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장 지글러의 『빼앗긴 대지의 꿈』에서 「이성과 광기의 차이」를 에세이로 소개합니다. 『왜 세계의 절반을 굶주리는가?』, 『탐욕의 시대』로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 장 지글러는 2000년부터 9년간 유엔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한 후 지금은 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이전 저서에서 지글러가 기아, 빈곤, 자본의 탐욕, 전쟁 등의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이 책에서는 그 주제들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서양의 왜곡된 역사인식, 서양에 대한 증오의 뿌리 등이 어디에서 발원하는지 탐색하고 나서 지글러는 이 왜곡과 증오를 넘어서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색합니다. 이 책은 “부가 넘치는 이 지구상에서 5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한 명씩 죽어”가는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갈등에서 벗어나 화기애애하고 정의로우며 서로의 정체성과 기억,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합니다. - 편집자
이성과 광기의 차이
장-폴 사르트르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억압하는 것을 강력하게 미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는 한 단어가 특별히 중요하다. 바로 ‘것’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를 빼면 당신은 (억압하는) 사람 또는 나라를 미워하도록 종용받는 결과에 봉착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증오해야 할 것은 정신적 또는 물질적인 억압 ‘구조’가 아닌가?
세계에 통용되고 있는 서양적인 질서는 구조적인 폭력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서양은 윤리나 문명 등에 있어서 보편적 가치의 신봉자를 자처하며,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러한 가치를 삶의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양의 몇백 년 묵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오늘날 남반구 주민 절대 다수는 반기를 들고 있다. 그들은 서양의 주장에서 참을 수 없는 오만방자함과 그들 정체성에 대한 유린, 그리고 그들의 독자성과 과거에 대한 부인을 읽는다.
‘서양’이라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양(Occident)이라는 말은 ‘떨어지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occidere’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고대에는 태양이 지는 지역을 가리켰으며, 반대로 태양이 떠오르는 지역은 동양(Orient)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서양은 우선 일종의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경계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처음에는 순전히 유럽에만 국한되었으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차츰 유럽과 대서양 연안 모두를 아우르게 되었다.
서양은 또 한편으로는 서양에 속하기를 바라는 자들에 의해서 정의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을 배척하는 자들에 의해서 정의되기도 한다.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 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묘사하는 아랍 문헌에서는 유럽의 기사들(영국, 프랑스, 독일 출신 기사들)이 ‘비신도’ ‘기독교인’ ‘서양인’ 등으로 묘사된다. 서양과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던 14세기까지 내내 혼동되었다. 유럽이 대부분 비기독교화된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혼동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기독교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대륙은 아메리카(특히 남아메리카)라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인들의) 아프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에 대한 식민지 정복이 계속되던 기간 동안 서양인이라고 하면 모두 ‘백인’을 지칭했다. 백인과 서양인은 20세기 초반에 나온 교과서에서는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인종’에 따른 준거가 학자들에 의해서 근거 없다고 판명된 오늘날, 인종이라는 단어는 아예 공식적인 어휘에서 배제되었다. 게다가 유럽과 대서양 연안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 백인들이 정치, 경제, 군사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바로 페르시아인, 터키인, 리비아의 베르베르족 등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서양이라는 말의 가장 대중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페르낭 브로델의 강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서양의 정의를 본질적으로 생산 방식에서 찾았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그 답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전 지구를 점령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세계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아직까지 모든 사회적 공간을 독차지하지 못한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원래부터 차지하고 있던 땅이나 강제로 점령하는 데 성공한 땅에서는 엄연히 합법적 또는 실질적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에서 브로델 학파의 좌장격으로 통하는 임마누엘 발러슈타인은 스승의 생각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그는 서양의 정복 의지와 보편주의 주장이 적용되고 있는 몇 가지 예를 제시한다.
첫째, 유럽과 대서양 연안 지역의 지도자들은 지구의 전 지역에서 ‘인권’과 그들이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형태의 정부를 옹호하며, 필요하다면 이를 강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자신들의 문화가 보편적이라는 주장은 다른 문화와 다른 문명을 거부하는 논리적인 결과로 귀착된다. 유럽 대서양 연안 국가 지도자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다른 문화, 다른 문명도 존재할 권리(이국적이고 민속학적인 존재)를 인정한다지만, 실상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아닌 다른 경제 운용 방식과 연계된 문화나 문명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셋째, 서양의 지도자들은 ‘요지부동’의 경제 법칙, 자연 법칙에 버금갈 만큼 ‘과학적인’ 시장의 법칙을 내세운다. 그러니 서양에 속하지 않는 곳의 주민들이 ‘발전’을 꾀하려면 이러한 법칙에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바로 이러한 주장이 증오심을 야기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문제 삼는 증오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고 이성적인 증오다. 여기서 말하는 증오란 서양에 의해서 강요된 지배 체제, 역사에 대한 전체주의적인 관점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의미한다. 이러한 증오는 저항 행위, 반성 촉구와 과거의 기억 되살리기 요구라는 형태를 통해서 표현된다.
요컨대 이러한 증오가 오늘날 윤리적이고 급진적이며 결정적인 항거, 정서적일 뿐 아니라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항거에 불을 붙이고 있다.에메 세제르가 노래한 것처럼 남반구 주민들은 “그토록 많은 거짓말과 그토록 엄청나게 가증스러운 언동은 이제 더 참을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성적인 증오와 증오의 또 다른 음울한 얼굴인 병적인 증오를 확실하게 구별해야 한다.
역사에서는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이성의 상실’이라는 말로 표현한 현상이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이성은 와해되고, 암울하기 그지없는 본능과 가증스러운 퇴폐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저지른 온갖 고문과 처형뿐만 아니라 이에 항거하는 스페인 시위대들이 무방비 상태의 프랑스 포로들에게 가한 온갖 만행의 증인이었다. 그가 1819년에서 1823년 사이에 자택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 귀머거리의 집) 벽에 그린 일련의 작품인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에서, 고야는 당시에 만연했던 사회적 병폐를 되살려놓는다. 자신이 낳은 아들들 중에서 한 명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신을 보여주는 놀라운 그림을 상상해보라. 현재 퀸타의 벽화들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그림들 중에서 한 작품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들이 태어난다.”
이러한 끔찍한 증오가 밖으로 표출된 대표적인 예가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 그리고 펜실베이니아의 하늘에서 벌어진 기막힌 테러 사건이다. 그날 대부분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인 열아홉 명의 젊은이들이 승객들을 가득 태운 두 대의 민간 항공기를 납치해 맨해튼 남쪽에 위치한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 번째 항공기는 워싱턴의 국방부 중심 건물의 동쪽 날개 위에 추락했다. 백악관을 불바다로 만든다는 임무를 띤 네 번째 항공기는 뉴욕과 워싱턴이 공격당한 소식을 휴대전화를 통해 알게 된 승객들이 기내에서 테러범들과 몸싸움을 하던 중에 펜실베이니아의 초원 위로 떨어졌다.
이 사건으로 62개국의 2,973명(납치범 포함)이 목숨을 잃었고, 특히뉴욕의 참상은 정말 가혹했다. 세계무역센터의 첫 번째 타워는 정확하게 56분 동안 불탔으며, 두 번째 타워는 102분 동안 불길에 휩싸였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수백 명의 남녀가 두 대의 항공기가 충돌한 지점의 위쪽, 그러니까 100층에서 110층 사이에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이들은 인도에 떨어져 몸이 으스러질 때까지 친구끼리, 연인끼리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수백 명의 또 다른 희생자들은 계단에서 질식해서 목숨을 잃었으며, 이들을 구하기 위해 불타는 건물 속으로 뛰어든 소방대원, 시 소속 경비원, 경찰들도 거의 400명가량이 순직했다.
세계무역센터의 두 빌딩은 거의 같은 시각에 붕괴했다. 건물이 붕괴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2초였다. 옆 건물까지 무너지는 바람에 658명의 희생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위에 인용한 수치는 뉴욕 항만청의 조사 보고서(2001년 11월)에서 발췌한 것이다. 보고서는 희생자의 시신과 관련하여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전혀 훼손되지 않은 시신 289구. 둘째, 희생자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신체 각 부분 1만 9,858조각. 셋째, 신체의 일부조차도 찾지 못한 유가족 1,714가구.
이 1,714가구는 행여 혈육의 신체 일부나마 찾을 수 있을까 기다렸지만, 그마저도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이들의 사랑하는 아들, 딸, 아버지, 어머니, 형 또는 동생들은 불길 속에서 전소하거나 건물의 금속 골조가 붕괴될 때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최근의 역사에서 병적인 증오가 이처럼 처참하게 몰아친 적은 극히 드물다.
알카에다, 마그레브 지역 알카에다 지부, 중동 성전(지하드)주의자들은 환각에 사로잡힌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주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벌이는 행동들은 한마디로 끔찍스러운 만행이다. 그것이 미군과 그들의 연합군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을 향해 퍼부은 공격에 응수하기 위한 방어였다는 그들의 주장 따위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코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지만 사실 코란의 가르침과는 정확하게 역행하는 행동이다. 이들의 병적인 행동이 깊디깊은 고통의 산물인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고통은 당사자 개개인을, 특히 젊은이들을 취약하게 만든다. 이는 개개인을 유혹에 노출시키며, 남에게 쉽사리 조종되는 사람으로 만드는가 하면, 앞으로 세심하게 분석해보아야 할 다른 여러 방식의 집단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성적인 증오도 역시 고통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병적인 증오로 인한 거듭되는 폭발의 대척점에 위치한 이성적인 증오는 남반구의 많은 주민들을 서양의 윤리 규범, 세계를 지배하는 서양의 경제 체제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 처음부터 이 점은 분명히 해두자. 나빌 사흐라위(일명 무스타파 아부 이브라힘), 아마라 사이프(일명 압데레자크 엘 파라), 압델라지즈 아비(일명 오카다 엘 파라) 등 이제는 고인이 된 마그레브 지역 알카에다 지도자들, 또는 아라비아 반도의 알카에다 지도자 압델라지즈 알무르킨과 뒤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에보 모랄레스 아이마 또는 월레 소잉카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물들이다. 수년간 지속된 계몽 시기가 이들 두 부류를 확연하게 갈라준다.
우리는 요즘 과거 기억의 회귀 시대를 살고 있다. 민중들이 갑작스럽게 과거에 겪었던 굴욕과 만행을 기억에서 끄집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서양에 합당한 값을 치르라고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예전에 식민지였던 지역의 주민들이 지니고 있는 상처투성이 기억은 오늘날 강력한 역사의 동력으로 변했다. 하지만 어째서 남반구 주민들이 서양을 향해 주장하는 과거 행위에 대한 반성과 보상의 요구가 다른 때가 아닌 바로 이 시점, 노예무역제도가 폐지된 지 100년이 지났고, 식민 시대가 종식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표면으로 부상한단 말인가?
『빼앗긴 대지의 꿈』에서 전재 (장 지글러, 갈라파고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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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장 지글러 (Jean Ziegler)
스위스에서 태어난 장 지글러는 제네바 대학과 소르본 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스위스 연방의회에서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부터 2008년 4월까지 유엔의 인권위원회와 인권이사회에서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으며, 현재 인권이사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국제법 분야에서 인정받는 학자이자 실증적인 사회학자로서, 특히 인도적인 관점에서 빈곤과 사회구조의 관게에 대한 글을 의욕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저명한 기아 문제 연구자이다.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계화의 벙폐를 지적했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최신작 『빼앗긴 대지의 꿈』으로 2008년 프랑스 인권저작상, 2009년 케어 인터내셔널 밀레니엄 상, 스위스 툰 상 등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탐욕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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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양영란
프랑스 파리 제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코리아헤럴드」 기자와 「시사저널」 파리 통신원을 지냈다. 옮긴 책으로 『잠수복과 나비』, 『테오의 여행』, 『불교와 서양의 만남』,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우루아드 1, 2』, 『행복한 나날』, 『식물의 역사와 신화』, 『현장에서 만난 20thC: 매그넘 1947~2006』, 『이자벨의 키스』, 『환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물의 미래』 등이 있으며,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김훈의 『칼의 노래』를 불어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