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아무에게도 우리가 탈북해서 이 먼 곳까지 왔다고는 말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아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도 한 번도 말 한 적이 없어요. 천진한 얼굴로 학교에서 말하듯 북한이 그렇게 나쁜 나라냐고 묻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북한사람들은 평양의 잘 사는 사람들 소수만 빼면 다 배가 고프다고. 외국여행은커녕 제 나라에서도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아무 데도 여행을 못 간다고. 딸아이는 그 말을 들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귀여운 얼굴을 찡그렸어요. 그 애가 어른이 되면 알려주려 했던 이야기를 이제는 영원히 할 수 없게 되었네요. 너로 인해 그 모든 아픔이 기쁨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말았네요.
다시 절망의 늪에 빠진 저는 잠시 마음의 진통제를 맞듯 오래전 우리의 젊은 날을 떠올립니다. 체, 정말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하염없이 늘어놓고 싶네요. 당신은 1994년 여름 김일성 장군님이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되어 온 세상이 어수선하던 즈음 파랑새처럼 제 가슴속에 날아들었지요. 그날 이후 저는 혼자서 몰래 당신께 편지를 썼어요. 마치 일기 같은 편지를요. 오늘은 누구랑 다퉜다. 오늘은 체 당신이 다른 여자랑 다정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슬펐다 뭐 그런 부치지 못한 편지들을요. 북조선을 떠나던 날 그 편지 다 불에 태웠어요. 혹시라도 당신께 누가 될까 봐. 미국에 와서도 터놓고 수다를 떨 사람 하나 없었어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미국으로 들어와 산지도 어언 15년이 흘렀는데, 언제 어디서 북조선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지 몰라 늘 마음 졸이며 살아왔네요. 그렇게 원수로 생각하던 미국이라는 나라에 도착해 처음 몇 달은 지도자 동지 하는 말이 맞았구나 싶었답니다. 이곳이 지옥이지 어디가 지옥인가? 제가 일하는 식료품 가게 근처의 110층이나 되는 세계무역센터가 2001년 9월 11일 우르르 무너지던 날의 악몽은 정말 믿기지 않았어요. 저는 그날 제가 일하는 식료품 가게 주인인 친척의 아파트에서 청소를 해주고 있었어요. 일주에 두 번 청소를 해주면 꽤 많은 돈을 받곤 했거든요, 고층 아파트 25층에서 청소를 하다가 굉음이 들려 창밖을 보니 사람들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어요.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의 몸통과 팔다리들이 뚝뚝 하늘에서 떨어지던 그날의 기억은 우리들의 고통스러운 탈북의 기억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어요. 이런 꼴 보려고 그렇게 힘들게 탈북해온 건 아닌데 싶어 절로 눈물이 나데요. 어릴 적 성분 좋은 당원이던 아버지 덕분에 정말 배고픈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그림을 잘 그리는 건 체 당신도 아시지요? 평양미술 대학 조선화학부에 입학하던 날의 기쁨을 잊을 수 없네요. 위대한 혁명 전통을 계승하는 북조선 현대 미술을 창조하겠다는 일념으로 불타올랐었지요. 체 동무를 처음 본 건 김일성대학에 입학하는 외국인 동무들을 열렬히 환영하라는 지시를 받아 우리 화우 동지들 모두 우르르 몰려갔던 김일성 대학 교정에서였습니다. 당신 말고도 한 열 명 정도의 외국인들이 나란히 서 있었어요. 그들은 몽고 루마니아 볼리비아 중국 러시아 등등에서 온 학생들이었어요. 여자가 대부분이고 몇 안 되는 남자들 가운데 당신은 유난히 제 눈에 띄었어요. 사진에서 본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동무를 그대로 닮은 것 같았거든요. 두 번째 체 동무를 본 건 조선화를 배우러 우리 평양미술대학 조선화학부에 당신이 나타난 같은 해 가을이었습니다. 당신은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그 체격 좋은 몸 선을 드러내며 우리 조선화학부 여학생들 마음을 설레게 했지요. 외국인과는 눈도 마주치지 말고 그냥 묻는 말에만 간단하게 답하라는 학교 정책에 따라 저는 유독 제게 다가와 묻는 당신의 질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답했습니다. 당신의 첫 질문은 이런 거였습니다. 풍경화를 그럴듯하게 그린 제 그림을 바라보며 당신은 서툰 조선어로 이렇게 물었지요. “이 아름다운 곳이 어디죠?” 저는 묘향산이라고 답했어요. 당신은 다시 그곳을 가보았는지 물었어요. 저는 그냥 가보지도 못한 묘향산을 가본 듯 고개를 끄덕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