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역량과 시민적 역량의
아낌없는 결합 있어야
세월호 특별법 교착 뚫는다
두 역량 사이엔 공통영역 필요
특별법 해결, ‘인간다움’ 회복에서부터
바로 인간다움이란 가치의 영역이다
우리는 과연 그 가치 존중하고 있나
이 질문 던지는 것이 시민적 역량
곧 인문학적 역량이다
정치권 인사들은 오늘 당장
세월호 엄마 아빠 가슴에 들어가
역지사지로 이해해보라
지난 4월 중순, 세월호 침몰 사고 며칠 후 어떤 신문에 난 사진 한 장이 독자들의 머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사진은 팽목항에 모여 있던 실종자 가족들이 누가 딱히 강하게 제안한 것도 아닌데 마치 의논이나 한 듯이 서울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시간적으로 그때는 이미 침몰선 아이들의 생존 가능성이나 구조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사실상 사라져버린 순간이었다. “모두 죽었구나”라고 누구 한 사람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면서도 아이들의 느닷없는 소멸을 이 지상의 기정사실로 인정해야 하는 그런 시점이었다. 엊그제까지 발랄하게 뛰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들을 어디서도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엄마 아빠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 아빠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들이 갈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어디론가로 가서 아이들을 찾아야 하는데 그 ‘어디’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갈 곳이 없어져버린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가만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어디 갈 수도 없다. 막막하고 답답하다. 큰 상실이 삶을 덮쳤을 사람들이 예외없이 경험하는 것은 이런 막막함과 답답함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을 때 사람들이 호소하는 행동방식의 하나는 무작정 ‘걷기’이다. 팽목항에서 서울로 도보행진을 시작했던 사람들의 행진은 무슨 목적성 행진이라기보다는 슬픔과 답답함과 막막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들의 ‘그냥 걷기’에 더 가깝다. 그 걷기는 지난 몇 달 동안 서울과 팽목항 사이에, 팽목항과 서울 사이에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되풀이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유가족들만이 그렇게 오간 것이 아니다. 자원봉사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수의 국민들이 그렇게 팽목항을 오갔고 지금도 오가고 있다.
세월호 사건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이 문제에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역량과 시민적 성숙도의 수준이 고스란히 걸려 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를 둘러싼 지금의 교착상태를 보면서 시민들이 답답해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세월호 문제를 풀어낼 의지와 역량을 갖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우리는 아직도 서울과 팽목항 사이를 무한히 오가고 있다. 서울의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 옆길에는 제2, 제3의 팽목항들이 들어서 있다. 무슨 왕조시대도 아닌 시대에 많은 국민들이 국궁사배하듯 길바닥에 엎드려 청와대를 향해 큰절을 올리고 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우리가 이런 답답하고 절망적이고 막막한 모습을 온 세계에 계속 보여주어야 하는가? 사회적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 한 사회의 정치적 역량이고 그 역량이 최선의 방식으로 발휘될 수 있게 이끄는 것이 민주사회에서의 시민의 역량이다. 그런데 그 정치적 역량과 시민적 역량이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의 방식으로 동원될 수 있게 하자면 두 역량 사이에 양자가 반드시 공유해야 하는 ‘공통의 영역’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특별법 교착상태를 헤쳐나가는 데는 그 공통의 영역에 처음부터 주목하고 또 마지막까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영역은 ‘인간다움’(humanity)이라는 인문학적 가치의 영역, 어느 경우에도 인간이, 사회가, 나라가 포기할 수 없는 최종적 가치의 지평이다.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이 사람다움이고 인간다움이다. 사회의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가치들도 그것들 자체로는 최종적 목적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어떤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최종적이고 그 자체로 목적인 그런 가치다. 이 시대에 인문학의 중요성이 자주 강조되는 것은 그 최종적 목적적 가치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깊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이 인정되는가 아닌가에 따라 문명과 야만이 나뉘고 문명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성격과 수준이 달라진다. 바로 그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말할 수 있게 하는 최종 기준이 ‘인간다움’이라는 가치다. 우리는 그 가치를 존중하고 있는가?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정치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참 순진하다고 백번도 더 혀를 찰지 모르지만, 바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 앞에 가차없이 우리 자신을 세워보는 것이 ‘시민적 역량’이다. 이 의미에서의 시민적 역량은 인간다움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인문학적 역량’과 다르지 않다.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지금의 교착을 뚫는 데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역량과 시민적 역량의 아낌없는 결합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두 역량을 최선의 방식으로 이어붙이고 결합할 수 있게 할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공통의 영역은 ‘인간다움’이라는 가치의 영역이다.
나는 지금 특별법 교착을 해결하기 위한 여야 정치권의 노력을 결코 폄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정치권 사람들이 오늘 단 한번만이라도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는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볼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팽목항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팽목항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던 때의 엄마 아빠들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그 막막함과 답답함을 이해해볼 것을 권고한다. 이건 무슨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역지사지의 상상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인문학적 능력이다. 정치를 하고 경제를 꾸리고 사회를 운영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역지사지의 능력이다. 더욱 중요하게, 타인의 곤경을 이해하고 타인의 아픔에 연민과 동정과 공감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가 ‘사회정의’라고 부르는 것의 출발점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사회정의가 동떨어진 곳에 있지 않다. 그뿐인가. 내가 나를 존경하고 우리가 우리를 존경할 수 있는 사회는 사회정의가 살아있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세월호 문제를 푸는 것은 그러므로 이미 그 자체로 우리가 사람의 사회, 인간다움의 가치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 점에서 세월호는 유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