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처山中妻’라는 말을 들어보셨어요? 산속에서의 내연의 여자를 일컫는 말이죠. 지리산에서 투쟁하던 남로당 간부들은 산중처들과 같이 지냈다 해요. 참 고독한 단어 ‘산중처’, 그보다 고독한 단어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문득 위안부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간호사 하수복은 빨치산 대장 이현상 선생의 산중처였어요. 평지에 있는 본처들은 빨갱이 남편 덕분에 자식들을 데리고 온갖 고생을 다하고, 젊디젊은 산중처들은 아무런 미래도 없이 헐벗고, 춥고, 배고팠지요. 하지만 체, 저는 당신의 산중처가 되고 싶었어요. 묘향산에서 체와 함께 얼어 죽어도 좋았어요. 큰 바위 얼굴 이현상 어른은 나이 어린 산중처 하수복에게 산을 내려가서 투항하라 부탁했대요. 남조선 경찰의 첩이 되더라도 굳건하게 살아남으라고. 그리고 자신은 산속에서 험한 죽음을 맞이하죠. 참 알 수 없는 게 사람이죠? 그 허무한 이데올로기를 껴안은 채 그렇게 개죽음을 하다니. 무엇을 위해 큰 바위 얼굴 어른은 그렇게 산 속에서 고생하다 남조선에서도 북조선에서도 버림받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남로당, 그보다 슬픈 단어가 또 있을까요? 마치 화성에 숨어 사는 지구인이나 지구에 숨어 사는 화성인 같은 존재. 탈북해서 갖은 고생 끝에 미국에 살고 있는 저는 또 뭐가 그리 다를까요?
세상의 슬픈 단어들을 떠올려봅니다. 우리 증조부 할아버지는 무엇을 위해 큰 바위 어른의 가족을 업고 목숨을 걸고 월북을 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딸을 낳고, 날 때부터 듣고 들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그 위대한 북조선을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미국에 살면서 반미를 외치던, 내 목숨을 주고도 안 바꿀 딸아이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간 학교 교정에서 우울증을 앓는 이민 남미계 학생의 총기 난사사건으로 얼마나 허망하게 죽어갔는지. 갖은 고생 끝에 뉴욕에 도착한 제가 처음 먹은 음식은 햄버거였어요. 두툼한 고기가 빵 한가운데 끼워져 있는 그 싸고 맛있는 음식은 북조선에 살 때 처음 먹어본 남조선 라면만큼이나 감동적이었어요. 몸에 좋지도 않은 음식이라는데, 처음 먹어본 순간 그보다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은 없을 것 같았어요. 도대체 이렇게 싸고, 맛있고, 푸짐한 음식이 또 있을까요? 저는 요즘도 햄버거를 좋아해요. 나의 햄버거라기보다는 우리들의 햄버거라는 단어가 어울리죠. 딸아이와 제가 미국에 와서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이 바로 햄버거니까요.
체, 1994년 당신이 북조선에 온 얼마 뒤 김정일 위원장이 세상을 떠났고, 이후 북조선에는 마치 예언처럼 끊임없는 대기근이 찾아왔지요. 소위 고난의 행군시기 동안 수없는 사람들이 굶어서 죽어갔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몸에 나쁘다는 햄버거는 구원의 음식이었겠죠. 문득 미국에 와서 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네요. ‘음식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이라는 영화 말예요. 세상의 모든 음식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풍경은 제가 북조선에 있을 때, 아니 탈북한 이래 가끔 꿈속에 나타나는 행복한 풍경이지요, 딸아이와 저는 그 음식을 받아먹으려고 수없는 사람들 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죠. 그러다 꿈에서 깨면 딸아이는 제 곁에 없네요, 그리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이지 못했지만. 딸아이는 그저 어릴 때 먹던 평양냉면을 늘 좋아했어요. 그 맛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뉴욕 맨해튼의 32번가나 퀸스의 한국 음식점들에서 그 비슷한 냉면을 맛볼 수 있었죠. 아무리 먹을 것이 풍요로운 미국에 와서도 날 때부터 세뇌당해온 사회주의 이념은 아직도 제 머릿속을 맴도네요. 굶어 죽는 사람은 없는데도, 사람들은 하나도 행복해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가끔 하늘로 올라가 북조선의 배고픈 사람들에게 햄버거를 마구 떨어뜨려주는 꿈을 꿔요. 체, 당신과 함께요. 배고프지만 않다면 북조선 사람들은 행복할 거예요. 굶어 죽지 않는데도 불행한 얼굴로 지나가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는 가끔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체, 당신이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쿠바산 부채를 건네주며 서툰 조선어로 주체사상탑 앞에서 저녁 8시에 만나자고했을 때 저는 심장이 멎을 뻔했답니다. 그날 나가지 못한 건 우리가 멀리서 아주 잠시, 잠깐 나눈 그 애틋했던 눈빛을 눈치 챈 노동당 간부가 저를 불러 외국인하고는 절대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교시를 내린 탓이었어요. 약속시각인 저녁 8시가 지나자 안절부절못하던 저는 혼자 울었어요. 멀리서라도 당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말라는 당의 목소리는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하루 종일 제 귀에 울려댔지만, 제 가슴속 깊이 아주 따뜻한 곳에 저는 체, 당신을 깊이깊이 숨겨두었답니다. 체, 당신을 사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