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회에서 ‘작가회의’ 주관으로 ‘문학의 공공성과 표현의 자유’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최근 세종도서문학나눔사업의 선정기준에 대해 논란이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작품 ②예술성과 수요자 관점을 종합적으로 고려, 우수문학의 저변 확대에 기여할 작품 ③인문학 등 지식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도서. 현재 한국출판산업진흥원에서 시도하고 있는 세종도서 선정사업에 대한 매뉴얼 변화 예고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수요자 관점, 국가경쟁력 있는 작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래도 말을 뒤집어 정부 입장에서 고려해보아도 이 말은 말 잘 듣고, 잘 팔리고, 돈 많이 벌어들일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말하는 것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천박한 수준의 예술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수요자 관점(베스트셀러), 국가경쟁력 있고(시장에서의 경쟁력), 순수문학(이념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회문제나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을 집어치운) 작품을 쓰면 지원해주겠다는 말로 들린다. 특히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국가와 사회 존립의 기본체제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것’의 작품 선정 지양은 그 의도를 의심케 할 만큼 표현이 불순해 보인다. 사람들의 상상력마저 제어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읽혀 불쾌함이 크다.
난감하다. 저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작품을 쓸 줄 알았다면 가난을 천형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우리는 아무도 가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부자가 됐을 것이다. 내 경우만 보아도 이제껏 나는 저 세 가지 기준과 정반대로만 작품을 써왔기 때문이다. 나는 저 선정기준에서 보면 도서관에 절대 보급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아를 생산해낸 작가가 된 느낌이다. 문화는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수준을 나타내는 맨얼굴이다. 사회, 정치, 경제의 수준을 나타내는 민낯이다. 문화사업을 지원하고 문화종사자를 지원하는 정책의 수준이 우리 사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말.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름다움을 모르면 천박한 부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얼굴의 부자인가.
가진 돈만큼 교양을 가지고 있는가, 자문할 일이다. 지금의 정부는 문화정책에 있어서는 뇌수면 상황처럼 보인다. “세종도서 논란의 핵심은 예술 지원 철학의 부재다.” 토론자로 나선 신용목 시인의 말처럼 문화융성의 기조를 세운 지 2년이 넘었지만, 문화나 예술에 대한 어떤 철학이나 정체성이 전제한다고 보기 어렵다. 숲을 만들려면 묘목을 심어야만 한다. 기껏 5년 동안 울창한 숲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 종류의 나무만으로 숲을 만들 수 없고, 흘러가는 강의 물길을 바꿀 수도 없다. 먼 미래 우리 후대의 문화라는 숲을 만들기 위해 지금 실행해야 하는 것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게 기조와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정권의 문화기조가 필요한 게 아니라, 철학에 근거한 미래국가의 문화기조가 필요하다. 정부가 문화라는 개념을 때에 따라 적절한 정치적 이용도구 정도로 인식해서는 우리는 미래에도 후진적인 문화수준을 넘어서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가난하고, 굶고 산다고 예술가가 거지는 아니다. 가난한 삶은 어쩌면 예술가들에게는 천형 같은 운명이다. 예술가는 가난한 삶을 살 것을 알면서도 삶의 어떤 방향성을 일반적인 사람들하고는 다르게 바꾼 이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는 성공의 진위와는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지원이나 정책의 기조를 바로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지원이나 정책을 세우는 것보다 정부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때다.
★ 본 기고글은 주간경향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