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책읽는사회’라는 독서단체가 탄생하면서 기적처럼 전국 여기저기에서 기적의도서관이 생겨났고 누구나 평등하게 책을 읽고, 책을 알고, 책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북스타트 운동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도 진정한 의미의 책 읽는 사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북스타트한국위원회를 출범하기 위하여 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아동학자, 독서운동가, 출판 편집자, 출판사 대표 등이 모여 어떻게 하면 평등하게 모든 어린이와 부모들이 책을 즐기고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태어나는 어린이들에게 콩기름 잉크나 친환경 종이와 자재로 친환경 책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좋은 책을 선별하는 방법론까지의 많은 고민은 수차례 회의를 거듭하게 했습니다.
사회현상으로 보면 요즘 화두가 되는 ‘보편적 복지 국가’에 독서를 추가하여 ‘보편적 독서 복지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북스타트라는 책을 읽고, 즐기고, 책과 놀 수 있는 전국적인 연결망이 만들어 짐으로써 작가는 뜻하지 않게 생애 최초로 내 책을 읽는 아기 독자와 부모를 만나는 기쁨을 선사받았으며, 출판사는 어려울 때 공공구매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의 공공구매는 학교도서관이나 지역도서관이 대부분입니다. 요즘 지역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독자의 증가로 독서 인구는 늘어났지만 출판 시장은 책이 팔리지 않는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시 기회가 있을 때 독자, 작가, 출판사의 관계에서 도서관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한번 있었으면 합니다. 북스타트는 완전하게 구매해서 전국의 많은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의미에서 출판사의 가장 확실한 공공구매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책, 특히 아가 책은 신간이 도서 시장에 진입하여 자리를 잡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가 부모님들의 책 구매 형태를 보면 입소문에 많이 의존해 있고 또 정보력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대부분은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의 구매가 이루어지고 있고, 요즘은 특히 홈쇼핑의 전집 위주의 구매가 매우 높아지고 있습니다. 애써 좋은 신간을 만들어도 시장에 진입하자마자 도태되기 십상입니다.
의미 있는 책, 좋은 책을 시장 기능에 의해 오래 살아남게 하고 또 새로운 신간을 만들어가기에는 요즘 출판 시장 환경이 지극히 불투명합니다. 건전한 독서 생태계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고 그 한 축이 공공구매에 있기 때문에, 책의 선정에 있어 신중해야 함을 말하고 싶습니다. 베스트셀러보다는 의미 있는 좋은 책들이 오래 시장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공공독서 기획자들의 역할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북스타트 또한 책을 선정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욱이 좋은 책을 구별하는 것은 더 어려울 것입니다. 출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그림책을 만들기도 어려운데 좋은 아가 책을 만들기는 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아가 그림책들이 기차, 자동차, 사과, 배 어머니, 아버지를 알려주는 사물 인지 그림책으로부터 출발했고 1994년 보리출판사에서 세밀화로 예술성을 갖춘 사물 인지 그림책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보림출판사도 유아 문학이라고 하는 용어를 어떻게 쓸까? 유아 문학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며 1980년 말경에 정채봉 선생님과 관계자 몇 분을 모시고 사직 어린이 도서관에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8년부터 아가들에게 문학과 그림의 예술성을 갖춘 그림책을 만든다고 한 것이 지금까지 15년 동안 20여 권의 창작 아가 그림책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15년 동안 만든 20권의 그림책 중에서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했던 좋은 아가 그림책은 과연 몇 권이나 만들었는지? 돌아보면 아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아가 그림책들은 태생적으로 학습 인지로부터 출발하였고 어린이 그림책, 넓게는 모든 어린이 책들이 교육이라고 하는 숙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좋은 아가 책이란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넘고 싶어도 넘지 못할 시대적, 사회적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교육의 광풍 시대입니다. 모든 그림책이 교육적 교재이기를 바랍니다. 에둘러 학습적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림책은 그대로 꼭꼭 찍어서 머리에 심어주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좋은 아가 그림책이 나오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책읽는사회가 모든 역량을 모아서 독서가 실용으로만 치닫고 있는 이 시대의 독서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역할을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저희 출판사를 포함하여 아가 책을 만드는 출판사들도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가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는 출판 정신과 아가 사랑과 책임이라는 것을 하나 더 지고 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편집자나 디자이너가 외국책을 보고 적당히 모방해서 만든 책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없고 편집부 편이 많습니다. 저자는 책에 영혼을 불어넣는 사람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영혼이 없는 무늬만 책인 책을 보고 있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좋은 일반 그림책이 많아야 좋은 아가 그림책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출판사 기획, 아동 학자를 포함한 편집 기획보다는 작가의 창작 작업이 많아야 학습 그림책에서 좋은 예술 그림책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그림책들은 어떤 형태이든 학습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학습지인지 그림책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이 시대의 모든 그림책이 교육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꿔가는 것은 역시 작가와 예술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가와 예술가 분들이 세상을 바꿔나가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다시 한 번 ‘책읽는사회’와 ‘북스타트’에 감사를 드리며 이후 10년에도 큰 역할을 부탁합니다. 그림책이야말로 순수문학이고 인문서이자, 예술서라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