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는 페터 빅셀의 에세이집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에서 에세이 한 편을 소개합니다. 「기다림을 기다리며」는 현대 사회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기다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에세이입니다. 빅셀의 짧은 이야기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자신의 삶을 내준 현대인들이 다시 자신의 일상을 추스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편집자
어느 들판, 울타리가 쳐져 있는 목초지에서 소들이 풀을 뜯는다. 목초지의 풀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왼쪽에는 풀이 높게 자라 있다. 농부가 와서, 울타리에서 왼쪽으로 오십 미터 떨어진 곳에 말뚝을 박기 시작한다. 나는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농부가 뭘 하려는지 알아챈다. 소들이 벌써 울타리 아래쪽 구석으로 몰려온다. 농부는 이제 한참이나 지나야 옛날 울타리를 치우고, 소들에게 풀이 많은 다른 쪽 목초지로 향하는 길을 터줄 것이다.
소들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성적으로 볼 때 그럴 이유는 전혀 없다. 소들은 몇 마리 되지 않고, 새 목초지에는 풀이 많기 때문이다. 소들은 서로 밀치지 않는다. 아래쪽 구석으로 급하게 몰려오긴 했지만, 지금은 그저 지루하게 기다리기만 한다.
농부가 말뚝을 박으면─하나만 박아도─목초지가 넓어진다는 사실을 소들은 어떻게 알까? 그리고 왜 이유 없이 기다릴까?
기차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잠시 후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합니다.” 그러면 승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입고, 선반에서 가방을 꺼내들고는 복도에 줄을 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잠시 후’란 십이 분이다. 십이 분 동안의 기다림. 사람들은 혹시 프랑크푸르트를 고대하고 싶은 걸까? 그저 기차 안에서 경험하는 게 아니라 정말 고대하려는 걸까?
기다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기다리기를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 열심히 기다릴까?
아마 기다림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스물한 밤만 더 자면 오는 생일 기다리기, 크리스마스 기다리기, 그리고 드디어 12월 24일 당일이 되면, 이제 선물을 뜯어도 된다는 허락을 기다리는 그 긴 시간. 유치원 입학 기다리기, 학교 입학 기다리기, 잉크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 기다리기, 열두 살이 되기를, 열여섯 살, 열여덟 살, 스무 살이 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 그리고 마침내 아흔다섯 살이 되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기다림.
최상류층 가문의 신사 한 분이, 자기 할머니가 얼마 뒤에 아흔일곱이 되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세 명이, 그러면 당신 할머니는 라디오에 출연할 수 있다고 거의 합창하듯 대답했다. 신사는 깜짝 놀라, ‘알(R)’을 프랑스식으로 목구멍에서 우아하게 굴리며 대답했다.
“아니오! 우리, 우리─우리’라는 말을 무척 강조한다─할머니는 라디오에 출연하지 않으십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보 롤란트가 이제 나설 시간이다. 그는 신사에게 동사무소로 가서 할머니가 아흔일곱이 된다는 확인을 받으라고, 그러면 할머니가 라디오에 출연하여 축하를 받을 거라고 설명했다.
“아니오. 우리 할머니는 라디오에 출연하지 않으실 겁니다.”
최상류층 가문의 신사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그래도 어쨌든 싹싹하기는 한─억양으로 대답했다. 롤란트가 다시 설명하고, 당신 할머니는 사실 벌써 두 번이나 라디오에 출연했어야 하는데 그 기회를 놓쳤으니 이번에는 꼭 동사무소에 가서 확인을 받아라, 기타 등등, 기타 등등도 같이 언급했다. 그 신사는 “아니오, 우리 할머니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설왕설래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 신사가 계산을 하고 사근사근하게 인사하며 술집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논쟁은 아마 영원히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롤란트는 같은 주제를 계속 물고 늘어졌다. 그는 스물여덟 살이다. 혹시 라디오 출연을 평생 기다리는 건 아닐까? 그 나이가 되려면 이제 육십칠 년만 기다리면 된다.
롤란트는 살면서 이루어놓은 게 별로 없다. 앞으로도 많이 이룰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지금까지 기다렸다가 이룬 것이라고는 운전면허증 따기, 군대에서 상사 되기, 우편집배원으로서 다른 지역을 담당하기뿐이었다. 지금은 라디오에 출연하기만 기다린다. 그렇다면 무진장 장수하기.
“귀하 앞에서 저는 체념이라는 슬픈 무기를 들어야겠군요.”
자신의 저서 출간이 며칠 늦어지자,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가 발행인에게 쓴 글이다. 긴긴 기다림, 기다림 그 자체.
오래전 어느 마을에 살던 동네 바보요 술꾼인 남자는, 사람들이 뭘 하느냐고 묻는 말에 늘 “기다려”라고 대답했다. 뭘 기다리는지 물으면 그는 눈길을 허공으로 향한 채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마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걸 기다려”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그것을, 다시 말해서 무(無)를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육십칠 년 뒤에 라디오에 출연하기를?
우리는 왜 기다리는 걸까? 왜 기차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복도에 서서 기다릴까? 아마 우리가 기다림만큼 고통스럽게 배운 건 없기 때문일 테지. 유치원과 학교 입학 기다리기, 졸업 기다리기, 은퇴 기다리기, 그리고 어쩌면 기다림조차 기다리기. 병원에 약간 일찍 도착해서 그 앞을 오가며 기다리기, 이 기다림이 끝나면 대기실에서 또 기다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의 기다림을 기다리기. (*)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에서 전재 (페터 빅셀, 푸른숲,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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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페터 빅셀 (Peter Bichsel)
1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이후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64년 『사실 블룸 부인은 우유 배달부를 알고 싶어한다』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47그룹상(1965), 스위스 문학상(1973), 요한 페터 헤벨 문학상(1986), 고트프리트 켈러 문학상(1999) 등을 수상했다. 『책상은 책상이다』는 20여 개국에 소개되어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 외에도 『여자들은 기다림과 씨름한다』, 『못 말리는 우리 동네 우편배달부』, 『사계』, 『케루빈 함머와 케루빈 함머』 등의 작품집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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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전은경
고대 역사 및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출판편집자를 거쳐 현재 독일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책으로 『16일간의 세계사 여행』, 『철학의 시작』, 『캐리커처로 본 여성 풍속사』, 『커피우유와 소보로빵』, 『리스본행 야간열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