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즈음 우리 평양미술대학 조선화학부에서는 그림 꽤나 그린다는 화우들 몇 명은 당의 허락을 받아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님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초상을 그려 김일성대학 조선어학과 교실에 걸었어요. 사실 실기시험과 심사를 거쳐 합격되어 1호 미술가 칭호를 얻어야만 위대한 수령님을 그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거든요. 학생들은 우리가 그린 그 그림을 보며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곤 했지요. 저도 그 그림을 그린 중 한 사람이라 체 동무가 알아봐주길 은근히 기대했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그림을 그리 오래도 쳐다보지도 않더군요. 몇날 며칠 잠도 안자고 그린 그림인데 말이죠. 묘향산을 그린 우리 가운데 묘향산을 가본 동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미 제국주의자들의 쓰레기라고 어릴 때부터 들어 온 청바지를 입고 체, 당신이 실기실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멋지던지 기절할 뻔했습니다.
“체 동무한테 시집가고 말 테야.” 그렇게 말하면 제 가장 친한 동무는 이렇게 답하곤 했습니다. “겉껍질만 보지 말고 속을 보라. 그깟 외국인 하나가 맘에 들어오나?” 그러면서 깔깔 웃으며 말하곤 했죠. 그래 나라도 그이한테 시집가고 싶다야. 체, 당신이 나를 쳐다볼 때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던 태옥을 기억하시나요? 당신은 말했어요. 묘향산은 정말 아름답다고. 이 나라를 기억하는 건 묘향산 때문일 거라고.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느껴졌어요. 바로 태옥 동무 때문일 거라고. 외국인 전용 디스코텍에 가서 아무리 춤을 추어도 지루함은 없어지지 않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묘향산에 올라간 기억이라고. 묘향산에 태옥 동무랑 같이 가고 싶다고. 산속은 아무도 없이 고요했고 그곳에서 태옥 동무랑 나란히 누워 숲 속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민 하늘을 향해 그저 아무 말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누워 있고 싶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건 사랑이라고. 젊은 시절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우리 집안은 위대한 혁명 빨치산 집안이란다. 네 증조할아버지가 가장 존경한 분이 그 유명한 빨치산 대장 ‘이현상’ 큰 바위 얼굴 어른이시지.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들은 그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어린 내게 들려주시곤 했단다. 이현상 큰 바위 얼굴 선생님은 훌륭한 인물이었단다. 남조선 충청남도 금산 출생으로 혼은 火山이라고 했지. 선생의 집안은 군북면에서 가장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농이었다고 해. 해방 후 남조선 노동당의 간부로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주도했던 그 어른은 일제 강점기 젊은 시절엔 독립운동가로도 날리던 인물이지. 1905년 9월 27일 금산 부농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그분은 지리산에서 빨치산 대장으로 갖은 고생을 다할 때도 어딘가 늘 달랐단다. 고구마 한 개도 다 나누어 먹었다고 해. 그분이 훌륭한 인물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증조할아버지처럼 그분 밑에서 빨치산 운동을 하던 사람 중엔 아무도 없었더란다. 네 증조할아버지가 위대한 이현상 선생의 어부인과 1남 삼녀를 모시고 월북했던 분이란다. 증조할아버지는 이현상 선생 밑에서 빨치산 운동을 하던 시절 빨치산 간호병이던 하수복이라는 여인하고 사이에 낳은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늘 궁금해하셨지. 임신을 해서 배가 부른 그녀를 보고 지리산을 내려온 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하셨어. 정말 씩씩한 여성동무였다는데, 이현상 선생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그 시절 빨치산 운동을 하던 동무들에게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가 봐.”
다행히도 저는 어머니와 함께 탈북을 해서 제가 모시고 살고 있어요. 사랑하는 딸만 살아 있다면 당신의 태옥은 가끔 체 당신을 멀리서 그리워만 하면서도 참 행복한 여자였답니다. 마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지리산 속에서의 이현상 선생과 하수복 간호병과의 사랑처럼 저는 묘향산에서의 저와 ‘체’ 당신의 사랑을 매일 꿈꾸었답니다. 저는 가끔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생각하곤 합니다. 얼마나 모진 세월들을 살아내신 건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네요.
가끔 혁명은 사랑을 닮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실패해야 아름답다는 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