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아직도 나는 당신을 이렇게 부릅니다. 체 동무,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은 모르십니다. 사랑하는 체 동무, 동무라는 말을 해본 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저는 이제 당신이 알던 태옥 동무가 아닙니다. 명품 백을 들고 뉴욕의 5번가를 뽐내며 걸어가는 저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는지요? 체, 우리 친구들이 학교 교정에서 당신을 멀리서 바라보며 “체 게바라 동무 정말 멋지지 않네?” 하던 기억이 바로 어제 같은 데, 어언 20년이 흘렀네요.
체, 당신과 나 사이의 우리 딸이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무 살 생일을 며칠 지나지도 않아 대학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이 막혀 쉴 수가 없는데, 지금 제 눈앞에 어른거리는 얼굴은 체, 당신의 얼굴뿐입니다. 이러려고 그 힘든 탈북을 해서 중국에서 숨어 살다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살았는지 눈앞이 캄캄하네요. 미안해요. 체. 당신의 딸이라고 믿고 싶은 저의 상상을 용서해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던 태옥은 가족들을 버리고 남하한 당 고위 간부였던 큰아버지 때문에 온 가족이 모두 수용소로 가게 된 처지였지요. 그런 우리 가족을 살려준 사람이 어제 세상을 떠난 딸아이의 아버지였어요. 살기 위해 그러긴 했지만 저는 그 사람과 자는 동안 내내 당신을 상상했어요. 체 동무가 나를 뒤에서 껴안는다. 체 동무가 내게 그 뜨거운 입술을 포갠다. 멀리서 당신을 바라보며 애태우던 스무 살, 제가 가고 싶던 유일한 나라는 당신의 고향 쿠바였어요.
당신이 저를 바라보며 지어준 그 미소, 그 미소만 생각하면서 저는 평생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곤 했어요. 하지만 맨 처음으로 제 모든 것을 허락하고 싶던 당신은 저 아닌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죠. 당신이 1994년 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쿠바 대사의 아들로 김일성대학에 유학을 왔던 첫날, 저는 멀리서 당신을 바라보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답니다.
외국인을 보면 못 본 듯 지나치라는 당의 명령으로 가까이 갈 수는 없었지만, 서로 지나치면서 체, 당신이 제게 체 게바라가 그려진 쿠바산 부채를 선물했던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저의 일부러 한 냉정함이 당신이 딴 사람을 바라보게 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아- 한 많은 내 인생, 딸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아이였어요. 뉴욕에 세탁소와 식료품가게를 여러 군데 운영하던 친척네 식료품가게에서 밤낮없이 매니저로 일하며 딸아이를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시킨 날, 저는 당신을 생각하며 울었어요. 참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당신은 멀찌감치서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부채를 제 손에 쥐어 주고는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듯 멀어져간 게 전부인데, 정말 그것뿐인데, 당신을 제 딸의 아비로 생각하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내 사랑 체 동무, 북조선에 살 때는 그렇게도 징그럽던 동무라는 말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인간은 참 알 수 없는 동물인가 봅니다.
그리고 제가 알게 된 건 인간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동물이라는 것이죠. 그저 밥만 먹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어딘가 꼭꼭 숨어 있던 제 욕심은 배부르니까 다음 단계로 또 다음 단계로 계속 커지는 것이었어요. 그 욕심은 점점 커져 쿠바에 살고 있을 당신을 꼭 찾고 싶다는 희망으로 밤잠을 설치곤 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딸아이는 이렇게 물었어요. “엄마, 쿠바 사람 호세가 우리 아빠라는데 왜 난 한국 사람처럼 생겼어?” 그리고는 또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엄마 쿠바 가보고 싶다. 가서 우리 아빠 ‘호세’를 찾아보고 싶다.”
딸아이는 체 게바라의 광팬이었어요.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반미를 부르짖는 탈북 뉴요커, 그 애가 바로 제 딸 아이였지요. 어느 날 어린 딸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와 제게 말했어요. 전 인류의 영웅 ‘체 게바라’는 미국 CIA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죠. “그건 잊어야만 할 너무도 옛날 일이고, 훨씬 더 나쁜 건 삼대 세습을 하면서 인민들을 굶기는 김씨 왕조라고. 그리고 네 아빠 ‘체 게바라’는 쿠바에 살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