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주경철의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에서 「암울한 미래로의 여행」을 에세이로 소개합니다. 주경철 교수는 “역사란 사람들이 살아가며 남긴 흔적을 되짚어 보면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것일진대, 사실 그 말은 거의 그대로 문학에도 적용”된다고 서문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책은 역사학자가 다소 꼼꼼하고 딱딱한 역사학과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생생한 느낌의 문학 텍스트를 같이 놓고 지난 시대의 전체상을 조망한 산물입니다. 「암울한 미래로의 여행」은 허버트 조지 웰스(H. G. Wells)의 『타임머신』(1895)을 텍스트로 19세기 말(fin de siècle)의 생활상, 시대정신 등의 역사를 읽어낸 에세이입니다. 19세기 말 웰스의 비관적 미래상은 다음 세대 작가인 예프게니 자미아친, 올더스 헉슬리,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에도 영향을 미친 바 있습니다. - 편집자
먼 미래나 먼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기계가 처음 등장한 소설은 웰스(1866~1946)의 1895년작 『타임머신』이다. 19세기에 철도와 자동차가 등장해서 사람들의 시공간 관념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이 소설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기차나 자동차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자유롭고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인 자전거도 당시 인간의 삶과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말 유럽 전역에서 자전거 여행이 유행했고 웰스 역시 이 새로운 취미를 가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여성들도 바지 끝단을 양말 속에 집어넣는 래셔널(rational, ‘합리적인 옷’이라는 뜻)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자유로이 돌아다녔는데, 이런 신풍속이 여성 해방에 무시 못 할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이다. 타임머신에 ‘안장’이 있고 레버를 움직여서 작동하는 것을 보면 이는 분명 자전거와 자동차의 결합, 곧 오토바이와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오토바이를 타고 길거리를 누비듯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다.
시간 여행을 할 때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극도로 불쾌한 느낌이다.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 느끼는 기분,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밑으로 떨어지는 기분과도 같았다. (…) 어둠과 밝음이 빠르게 번쩍이며 교차되는 통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순간 빠르게 도는 달이 보였다. 달은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빠르게 변했다. 속도를 더욱 높이자 낮과 밤의 번쩍거림이 서로 뒤섞여 회색으로 변했다.
웰스는 19세기 내내 지속된 과학 기술 발전의 극단을 상상한 셈인데, 정작 그의 서술은 과학적이기보다는 문학적 성격이 훨씬 강하다.
타임머신을 이용해서 우리 주인공은 서기 80만 2701년의 미래에 도착했다. 그 엄청난 시간이 흐른 후에 인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처음 만난 미래 인간은 한마디로 대여섯 살짜리 꼬마 같았다. 엘로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대략 4피트(약 1.2미터) 정도의 작은 몸집에 자주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이지만 결핵 환자를 연상케 할 정도로 몹시 연약해 보였다. 주인공은 이런 미래 인류를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한다. “서기 80만 200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지식과 예술을 망라한 모든 분야에서 월등하게 진보해 있으리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작 대여섯 살 어린애 수준이라니! 커다란 실망감이 엄습했다.”
그때 미래 사람들이 꽃을 꺾어서 주인공에게 갖다 주는데, 그 꽃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은 수십만 년의 세월이 얼마나 섬세하고 훌륭한 꽃들을 만들어 냈는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 자체는 진화를 거듭했지만 인간만은 진화는커녕 반대로 퇴화해서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을 갖게 된 것이다. 19세기 내내 인간 사회의 지속적인 진보에 대한 믿음이 팽배했으나, 세기말에 이르러 이런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웰스는 인류 문명이 진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쇠퇴하리라는 비관주의를 견지하였다.
그가 본 미래 사회는 이렇다. 그들은 과거 문명의 잔해인 거대한 구조물 속에 모여서 산다. 가족 제도도 없어진 것 같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가 없어진 듯했다. 남자의 강함과 여자의 부드러움, 가족 제도, 직업상의 차이 같은 것들은 힘이 지배하는 호전적 사회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풍요를 누리게 된 사회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불필요하게 되었고 결국 사라졌다.
이런 점을 두고 주인공은 의미심장한 의견을 피력한다. “이러한 추세는 이미 우리 시대에도 시작되었으며, 바로 그 미래의 시기에 완결된 것이다.” 우리 시대, 곧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사회적 노력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 곧 우리 삶을 더욱 안전한 것으로 만들어 가는 문명의 과정이 절정에 이른 결과 오히려 인간은 유약해져 버린 것이다.
여기까지가 스토리의 절반에 해당한다. 주인공은 이제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고 또 다른 인류와 맞닥뜨린다. 주인공의 타임머신이 사라져 버렸는데, 이것은 몰록이라 불리는 지하 인간들이 일으킨 일임이 밝혀진다. 알고 보니 인류는 두 개의 종으로 나누어져서 따로 진화해 간 것이다. 이 두 번째 인류는 땅속에서 사는 존재인데, 긴 세월이 흐르면서 희멀건 피부에다가 야행성 동물의 특징인, 빛을 받으면 번쩍이는 커다란 눈을 가지게 되었다.
주인공의 추론에 따르면 이들은 노동 계급의 후손들이다. 19세기 이후 공장들이 차츰 깊은 땅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노동자들이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지하에서 보내야 했고, 결국에는 아예 지하 생활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땅 위에서 가진 자들이 쾌락과 안락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안, 땅 아래에서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이렇게 변신해 간 것이다.
내가 꿈꿔 왔던 인류의 위대한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상상했던 도덕적 교육과 모든 이들의 연대가 이루어진 사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완벽한 과학으로 무장한 귀족 계급이 있었다. 그들의 승리는 단순히 자연을 굴복시킨 데에 그치지 않았다. 자연뿐 아니라 같은 인간을 굴복시킨 승리였다.
승리를 거둔 유산 계급은 완벽에 가까운 안전한 삶을 누리다 보니 역설적으로 점차 퇴화의 길을 걸어서 신체적·정신적 능력이 전반적으로 약해져 갔고, 그동안 패배한 노동 계급은 지하에서 흉측한 무리로 변해 갔다. 채식주의자인 엘로이와 반대로 몰록은 육식을 하는데, 그들이 잡아먹는 것은 다름 아닌 엘로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착취에 시달리던 하층민이 먼 미래에 상층민의 살을 먹음으로써 복수를 하게 된 것이다. 엘로이들이 밤이 되면 두려움에 떨며 커다란 집에 모여 함께 잠을 자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하’라는 메타포는 사실 작가의 어린 시절의 삶과 관련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대저택의 가정부였으며, 그래서 온 가족이 저택의 지하에서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저자는 자신과 같은 출신인 ‘지하 인간들’에 대해 결코 동정적이지 않다. 웰스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비난하지만, 동시에 그 노동 계급을 몸서리치게 흉악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
내가 어둠 속에 서 있자 손 하나가 내 손에 닿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다. 흉측한 무리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검진을 하듯 내 몸을 더듬는 느낌은 소름이 끼칠 만큼 싫었다. (…) 그들이 얼마나 흉측하게 생겼는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리라. 얼굴은 창백했고 턱이 없었다. 눈꺼풀 없는 커다란 회색 눈에는 분홍 색조가 감돌았다. 이런 흉악한 몰골의 것들이 눈이 부셔 어쩔 줄 몰라 하며 있는 것이다.
그는 차라리 엘로이에 동정심을 느낀다.
인간들은 수고롭게 일하는 또 다른 인간들의 등 위에 올라앉아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 법칙의 산물이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필연성이 그들을 짓누르고 만 것이다. 나는 칼라일이 그랬던 것처럼 쇠잔해 버린 그 특권 계층을 경멸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아무리 지적 능력이 퇴화했다 하더라도 엘로이에게는 인류의 모습이 대부분 남아 있었기에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불쌍한 처지와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못 본 척할 수도 없었다.
주인공은 과거에 세워졌던 박물관을 찾아가 유물들 가운데 쓸모 있는 무기를 하나 찾아냈으니, 그것은 몰록이 가장 무서워하는 성냥이었다. 이제 주인공은 타임머신을 찾으러 지하 세계로 들어가서 몰록들과 일대 난타전을 벌인다. 쇠막대기를 잡고 “쥐새끼 같은 것들”을 후려치는 장면에서는 몰록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내리치는 몽둥이를 타고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손으로 전해져 왔다. 격렬한 싸움을 할 때 가끔 느끼는 이상한 희열에 휩싸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주인공은 몰록을 저주하며 공격하지만 사실 주인공이 하는 행위가 바로 그 몰록의 행태와 똑같다는 점이다.
가까스로 타임머신을 찾아서 지상으로 올라오니 여전히 엘로이들은 소 떼처럼 들판에서 놀고 있다. 그는 비애를 느끼며 인류의 미래에 대해 이런 식으로 문명 쇠퇴의 논리를 추론해 본다.
그들은 소와 같은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능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몹시 슬퍼졌다. 인간의 지능은 스스로를 파괴해 버렸다. 안락과 편리를 향해 쉬지 않고 나아갔고, 마침내 인간이 바라던 사회, 즉 안전과 영속성이 조화를 이룬 사회가 건설되었다. 생명과 재산의 안전이 완벽하게 보장되었다. 부자에게는 부와 안락이 보장되고, 노동자에게는 그들의 생명과 노동이 보장되었다. 그 완벽한 사회에서는 실업 문제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완벽한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거기에 우리가 놓쳐 버린 자연의 법칙이 있었다. 지적 능력이란 변화와 위험과 어려움을 통해 얻어지는 자연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주위 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생명체는 다만 완벽한 기계에 불과하다. 지능이란 습관이나 본능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변화나 변화의 필요성이 없는 곳이라면 지능이 설 자리 따위는 없어진다. 커다란 문제나 위험에 맞서야만 그 생명체는 지능을 소유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상 사람들은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존재로 변해 갔고, 지하 세계는 단순히 기계적으로 생산만 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완벽한 상태도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즉, 완전한 영속성이었다.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자 지하 세계에 대한 식량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그로써 수천 년 동안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발명의 어머니라 불리는 ‘필요’가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지하 세계에서는 기계를 다루고 있었다. 아무리 기계가 완벽하다고 해도 단순한 습관 외에 약간의 지적 능력도 요구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지하 인간들은 지상 사람들에 비해 인간적 품성 면에서는 떨어졌지만 창의성에서는 앞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식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지하 인간들은 그때까지 금기시해 왔던 인육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서기 80만 2701년에 목격한 세상이었다.
이제 타임머신을 되찾은 주인공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대신 빠른 속도로 미래를 향해 가고 만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인간의 미래만이 아니라 지구의 미래까지 보게 된다. 그 이미지는 암울하고 쓸쓸한 몰락의 모습이다. “온 세상을 덮고 있던 소름 끼치는 그 황량함은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
점점 밝아지는 하늘이 타는 듯한 진홍빛을 띠고 있었으며, 풍선처럼 부푼 붉은 태양이 지평선에 몸을 반쯤 가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주위의 암석은 눈에 거슬리는 붉은색 계열이었다. 눈에 보이는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바위의 남동쪽 면을 덮은 녹색 식물뿐이었다.
지구의 운명이 궁금했던 주인공은 이제 1000년 단위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점점 더 먼 미래로 가 본다.
서쪽 하늘의 태양이 점점 커져 가며 빛을 잃어 가는 것과 지구 위의 생명체가 사라져 가는 것을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으로부터 2000만 년이 지난 시점이 되자 거대한 붉은 태양은 어두운 하늘을 거의 10분의 1이나 차지했다. (…) 붉은 해변에는 거무스름한 녹색 이끼를 빼고는 아무 생명체도 보이지 않았다. 심한 추위가 닥쳐왔다. 간혹 흰 눈이 쏟아져 내렸다. (…) 온 세상은 침묵뿐이었다.
이것이 저자가 그리는 지구의 암울한 미래이다.
주인공은 19세기 현재로 되돌아가서 친구들을 만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시작 부분과 다시 연결된다. 친구들은 그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는다. 다만 미래 세계에서 가지고 온 꽃 한 송이를 보고 처음 보는 희한한 꽃이라며 의아해하는 것이 전부이다.
다시 보면 그가 미래 세계에서 돌아온 다음 허기에 지쳐 고기를 먹고 싶다며 재촉하는 장면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우리 인류는 어쩔 수 없이 몰록의 성향을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얼마 후 주인공인 시간 여행자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사라진다. 그러고는 3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쩌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친구는 예전에 그와 나눈 대화 내용을 상기한다. 이는 거창한 진보의 신념이 거의 종점에 다다른 세기말, 문명의 쇠락을 예견하는 한 비관주의자의 쓸쓸한 결론이다.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했다. 타임머신을 만들기 훨씬 전에도 이 문제에 대해 그와 토론한 적이 있다. 문명의 발전이란 부질없이 쌓아 놓은 것에 불과하며, 마침내는 문명을 세운 사람들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리란 것이 그의 이야기였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면서, 아닌 척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과학 기술의 발전과 산업 성장이 인류 문명의 무한한 진보를 가져다주리라는 순진한 믿음은 스러져 갔다. 그런 발전 자체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사회 문제의 심각성으로 어두운 전망이 점차 확산되었다. 진보에 대한 굳은 믿음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에서 전재 (주경철, 사계절,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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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주경철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및 서양사학과 교수. 지은 책으로는 『문화로 읽는 세계사』,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네덜란드-튜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 『대항해시대』, 『문명과 바다』, 『언어 사중주』(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역사와 영화』, 『유럽의 음식문화』, 『제국의 몰락』,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유토피아』 등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