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색세계사』는 1991년 출간된 후 13개 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지난달 출간된 『녹색세계사』는 저자의 2007년 개정판을 번역한 책입니다. 개정판에서 저자는 초판의 자료를 최근 것으로 대체하고 그래프와 그림 자료도 대폭 늘렸습니다. 달라진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초판에서 비관론과 낙관론의 균형을 취하려 노력했던 저자가 16년 후 펴낸 개정판에서는 그 균형점이 비관론 쪽으로 기울었음을 고백합니다. 달라지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아래 소개할 에세이 「이스터 섬의 교훈」만은 초판 때의 글 그대로입니다. 이스터 섬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문명 붕괴’의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이스터 섬에 남은, 마지막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스터 섬 주민들처럼 우리들에게도 자원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자원이 바닥났을 때 이스터 섬 주민들이 섬을 떠나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지구를 떠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처럼 우리들의 모아이(빌딩)를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편집자
지구상에서 아마 이스터 섬처럼 외진 곳은 없을 것이다. 면적이 겨우 4백 제곱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이 섬은 남아메리카 서부 해안에서 3천2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 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피트케언 섬인데, 거기서도 2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가장 전성기 때도 이스터 섬 인구는 7천 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섬의 역사가 인류에게는 아주 우울한 경고를 해주고 있다.
1722년 부활절(이스터) 일요일, 유럽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네덜란드 사람 로흐헤펜 제독이 아레나 호를 타고 이 섬을 방문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누추한 갈대오두막이나 동굴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전쟁으로 날을 새고 있는 3천 명 정도의 섬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워낙 식량이 부족한지라 서로 잡아먹는 절망적인 풍습까지 가지고 있었다. 다음에 방문한 유럽 사람은 스페인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1770년 이 섬을 명목상 합병하기는 했지만, 본국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섬의 인구도 적고 자원도 부족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식민 지배를 하지는 않았다. 18세기 후반인 1774년에도 제임스 쿡 선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이 섬에 잠시 들렀다. 또 미국 선박 한 척이 이 섬에 와서 원주민 22명을 잡아가, 칠레 해안에 있는 마스아푸에라 섬에서 바다표범 사냥 노예로 팔기도 했다. 섬의 인구는 계속 줄었으며 생활환경도 점점 나빠져만 갔다. 1877년 페루 사람들이 110명의 노인과 어린애들을 빼놓고 모두 노예로 잡아갔다. 결국 이 섬은 칠레에게 점령당했고 영국 회사가 경영하는 거대한 목장으로 바뀌어 4만 마리 양을 섬에서 길렀고, 원주민들에게는 아주 작은 마을 하나만 주어 그 안에서만 살게 하였다.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누추하고 야만스럽기 짝이 없는 이 섬의 생활 속에서 한때는 번성했던 사회가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을 발견하고 흥미를 가졌다. 섬 전체에 평균 6미터 높이의 거대한 돌 조각 6백여 개가 흩어져 있었다. 20세기 초반 많은 인류학자들이 이스터 섬 역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그것은 가난에 찌들고 뒤떨어진 상태에서 살고 있는 원시 부족이 조각을 만들어 나르고 세우는 것과 같은, 사회적으로 진보되고 기술적으로도 복잡한 일을 해냈을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이스터 섬은 하나의 ‘미스터리’가 되어 버렸고, 그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는 외계인이 방문한 흔적이라든가, 지금은 태평양으로 가라앉아 버린 사라진 문명의 흔적이라든가 하는 황당무계한 이론도 있었다. 노르웨이의 고고학자인 토르 하이어달은 1950년 유명한 저서 『아쿠아쿠』에서 이 섬을 둘러싼 기묘한 사실들과 역사에 숨겨진 미스터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 섬의 원주민들이 남아메리카 제국 출신들로서, 거기에서 거대한 조각과 석상을 만드는 전통을 배워 왔다는 것이다. 또 그는 섬의 쇠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뒤 서쪽으로부터 다른 이주민이 정착하고부터 소위 ‘귀가 긴 부족’과 ‘귀가 짧은 부족’들 간에 싸움이 끊이지 않아 원래 섬에 있었던 발달된 사회가 멸망하게 되었다.” 이 이론은 다른 이론들처럼 황당무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인류학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이스터 섬의 역사는 사라진 문명의 역사도 아니고 신비한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가 환경에 의존한다는 사실과, 돌이킬 수 없이 환경을 파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섬뜩한 일례이다. 그것은 또 극도로 제한된 자원 기반에서 시작하여 기술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사회를 건설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개발로 섬의 환경은 점점 더 훼손된 것이다. 환경이 더 이상 압박을 이겨낼 수 없게 되자, 지난 수천 년 동안 땀 흘려 건설한 그 사회는 환경과 더불어 몰락해 버린 것이다.
이스터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구 전역에 장기간에 걸쳐 인류가 정착해 가던 시기에 속한다. 최초의 정착민들은 5세기 어느 때에 이주했다. 이 시기는 서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이 몰락하고, 중국에서는 200년 전에 한나라가 몰락한 이후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인도에서는 굽타왕국이 종말을 맞고 있었고, 테오티와칸의 거대한 도시가 중앙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던 때이다.
최초로 섬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폴리네시아 사람이다. 그들은 태평양의 광대한 해역에 걸쳐 거대한 탐험을 계속한 결과 각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원래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동남아시아 사람들로, 그들은 기원전 1000년에 통가와 사모아 군도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들은 다시 기원후 300년경에 마키저스 군도에 이르렀고, 다시 두 방향으로 갈라져서 500년경에 남동쪽으로는 이스터 섬, 북쪽으로는 하와이까지 이동했다. 이 대이동은 600년경에는 소시에테 군도, 800년경에는 뉴질랜드까지 이르며 일단락되었다. 정착이 끝나고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북쪽으로 하와이, 남서쪽으로 뉴질랜드, 남동쪽으로 이스터 섬에 이르는 거대한 삼각형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지금 미국 본토의 두 배나 되는 면적으로,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종족이 되었다. 이 긴 시간에 걸친 항해에 사용했던 배는 한 쌍의 카누를 나란히 묶어 그 위로 넓은 판을 놓아 사람, 식물, 동물과 음식을 싣고 다니는, 소위 쌍배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항해는 어쩌다가 먼 곳으로 표류해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곳을 개척하려는 뚜렷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행해진 식민화 사업이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 때에는 태평양의 파도와 바람을 거슬러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이 상당한 수준의 항해술과 선박 조종술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처음 사람들이 이스터 섬을 발견했을 때는 자원이라곤 거의 없었다. 섬은 화산으로 생겨났지만 3개의 화산은 적어도 폴리네시아 정착민들이 도착하기 400년 전에 이미 꺼져 있었다. 토질도 좋은 편이었지만 온도와 습도가 모두 높았고 배수가 잘 되지 않았으며, 섬 안에는 일 년 내내 물이 흐르는 개울이나 강이 하나도 없었다. 유일하게 쓸 만한 물은 꺼진 화산 안에 있는 호수뿐이었다. 대륙으로부터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섬에는 식물과 동물도 많지 않았다. 자생식물이 서른 가지 정도 있을 뿐 포유동물은 없었으며 곤충 몇 가지와 두 종류의 작은 도마뱀이 있었다. 섬 주변 바다에는 물고기도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뒤로도 환경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원래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도 몇 가지 동식물들만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길렀던 동물들은 닭, 돼지, 개와 폴리네시아 쥐뿐이었고, 주요 작물로는 얌(마과에 속하는 식물), 타로(토란의 일종), 빵나무, 바나나, 코코넛과 고구마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 더욱 동쪽으로 나가 이스터 섬에 정착한 사람들은 가축이라고는 닭만 가져왔고-물론 쥐가 따라왔다-가져온 몇 가지 작물을 심었지만 섬의 기후가 빵나무와 코코넛 같은 반(半)열대 작물에는 맞지 않고 그들의 주식인 타로와 얌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결국 고구마와 닭을 주식으로 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생활로 영양은 충분했지만 식사도, 식사를 준비하기 위한 경작도 극도로 단조로웠다. 이 식단의 유일한 장점은 고구마 경작에 노동이 많이 들지 않아서 여가 시간이 많았다는 점이다.
5세기경에 정착민들이 몇 명이나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넉넉히 잡는다 해도 2~30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구가 점차 늘면서 다른 폴리네시아 지역과 유사한 사회 조직이 들어왔다. 사회의 기본 단위는 함께 땅을 소유하고 경작하는 확대 가족이었다. 밀접하게 연결된 가족 구성원들은 가계와 씨족을 이루고, 각각 고유의 종교와 의식 활동을 가졌다. 각 씨족을 통솔하는 족장은 여러 가지 작업을 조직하고 지휘하며 음식과 기타 필수품을 씨족 내에 분배했다. 바로 이 씨족 조직이라는 사회구조와 씨족간의 경쟁(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이스터 섬을 번영하게 하기도 했으며 또한 몰락시키기도 한 것이다.
정착민들은 작은 오두막과 그 둘레 농경지를 중심으로 섬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았다. 사회 활동은 일 년 동안 특정한 시기에 행하는 제사 장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제사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석조제단으로, 이것은 다른 폴리네시아 지방에서도 발견되는 ‘아후(ahu)’와 비슷한 것으로 묘지, 조상 숭배 그리고 과거 족장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쓰였다. 이스터 섬이 다른 곳과 달랐던 점은, 식량 생산에 거의 시간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족장들이 그 많은 여가 시간을 제례활동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모든 폴리네시아 종족 가운데 가장 앞섰으며, 자원이 얼마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이스터 섬 주민들은 좀더 정교하게 의식을 가다듬고 좀더 근사한 기념비를 만드는데 몰두했다. 롱고롱고(rongorongo)라고, 문자와 기호의 중간쯤 되는 원시 문자로 폴리네시아 문화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알려진 문자가 있는데, 이스터 섬에서는 제사에서 이 롱고롱고로 된 주문 비슷한 것을 암송하기도 했다. 또한 새를 숭배하는 관습에서 기원한 복잡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오롱고라는 지역에서 그 유적이 발견되는데, 47개나 되는 신전의 흔적, 수많은 제단과 깊이 새긴 바위 조각들이 남아 있다. 의식 활동의 중심은 아후라고 하는 제사 장소였다. 이 섬에는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3백여 개의 제사 장소가 세워져 있다. 아후의 위치는 고도로 복잡한 천문학적 의미를 따져서 정해졌다. 즉 하지, 동지, 춘분, 추분 등의 날에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과 각도에 맞추어 지은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섬 주민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각각의 아후에는 1개에서 많게는 15개의 거대한 석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비바람을 이겨 내며 이스터 섬 사회의 독특한 기념비가 되고 있다. 사람들의 막대한 노동력을 잡아먹은 것은 바로 이 석상이었다. 석상은 라노 라라쿠의 채석장에서 흑요석으로 만든 돌도끼만으로 채석되었다. 남자의 머리와 가슴까지 조각한 것인데, 디자인은 일정한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 꼭대기에는 다른 채석장에서 캐어 온 붉은 돌로 장식을 얹었는데, 이것만 해도 10톤은 나간다. 조각 작업은 복잡하기보다는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가장 어려운 과제는 6미터 높이에 무게가 수십 톤씩 되는 석상들을 어떻게 섬을 가로질러 아후 꼭대기에 세우는가 하는 일이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이 이 돌을 나르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바로 그들 사회 전체의 파멸을 부르게 된다. 섬에는 수레를 끌 만한 가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무 둥치를 잘라 깔고 그 위로 석상을 굴려 나른 것이다.
섬의 인구는 5세기 무렵의 작은 집단에서 점점 늘어나 전성기인 1550년에는 7천 명에 이르렀다. 시간이 갈수록 씨족 집단 수가 늘었고 더불어 이 집단들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수백 개의 아후와 6백여 개의 거대한 석상들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절정기를 맞이할 즈음, 그 사회는 3백 개가 넘는 석상들을 라노 라라쿠 채석장 둘레에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갑자기 무너져버렸다. 그 원인이 바로 이스터 섬의 ‘미스터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다름 아닌 섬 전체의 나무를 베어냈기 때문에 초래된 대규모 환경파괴이다. 18세기에 유럽 사람들이 처음 이 섬에 갔을 때는 라노카오 사화산 분화구 바닥에 남아 있는 한 줌의 덤불 말고는 섬 전체에 나무라고는 없었다. 최근 꽃가루 분석 등 과학적 연구 방법이 발전되면서, 이스터 섬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넓은 삼림을 비롯하여 울창한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인구가 점점 늘면서 농경지를 만들고, 난방과 주방도구, 가재도구, 집과 카누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냈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나무를 가장 많이 필요로 했던 것은 엄청나게 무거운 석상들을 제단까지 수도 없이 나르는데 필요한 통나무 굴레들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석상을 나르는 방법은 채석장에서 아후까지 통나무를 깔아 레일을 만든 뒤 수많은 사람들이 돌을 굴리는 것뿐이었다. 여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무가 필요했으며, 씨족 간에 조각상 세우기 경쟁이 벌어짐에 따라 그 필요량은 점점 늘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1600년경에는 섬의 모든 나무가 사라지게 되었고, 채석장 둘레에 많은 미완성품을 남긴 채 조각상 세우기는 끝이 났다.
삼림 벌채는 세련된 의식을 중시하는 섬의 사회생활에도 종말을 고하는 종을 울렸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철저한 변화를 가져왔다. 1500년경부터 나무가 부족해져 사람들은 나무로 집 짓는 일을 포기하고 동굴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한 세기 뒤 목재가 모두 사라져 버린 뒤에는 누구 할 것 없이 남아 있는 자원만으로 생활해야 했다. 그들은 언덕 깊이 팬 바위틈이나 분화구의 호숫가에서 자라는 약한 갈대로 만든 오두막에서 살았다. 나무로 된 카누를 만들 수 없었으며, 대신 긴 항해에는 견디지 못하는 풀로 만든 쪽배가 고작이었다. 고기잡이도 어려워졌다. 그물의 재료인 꾸지나무(옷감의 재료이기도 했다)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가축 분뇨 부족으로 작물에 빼앗긴 영양분을 보충할 길이 없어 황폐해져 가던 땅은 삼림마저 황폐해지자 더욱 심하게 악화되어 갔다. 식생이 사라진 벌거벗은 땅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토양이 부식되고 필수 영양분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당연히 작물 수확량도 줄었다. 이러한 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식량은 닭뿐이었다. 전에 없이 닭이 귀중해지자 닭을 훔쳐 가는 도둑을 막기 위해 돌로 만든 닭장이 섬에 등장했다. 점점 줄어드는 자원으로는 7천 명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인구는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1600년 이후 이스터 섬 사회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점차 원시적인 상태로 돌아갔다. 나무가 없었고, 따라서 카누를 만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자초한 환경파괴의 결과를 피할 수 없이 외딴 섬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사회도 문화도, 삼림 파괴로부터 마찬가지 타격을 받았다. 더 이상 석상을 세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키워온 신앙 체계와 사회 조직이 파괴적인 영향을 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복잡한 사회를 세운 기반 자체가 흔들렸다. 줄어들기만 하는 자원을 둘러싼 갈등은 점점 심해져 마침내는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노예제도가 상습화되었고 구할 수 있는 단백질이 부족해 사람을 먹는 풍습까지 생겨났다. 전쟁을 하는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상대편 부족의 아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몇 개만이 묘지로 남았을 뿐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너무 커서 파괴할 수 없는 석상들은 무너뜨렸다. 18세기에 처음 이곳을 찾았던 유럽 사람들은 그나마 선 채로 남아 있는 석상들을 몇 개 볼 수 있었지만, 1830년대에 가서는 모두 다 쓰러져 버렸다. 방문객들이 원주민들에게 어떻게 이 석상들을 채석장에서 옮겨 왔느냐고 물으면, 이제는 미개인이 되어 선조들의 업적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거대한 석상들이 섬을 가로질러 “걸어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무라고는 없는 이상한 섬의 경관을 보면서 유럽 사람들도 논리적인 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이스터 섬 주민들은 몇 세기 동안 어려움을 이겨가며 그 유형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사회를 건설해냈다. 1000년 동안 이들은 정교한 사회, 종교 관습에 맞추어 생활해왔는데, 이 관습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들이 단순히 생존해 가는 상태를 넘어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인간 재능의 승리였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위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섬 주민들의 문화적인 야망은 한정되어 있는 자원이 감당해 내기엔 너무 컸다. 약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환경이 파괴되자 사회는 빠른 속도로 무너져 거의 야만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스터 섬 주민들은 자신들이 외부 세계로부터 거의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생존 자체가 이 작은 섬의 한정된 자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사실도 잘 이해했어야 했다. 어쨌거나 그 섬은 하루 정도면 섬 전체를 걸어서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아서 숲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환경과 제대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체제를 고안해 낼 수 없었다. 대신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중요한 자원을 다 써 버렸던 것이다. 실제로 누가 보아도 섬의 자원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쯤에는 오히려 씨족의 특권과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석상을 조각하고 섬을 가로질러 날랐다. 얼마 남지 않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씨족들 싸움도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그렇게나 많은 석상들이 미완성인 채 채석장 둘레에 버려져 있다는 사실은, 남아 있는 나무가 얼마나 조금이었는지 사람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스터 섬의 운명은 더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 이스터 섬과 마찬가지로 지구에는 인간 사회와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 섬의 주민들처럼, 인류 역시 지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세계의 환경이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형성해 왔고, 또한 인간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어떻게 만들고 변화시켰던가?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과 같은 전철을 밟은 사회는 없었을까? 지난 200만 년 동안 인간은 늘어나는 인구와 점점 복잡해지는 기술 문명, 진보하는 사회를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하고 더 많은 자원을 뽑아 쓰는데 성공을 거두어 왔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이스터 섬 사람들보다 더 잘 살아왔을까?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치명적으로 고갈시키지 않고, 자신들의 생명 보전 체계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괴하지 않는 생활양식을 찾아내 왔는가?
『녹색세계사』에서 전재 (클라이브 폰팅, 그물코,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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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클라이브 폰팅 Clive Ponting
클라이브 폰팅은 최근까지 영국 웨일즈 대학 스완시 캠퍼스에서 정치학과 국제관계학을 가르쳤다. 『세계사: 새로운 시각』, 『13일: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 『크림전쟁』, 『화약: 중국의 염금술사로부터 유럽의 전쟁터까지』와 같은 책의 저자이다. 그는 최근 조기 퇴직하여 그리스의 한 작은 섬에 살면서 지중해식 정원을 가꾸고 올리브를 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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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진아
학부에서 독어독문학을 대학원에서 인류학과 과정을 마친 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지구 환경 및 생명의 위기에 대해 눈을 뜬 이래, 저술·강연·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그 극복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 환경문제를 비롯한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근대문명의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면이 크다고 보아 근대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방향을 찾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 『딱 일 년만 자연주의로 살아보기』, 『아토피를 잡아라』, 『환경지식의 재발견』 등이 있다.
김정민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국제학을 공부 중이다. 환경문제를 경제학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져 왔으며, 최근에는 역사 연구를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새로운 모델을 찾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