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하순, 서울시민대학 봄 학기가 시작됐다. 시민대학 캠퍼스는 여러 곳이다. 서울시청 신청사(시민청)와 은평학습장 그리고 건국대, 경희대, 고려대 등 9개 권역별 연계대학이 있다. 캠퍼스별로 다양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된다. 내가 담당한 강의는 ‘나를 위한 글쓰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총 10회에 걸쳐 진행된다.
이번 수강생도 다양하다. 팔순 할머니에서부터 은퇴자, 직장인, 휴학 중인 대학생, 전업주부 등 30명 남짓. 글을 쓰겠다는 열정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거의 없다.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무방하지만(각자 출석부에 서명을 한다) 나는 일부러 성명을 부른다. 수강생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근 50년 만에 처음으로 출석 체크를 한다며 감개가 무량하다고 했다. 중년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누구 엄마, 누구 부인으로 불리던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대학 강의실에서 오롯이 본명으로 호명된다. 게다가 스스로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글쓰기 시간 아닌가. 중년의 낯빛에서 설렘과 기대가 우러나온다. 쉬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강의에 대한 집중도가 높다.
처음에는 자기소개 시간을 갖지 않았다. 3~4주 지나면 수강생이 서로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고 자란 곳, 가족 관계, 성장 환경, 성격 등이 저절로 드러난다. 또 다른 이유는 자기소개 방식이 천편일률이기 때문이다. 쭈뼛거리며 걸어 나와 이름, 나이, 사는 곳, 직업을 말하고 꾸벅 인사하면 끝이다. 대체로 30초를 넘지 않는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들어가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멋쩍게 웃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자기를 소개하는 데 걸리는 시간, 자기소개에 동원되는 어휘 수, 자기를 소개할 때의 태도에 별 차이가 없다. 삶의 이력이 그렇게 다른데도,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에 대한 의미 부여가 그렇게 다른데도 왜 자기소개는 다르지 않은 것일까. 수년 전 <녹색평론선집 1>을 읽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제리 맨더가 ‘나쁜 요술? 테크놀로지의 실패’라는 주제로 한 대담이 실린 지면인데, 거기에 한 인디언 여성이 자기소개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맨더에 따르면, 캐나다 인디언 집단에서 온 한 여성이 회의에 앞서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는데 무려 45분이 걸렸다. 인디언 여성은 자기 증조부모로부터 시작해 조상들이 어디에서 살았는지를 차례차례 설명했다.
어떤 이는 강에서 살던 사람이고 어떤 이는 산에서, 또 다른 어떤 이는 바닷가에서 살았다. 그녀는 그 지역의 다른 조상들에 대해서도 자기가 아는 바를 얘기했다. 그런 다음 놀라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모든 사람들이 자기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인 부분뿐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도 자기가 모든 조상들의 화합물이라고 말했다.
수강생들의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가 끝나면 맨더가 들려준 인디언 여성의 ‘자기 인식’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고는 서구 문명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인디언 여성과 21세기 디지털문명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우리를 견줄 때 ‘누가 더 큰 인간인가’라고 되묻는다. 증조부모의 삶과 그들의 공동체, 나아가 공동체가 뿌리내린 장소(자연)를 ‘나’에 포함시키는 인디언 앞에서 우리는 작아도 너무나 작은 인간이다. 나이, 직업, 주소가 우리의 전부란 말인가. 여기에 몇 가지가 추가될 것이다. 사는 집의 크기, 굴리는 차의 배기량, 대학 졸업장, 연봉 혹은 통장 잔고 등등.
물론 장황한 자기소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기소개가 지나쳤다가는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드러내길 꺼려 하는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게 우리의 자존감이 현저하게 낮기 때문은 아닐까. 승자독식의 사회가 빚어내는 패배주의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무력감, 그리고 그 무력감 위에서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가진 자들의 뻔뻔함이 ‘나’를 이토록 작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를 위한 글쓰기’가 후반부로 접어들면 강의실 분위기가 달라진다. 자신감이 솟아난다. 생애 최고의 순간, 잊을 수 없는 음식, 다시 가고 싶은 장소 등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복원하면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그동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우여곡절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면서 “내가 살아온 날들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었구나”라고 깨닫는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다시 태어난 ‘나’의 자기소개는 인디언 여성 못지않게 길어진다. 길어질 뿐만 아니라 한없이 깊고 넓어진다. 저마다 자서전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 본 기고글은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