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인도에 있어 지난 8월 15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하지만 저 먼 나라 인도와 우리의 공통점이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단지 그 하루뿐일까요. 오늘 ‘나비’는 먼저 1999년의 인도로 날아가 보려고 합니다. 당시 인도는 나르마다 강 유역의 대규모 댐 건설 프로젝트로 인해 논란에 휩싸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은 나르마다 강 위에 건설된 3200개의 댐 가운데 하나로, 그 프로젝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천 개발 계획으로 홍보되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반세기 동안 인도는 댐 건설을 비롯한 관개 시스템 정비에 엄청난 자본을 투자해 왔었다고 합니다. 국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건설되었던 수천 개의 댐들, 그것은 네루시대를 관통하는 화려한 비전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부커상 수상작인 『작은 것들의 신』으로 문명을 얻은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쓴 「공공의 더 큰 이익」의 들머리에서 접하게 된 내용입니다. (「공공의 더 큰 이익」은 핵 군비 경쟁을 비판한 다른 글인 「상상력의 종말」과 함께 『생존의 비용』이라는 제하의 책에 묶여 있습니다.) 로이는 이 글을 “만약에 당신들이 고통을 겪는다면 그 고통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라는 네루의 연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 네루의 이 한 마디가 그리 낯설지는 않습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인생과 삶이 통째로 유린되던 시대를, ‘공공의 더 큰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만 할 고통이라며 그 고통이 묵인되던 시대를, 우리도 지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연 우리를 막막하게 만드는 여기저기의 신음소리는 어찌된 노릇일까요. 우리가 망각 속에 안주했기 때문에, 더 잔인한 얼굴로 되돌아온 과거와 마주하게 된 것일까요.
‘공공의 더 큰 이익’이 속화된 한국판 최신버전은, ‘새마을’에서 ‘뉴타운’으로 시대에 걸맞게 진화한 재개발 광풍일 것입니다. 그 광풍에 많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실려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를 짐짓 놀라게 한 지난 국회의원 선거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뉴타운’이라는 핑크빛 포장 아래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이며, ‘고통을 당하는 자’는 누구인지 진지하게 살펴 본 사람들은 흔치 않습니다. 선거 기간 동안, 뉴타운 깃발 아래 달라질 원주민·세입자들의 삶의 형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사람은 아마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공공의 더 큰 이익」이라는 글에서 나르마다 강 유역을 무대로 아룬다티 로이가 하는 일이 바로 그와 같은 성찰입니다. 먼저 로이는 나르마다 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아무도 없다”고 꼬집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많은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무시무시한 자세한 이야기들까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로이를 따라 우리도 다음과 같이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자세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로이는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던 그 ‘이익’이 실은 거대한 ‘허구’에 불과했음을 집요하게 파헤칩니다. 댐건설이 시작된 이래 홍수나 가뭄이 빈발하는 지역은 오히려 늘어났으며, 수천 개의 댐이 건설된 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식수조차 공급받지 못하고 있음을, 그녀는 갖가지 수치와 통계로 확인시켜줍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공공의 이익이라는 미명 아래 희생당한 사람들의 삶은 로이가 보기에 더 참혹합니다. 로이는 인도의 또 다른 댐 사업인 나가르주나사가르 댐사업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 아디바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살아온 땅에 대한 공식적인 소유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보상을 요구할 방법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댐 건설을 위해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던 수백만 이주민들의 생존권은 철저하게 무시되었습니다. 이주민들 대부분은 그들이 살아온 집을 빼앗기고 대도시 주변의 슬럼가로 흡수되어, 강제 수용소보다 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로이는 공공의 이익 앞에서 그들이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아프게 적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이주민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 씌어질 때 그들은 그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악몽은 나르마다 강 유역의 사람들에게도 곧 들이닥칠 운명처럼 보였습니다. 나르마다 강의 사람들에게는 그들 삶 전체를 바꿔 놓을 결정에 대해 개입할 기회도, 권리도, 힘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룬다티 로이가 쓴 이 글 「공공의 더 큰 이익」은 정치적 에세이로 분류되곤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은 로이가 첫 소설을 발표하며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된 이후에 쓴 글이기도 합니다. 2002년 9월에 성사된 미국의 한 초청강연에서 로이는 논픽션과 픽션은 단지 기법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픽션은 내게서 춤추듯 흘러나오고 논픽션은 매일 아침 일어나 맞이하는 이 고통스럽고 깨진 세계가 비틀어 짜듯이 내보냅니다.” 세계는 한 명의 소설가를 잃고 한 명의 에세이스트를 얻은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자신이 꺼려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한 명의 탁월한 작가-활동가(writer-activist)를 얻었습니다.
작가 겸 활동가로서 아룬다티 로이는 나르마다 강의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 사람들의 투쟁의 역사를 되짚어 봅니다. 나르마다 강 유역에 모여든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국가와 싸울 것을 맹세한 것은 그녀가 방문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습니다. 아룬다티 로이는 국가가 보유한 무기를 ‘기다리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대화도 거부하며, 지칠 때까지 침묵 속에 내버려 두는 것,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로이가 목도한 국가의 전술이었습니다. 국가는 지치지 않지만, 지치지 않는 국가와 싸우는 사람들은 지칩니다. 아룬다티 로이는 묻습니다.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지금 현재, 지쳐 힘이 빠진 사람들에게,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우리가 그들을 죽게 내버려둔다면, 우리가 그들의 투쟁이 산산조각 나도록 방치한다면, 혹은 우리가 이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는 비인간적 상황에서 눈을 돌려버린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말 것이다. 우리의 영혼, 이미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면, 잃어버리고 남아 있던 조각마저도. (아룬다티 로이, 『생존의 비용』, 최인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지금 우리 영혼의 가장 소중한 조각의 행방은 어디에 있을까요.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용산을 지키고 계신 분들은, 또 얼마나 오래 버텨야만 하는 것일까요. 로이의 책 『생존의 비용』을 용산 참사 희생자 가족의 이야기 등을 담은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책 옆에 놓아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구술집입니다.
남편이 용산에 살아서 결혼하면서 정착하게 됐어요. 제가 지금 마흔이니까 스물세 살 때부터 살게 된 거죠. 딸이 둘 있어요.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 가게 한 지는 7년 됐어요. 가게도 있고 집도 있고, 애들 학교도 보내고. 그 동네에 내 집은 없지만 애들 거기서 낳았고, 결혼했고, 가게도 하고, 그야말로 용산4지구는 제 생존이 걸린 곳이었어요. 우리 식구가 17년 동안 먹고산 삶의 터전이요. 뿌리 깊게 정착을 한 곳이죠. (『여기 사람이 있다』, 삶이보이는창, 2008)
용산 4구역에서 7년 동안 도서대여점을 운영한 박선영씨의 술회를 이선옥 작가가 옮겨 적은 글의 서두입니다. 박선영씨는 당시 불타던 망루에서 간신히 살아 나왔습니다. 그녀에게 용산은 인도의 강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성들여 일궈온 소중한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박선영씨는 그곳이 ‘17년 동안 먹고 산 삶의 터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박선영씨를 비롯한 여러 분들은 용산을 떠나 다른 생계수단을 찾기가 막막한 분들입니다. 박선영씨가 바란 것은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껏 살아온 삶의 터전으로부터 아무런 방편도 없이 무작정 추방당하지 않는 것, 철거가 끝난 그곳에 주상복합건물이 세워지는 동안 임시 수용상가에서라도 장사를 계속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생존의 벼랑에 몰린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것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박선영씨를 비롯한 용산의 세입자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포크레인을 앞세운 용역의 횡포 밖에는 없었습니다. 생존을 건 그분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용역의 시달림을 뒤로 하고 그분들이 오른 망루는 여기 사람이 살고 있으니, 한번만 보아달라는, 단 한번만 생각해 달라는 절규였습니다. 하지만 그 외침을 우리가 간신히 포착할 수 있었던 때, 이미 그것은 주검의 목소리였습니다. 경찰 한 분을 포함한 여섯 분의 고귀한 생명이 그렇게 화염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전 국민을 경악케 했던 그날로부터 벌써 200일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용산에는 왜 가? 무슨 일로?” 최신 MP3나 디지털카메라, 핸드폰 따위를 장만하러 가는 곳쯤으로 기억되던 용산은, 과연 지금 많은 분들에게 여섯 분의 생명이 스러져간 참사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을까요?
3000여 쪽에 이르는 수사기록의 공개를 검찰이 끝끝내 거부하고, 법원은 그러한 검찰의 명령 불이행을 방관했습니다. 더 이상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용산참사 공동 변호인단은 재판부 기피 신청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고등법원과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항고와 재항고가 거듭되는 동안 기피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공판 기일이 잡혔습니다. 8월 20일부터 다시 재판이 시작됩니다. 죽음의 망루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신 분들은, 망루 진압 당시 돌아가신 경찰 한 분의 죽음에 대해 ‘오로지 그분들만이 처벌받아야 한다’고 따지고 드는 기이한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법정에 서실 분들 중에는 불길 속에서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던 아드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드님의 아버지를 비롯해서, 망루에서 남은 생을 다하신 철거민 다섯 분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재판받지도, 또 책임지지도 않습니다. 이 무자비한 부조리극이 상연되는 광경을 우리는 또다시 비통한 심정이 되어 지켜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신용산역 2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걷다 보면, 2009년 1월 20일 전소된 남일당 건물이 여전히 그날의 잔혹한 참상을 증언이라도 하듯 서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마음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기도 합니다. 망루에서 돌아가신 이상림 할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레아호프’ 안팎은 각종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가 되었고, 4구역 안쪽의 무교동 낙지 건물은 ‘낙지도서관’이 되었습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어린이책 한마당도 열렸고, 에니메이션 상영회도 열렸습니다. 시민 여러분들, 문학인들, 음악인들, 미술인들, 학생들이 다녀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그곳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작은 공동체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산은 여전히 더 많은 분들의 발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르마다 강에서 로이는 외쳤습니다. “여러분, 어서 오십시오.”
(8월 11일 저녁의 생명평화미사)
그리고 지금 용산에는 신부님들이 계십니다. 용산 공동체의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는 저녁 7시에 이루어지는 생명평화미사입니다. 문정현 신부님, 이강서 신부님을 비롯한 여러 신부님들께서 매일 그곳에서 생활하시며 여기 사람이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함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이 뜨거운 여름에도 신부님들은 유가족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유난히 햇볕이 뜨겁던 어느 날의 미사에서 한 신부님은 당부하셨습니다. “올 여름 휴가는 용산으로 오세요.” 그분들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 그 나눔의 다른 이름은 ‘연대’입니다. 비가 종일 내리던 어느 날의 미사에서 한 신부님은 환기하셨습니다. “그날로부터 200일이 지난 것이 아니라 그 날이 200번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연대의 손길마저 없다면, 용산참사는 200번, 300번, 아니 악무한으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유령의 그림자로, 수없이 되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토요일 저녁의 말씀입니다.
“… 저희는 지금 ‘이익’과 ‘가치’라는 두 개의 중대한 세력 가운데 경계선에 서있습니다. 이익이 중요한 것인가, 가치가 중요한 것인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물어보는 것이 바로 이 자리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우리 시대의 ‘태풍’입니다. 마치 거대한 태풍이 그 범위에 들어온 모든 것들을 초토화시키고 날려버리는데, 정작 태풍의 한가운데, 태풍의 눈은 고요한 것처럼, 어쩌면 용산은 우리 사회와 우리 시대의 태풍의 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009년 8월 8일 생명평화미사 중 이강서 신부)
나비의 연약한 두 날개가 우리 시대 태풍의 눈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다 할지라도, 용산에서 시작된 나비들의 날갯짓이 답답한 침묵을 깨는 태풍을 몰아올 수 있기를, 그것이 우리 시대의 ‘나비효과’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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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차미령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주요 평론으로 「네크로폴리스 견문기」, 「분열에 대하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