다 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략 저의 못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삼가 인사 올리는 바입니다.
해제
기원전 99년(사마천의 나이 47세) 5월, 한漢 무제武帝는 한 해 전인 기원전 100년 대완大宛 정벌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에게 3만의 기병을 주어 흉노匈奴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3만 기병 대부분을 잃는 처참한 패배였다.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던 무제는 군사를 재결집하여 다시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한나라 초기의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인 이릉李陵은 보병 5,000을 이끌고 흉노 진영 깊숙이 쳐들어갔다. 군 내부의 갈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적진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다. 이릉의 5,000병사들은 3만이 넘는 흉노 기병에 맞서 사투에 사투를 벌여 흉노 수천을 죽였다. 놀란 흉노는 다시 8만의 군사를 증원하여 이릉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릉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포위를 뚫으려 하였으나 결국 포로 신세가 되었다.
이릉의 패배 소식이 조정에 전해졌다. 이릉이 승전보를 알려올 때마다 술잔을 들며 축하하던 조정의 분위기는 한순간 반전되었다. 흉노와의 관계에서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던 때라 충격은 예상 밖으로 컸다. 무제가 음식도 거부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이에 대신들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답답한 나머지 무제는 사마천司馬遷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황제의 슬픔과 번뇌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히고자 충정으로 이릉을 변호하였다. 이릉의 항복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훗날을 기약하며 벼르고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충정 어린 변호가 도리어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패배의 책임을 물을 희생양을 찾고 있던 차에 사마천이 패장을 두둔하고, 나아가 대장군 이광리의 작전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지적하고 나섰으니 그야말로 알맞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성이 난 무제는 돼먹지 않은 수작으로 이광리의 공을 훼손하려 한다며 사마천을 옥에 가두어버렸다. 한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취한 조치였기 때문에 화가 풀리면 사마천도 옥에서 풀려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흉노 공격에서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돌아온 공손오公孫敖란 자가 이릉이 흉노의 군대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밖의 보고를 올렸다. 무제는 진위 파악도 하지 않은 채 이릉의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사마천에게는 역적을 두둔하였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마천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미처 완성하지 못한 『사기』를 끝내기 위하여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宮刑을 자청하여 사형을 면한다. 그때가 기원전 97년,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 사건을 흔히 ‘이릉의 화禍’라 부른다.
기원전 91년(사마천 55세), 사마천과 입사入仕동기인 익주자사益州刺史 임안任安이 태자 유거劉据의 무고巫蠱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 받고 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임안은 자가 소경이고, 형양의 가난한 선비였다. 대장군 위청의 문객으로 지내다 무제 때 파격적으로 기용되어 북군사자호군을 거쳐 익주자사라는 요직에까지 오른 사람이다(권104 「전숙열전」에 저소손이 보완하여 넣은 「임안전」 참고).
임안은 익주자사 시절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능한 인재를 추천할 것을 충고한 바 있다. 당시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뒤 감옥에서 나와 황제의 신변에서 기밀이나 문서를 담당하는 중서령으로 있었다. 보기에는 귀하고 높은 자리 같지만 실은 거세당한 환관이 담당하는 수치스러운 자리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차일피일 답장을 미루던 사마천은 임안의 투옥 소식을 듣고는 한때 사형선고까지 받고 궁형을 자청하여 목숨을 부지한 자신의 처지를 회상하며 착잡한 심경으로 답장을 썼다. 그것이 바로 3,000여 자에 이르는 임안에게 드리는 답장인 ‘보임안서’다.
이 편지글은 『사기』에 실린 글이 아니다. 『한서』 권62 「사마천전」에 실린 임안에게 보낸 편지다. 그러나 『사기』의 마지막 편인 권130 「태사공자서」와 함께 사마천의 삶과 정신세계, 특히 치욕을 딛고 『사기』를 저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마천의 감동적인 ‘생사관生死觀’을 이해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다. 이 글은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청할 수밖에 없었던 깊고 슬픈 사연을 축으로 『사기』의 완성에 대한 사마천의 초인적 집념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이 아로새겨진 명문 중의 명문이다.
이 편지는 대체로 다섯 단락으로 나뉘어지며, 그 전체적인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사마천은 이 편지에서 우선 자신이 궁형을 받게 된 억울한 감정을 비장하게 토로한다.
◈ 이와 관련하여 충직한 장수들에 대한 황제와 그 충복들의 각박한 대우와 혹리들의 잔인함을 공격하고, 인정과 세태의 비정함, 특히 지배층의 삐뚤어진 기풍에 대하여 울분과 절망을 깊게 표출한다. 나아가 진위 파악도 되지 않은 소문만 믿고 이릉의 가족을 몰살한 한 무제의 잔혹한 면모도 고발한다.
◈ 옥에 갇혀 있을 때의 상황과 그때 당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통하여 인간 세상의 가장 살벌하고 음침한 면을 묘사함으로써 강압(독재) 통치의 면모를 폭로한다.
◈ 시류에 따라 줏대 없이 흔들리고, 권력자의 심기에 좌우되는 지배층에 대한 비분과 절망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또 그 자신이 극형을 선고받았을 때 정치·경제적 지원은커녕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인심과 세태의 본질을 고민한 결과 인간과 세상을 한 차원 높게 인식하기에 이른다.
◈ 깊고 고통스러운 사색의 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인식한 삶과 죽음에 관한 통찰은 궁극적으로 사마천의 생사관을 결정하였으며, 나아가 개인의 치욕과 울분을 뛰어넘어 『사기』를 완성하게 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문장 면에서는 구조와 순서가 앞뒤로 긴밀하게 호응되도록 잘 짜여졌으며, 논리성을 강화하고 기세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사실과 어긋나는 과장도 아낌없이 사용하여 서정성을 높였다.
◈ ‘복수’의 요소를 띠고 있는 그의 발분, 삶에 대한 애착, 목적을 향한 불굴의 의지 등이 자신의 일에 대한 절대적 자신감과 정의감으로 승화하여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50만 전이라는 돈만 있었어도 사마천은 수치스러운 궁형을 당하지 않고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서 도우려 하지 않았다. 돈 있는 자에게 50만 전은 큰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어느 누구 하나 사마천을 변호하거나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사마천은 이렇게 냉혹한 인심과 세태를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처세를 뒤돌아보면서 세상과 인심, 권력과 권력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였다. 깊이깊이 다시 생각해 자신의 생사관과 역사관을 재정립하였다. 이 모든 것이 『사기』에 속속들이 반영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읽는 『사기』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사마천 자신이 직접 겪은 ‘이릉의 화’로 『사기』의 정신세계는 크게 달라졌다. 그는 말과 행동에 신의가 있고 불의를 보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가는 유협의 존재들을 찬양하였다. 반면 사소한 이익 때문에 친구를 저버리고 은혜를 갚기는커녕 원수로 되돌려주는 배은망덕한 소인배들을 강렬하게 증오한다. 또한 서로를 알아주는 참된 우정을 나눈 인물들을 칭찬하였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후 남은 삶의 전부를 『사기』의 완성에 쏟았다. 후세에 길이 남을 역작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훼손시킨 자들에게 시위하고 복수하고자 하였다. 그는 ‘인문人文정신의 위대한 승리자’가 되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그는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다. 『사기』 이후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의 문장에 전율했던가. 부당하게 박해당할 때,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그의 문장을 무기 삼아 저항했던가. 사마천의 『사기』는 참된 삶과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고자 하는 지식인의 최고 무기이자 힘이 되어 영생을 얻었다.
이 편지글은 사마천의 개인적 감정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 사마천은 영원히 풀릴 수 없고 결코 보상받을 수 없는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하소연한다. 따라서 문장에 감정 표출이 많아졌고 때로는 분노와 울분도 터져나온다. 문장 전체를 흐르는 기조는 ‘억울함’이다. 온몸과 가슴 그리고 영혼에까지 가득 찬 울분과 억울함을 격정적이지만 절제된, 처절하지만 우아한 문장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문장은 다양한 표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때로는 과장법을 동원하여 사마천 자신의 심경이나 전달하려는 뜻을 강조하는데, 뼛속을 저미는 칼날 같은 서늘한 문장과 그 수사는 잠들어 있는 인간의 본질과 존엄성을 일깨워준다. 또한 풍부한 감정, 알기 쉬운 표현, 변화무쌍한 문장 형식을 종횡으로 구사하면서도 주제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사기』의 문장에 비해 격하고 침통하며, 거리낌 없고 힘차다. 그러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다. 혹자는 “힘이 넘치는 울분에 찬 문장”이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비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 교룡蛟龍의 힘을 느끼게 하는 필력”이라고 평가한다.
또 명언이 많기로 유명한 문장이며, 지난 수천 년 중국을 대표하는 산문 대열에서 단 한번도 빠지지 않은 ‘절대 문장’으로 평가받는다. 편지의 내용은 고통과 비애로 가득 차 있지만 읽는 이는 그를 통하여 절망이나 소극적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당당한 기세와 충만한 자신감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강렬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기꺼이 짊어지려는 역사가이자 참된 지식인인 사마천의 자유의지가 곳곳에 살아 숨 쉰다. 그러기에 한 글자 한 글자가 구구절절 가슴을 저민다.
이 글은 『사기』의 마지막 편인 권130 「태사공자서」와 함께 읽으면, 저간의 사정과 사마천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편의 문장은 총 130편 『사기』의 서문에 해당된다. 임안에 대하여는 권104 「전숙열전」의 저소손이 보충한 부분을 참고하면 된다. 여기에는 사마천의 입사 동기인 임안과 전인 그리고 사마천의 관계가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마천의 생사관과 관련해서는 권100 「계포난포열전」과 권81 「염파인상여열전」을 함께 참고하기 바란다.
『완역 사기 본기1』에서 전재 (사마천, 알마,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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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사마천
사성史聖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오늘날 섬서성 한성시 지천진 서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사마천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영향을 받아 역사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갔다. 스무 살 때는 역사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며 팩트의 진실성과 그것에 함축된 드라마 같은 요소들을 체험하는 의미 있는 행보를 실천에 옮겼다. 30대부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부 문서와 기록을 책임지는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당시 황제였던 무제武帝를 보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