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홍세화 에세이집 『생각의 좌표』에서 「탐욕」을 에세이로 소개합니다. 홍세화는 이 에세이에서 인간 탐욕의 기원을 추적합니다. 그 기원을 추적하는 작업은 탐욕에 뿌리를 둔 자연파괴와 전쟁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점차 빈도와 강도를 더해가는 자연의 ‘역습(저자의 표현으로는 '비자발적 반란')’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막다른 골목 앞에 선 인간이 도구 이성 아닌 성찰 이성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전망할 수 있을까요? “신은 우리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 저자가 인용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입니다. - 편집자
나는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는 것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인간의 자발적 반란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 때문이라고 전망한다. 자본을 매개로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인간의 반란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을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때가 기어이 올 것이고, 그때까지도 자본주의는 탐욕스런 아집을 계속 부리겠지만 끝내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전쟁 수행자들이고 인간 문명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자연의 반란은 지배, 피지배 관계를 뛰어넘어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가져온다.
인간은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살아남으려고 굴종한다. 인간이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면 억압과 착취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죽는 대신 굴종을 택한다. 인간의 삶은 모진 것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는 계속된다. 자연은 인간의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 파괴되어 죽는다. 자연이 놀라운 복원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인간의 파괴 행위는 속도에 있어서 자연의 복원력을 앞지른다. 그리하여, 자연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끝까지 발버둥치겠지만 인간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니라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다.”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는 이명박 정권이 특히 귀기울여야 할 생텍쥐페리의 말이다. 그러나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탐욕은 통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준 오만성과 결합해 “정말 이래도 되나”와 같은 성찰적 물음을 멀리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시장만능주의는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 단계를 넘어 탐욕을 미덕으로 칭송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은 이제 다른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는 데 멈추지 않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의 몫까지 착취한다. 마하트마 간디였다. “신은 우리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말했던 이는. 신조차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켜줄 수 없다면, 무엇이 인간의 탐욕을 채워줄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공멸뿐인가.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지만, ‘인간의 탐욕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성찰 이성의 소리는 도구 이성의 소리에 비하면 아주 약하다. 이 점은 전쟁을 일으켜온 인간 역사가 입증한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졌다는 인간이지만, 다른 인간을 집단적으로 죽일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성찰 이성이 도구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면 전쟁은 오래 전에 없어졌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첨단 기술과 과학에 힘입어 오히려 대량살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오늘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학살 행위가 세계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키지만 결국 죽고 다친 사람들만 억울할 뿐이다. 내일도, 또 내일도 세계 도처에서 똑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오늘 대량살상을 일으키는 전쟁 앞에서 인간의 성찰 이성이 하는 일이란 심하게 말해 잔인한 전쟁을 덜 잔인한 전쟁으로 포장하는 정도다. 예컨대 모든 나라마다 ‘국방부’라는 부서가 있다. 본디 ‘전쟁부’였던 부서 이름이 ‘국방부’로 바뀐 것도 20세기 들어서다. 하지만 ‘전쟁부’와 ‘국방부’가 하는 임무는 똑같다. 그 정도의 ‘진보’가 있었다고나 할까.
인류가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최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시기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분명한 것은 인간의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 또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탐욕이 사라질 수 없다면 인간의 자연 파괴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성찰 이성으로 자연 파괴를 제어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인간의 전쟁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인간의 도구 이성이 성찰 이성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희망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 전의 인간의 모습이 어땠는지 되돌아보면 어떨까.
거시적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전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이 절대 우위에 있었다. 당시의 인간사회를 ‘원시공동체사회’ 또는 ‘원시공산사회’라고 부른다. 당시 인간에게 변화무쌍한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12월 25일 성탄절이 하나의 예다. 시베리아와 위도가 비슷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옛 사람들은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여러 모로 지혜가 부족한 시대였지만 당시 사람들도 태양이 사라지면 생명이 사라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태양이 사라지면 뭇 생명이 죽는다. 태양은 곧 생명이었는데 바람에 낙엽이 날리는 가을이 지나고 흰 눈 날리는 겨울이 다가오면 낮은 갈수록 짧아졌고 태양은 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려 했다. 두려웠다. 그러다가 동지가 지나면서 태양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확인한 사흘째 날이 바로 12월 25일이다.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축제일로 기념했다. 나중에 그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태양축제일은 성탄절이 되었고 그것이 유럽 전역으로 역으로 전파된 것이다.
자연에 맞서 생존해야 했던 인간에게 배고픔 이상으로 두려워한 것이 또 있었으니 더불어 사는 인간이 줄어드는 일이었다. 이 점을 지금의 우리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가령 수십 명의 인간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생각해 보라. 병들어 죽거나 못 먹어 죽거나 함께 살던 사람이 줄어드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그들은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서로 배불리 먹겠다고 다투기도 했지만 서로를 아낄 줄도 알았다.
벼, 밀, 옥수수를 발견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힘의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자연의 일부로 자연을 두려워했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벼, 밀 옥수수는 경작의 대상이었고 말리면 썩지 않아 보관이 가능했다. 잉여생산물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킬 대상이기도 했다. 잉여생산물은 인간에게 여유 시간을 주어 문화와 역사를 일으키게 했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계급과 소유하지 못하는 계급으로 나누어지게 했다. 잉여생산물은 계급분화를 불러왔고,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경작에는 다른 공동체를 공격하여 손에 넣은 노예를 동원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남아 있을 때엔 잉여생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계급분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도 없었는데,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전쟁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인간은 자연을 존중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땅에서 잉여생산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분이 주로 땅의 소유 여부에 따라 결정된 시대였다.
자본주의 이후 인간은 더욱 오만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땅에서 멀어졌고 옛 사람들이 가졌던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 점차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인간의 탐욕은 오만에 비례하여 더욱더 거칠 것이 없어졌다. 탐욕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의 뿌리이듯이, 다른 인간에 대한 지배와 착취, 그 최종 형태인 전쟁 또한 인간의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뿌리는 이제 너무 깊이 박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게 아닐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까지 착취하기에 이르렀으니 갈 데까지 간 것이고, 마침내 인간은 자연의 반란 앞에 직면하게 되었다.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이 실체를 드러냈다.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다른 인간의 자발적 반란에 대해서는 전쟁과 탄압으로 억누르고 굴종시켜 왔지만,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아무리 오만한 인간이라도 자연에 맞서 전쟁을 벌일 수 없다. 자연과 벌이는 전쟁에서 이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게다가 자연은 인간과 달리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면 스스로 파괴되어 죽을 뿐 살아남으려고 굴종하지 않는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어떻게 끝날까?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 앞에서 결국 투항할까. 그리하여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을 존중하듯 다른 인간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갈까, 아니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공멸의 길로 나아갈까?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인간의 마지막 구원자인 자연도 이 질문에 대해선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생태공동체는 작은 단위에선 가능할지 모르나 큰 단위에선 아직 그 진정한 씨앗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생각의 좌표』에서 전재 (홍세화, 한겨레출판, 2009)
일러스트레이션ㅣ오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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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홍세화
“두 가지 우연이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땅에 떨어진 것. 또 하나는 파리에서 빈대떡 장사를 할 자본이 없었다는 것. 아무 카페든지 한 귀퉁이를 빌려서라도 빈대떡 장사를 해보겠노라고 마누라와 꽤나 돌아다녔다. 그때 수중에 돈이 좀 있었다면 지금도 열심히 빈대떡을 부치고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나는 빈대떡을 아주 잘 부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 대신에 나는 빠리의 빈대떡 장사'? 글쎄,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아무튼 두 가지 우연과 몇 가지 필연, 그리고 서울대 출신이란 게 합쳐져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이를 꽤나 먹었지만 나이 먹기를 꽤나 거부하려고 한다. 『양철북』의 소년도 아니면서 말이다. 나이 먹기를 거부한다는 게 주책없는 일임을 안다. 그렇다고 하릴없는 수작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장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진급한다. 사병은 나이를 먹어봤자 사병으로 남는다. 실제 전투는 주로 사병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사병으로 남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 그럼 나는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오래 전부터 가졌던 생각이다. 따라서 나에겐 나르시시즘이 있다. 내 딴에는 그것을 객관화함으로써 자율통제 하려고 애쓴다. 그러면 전투는 왜 하는가? 살아야 하므로. 척박하나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이고자 한다. 거름이고자 하는 데에는 자율 통제가 필요치 않다. 욕망이 춤춘다. 그렇다.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19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1969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재입학했다.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는 등 순탄치 않은 대학생활 끝에 1977년 졸업했으며 1977~1979년 ‘민주투위’, ‘남민전’ 조직에 가담해 활동했다.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 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파리에 정착, 20여 년간 이방인 생활을 했다. 2002년 영구 귀국하여 영원한 사병으로서 발로 뛰는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빨간 신호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