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을 자던 선이의 남편 사무엘이 변사체로 발견된 건 쉬리의 자택 가시나무 아래 벤치 위에서였다. 입술에서 피가 흘러 하얀 셔츠를 약간 물들였다, 그 뿐 고통스러웠던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혹시나 심폐소생술로 살아나지 않을까 해서 바오밥이 부랴부랴 나이로비로 날아가 싣고 온 젊은 의사는 심장마비로 이미 사망했다고 말해주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선이와 바오밥은 쉬리의 제일 나이든 주술사를 불러 장례절차를 밟았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른 오후 아무것도 입히지 않은 상태로 시신을 땅에 묻는다. 죽은 사람이 내세에서 재탄생한다고 믿는 탓이다. 아프리카에는 생전의 망인이 내세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식물이나 동물 모양으로 관을 만들어 매장하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다. 바오밥이 선이에게 부탁한 건 바오밥나무 모양의 관을 만들어 그 속에 사무엘을 넣어 하늘나라로 보내는 거였다. 바오밥은 양부모의 유골을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 뿌리깊이 묻었던 기억이 났다. 사실 그는 요란하지 않은 기품 있는 한국의 백자 유골함에 넣어 양부모의 유골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렇게 못한 걸 그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었다. 죽은 자는 너무 멀리 있다. 그들은 얼마나 외로울까?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그렇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죽은 자는 죽으면 다 끝이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를 잊기 위해 얼마나의 세월이 필요한 걸까? 생전에 사무엘은 바오밥나무를 보러 마다가스카르에 가는 게 꿈이었다. 바오밥은 바오밥나무와 똑같이 닮은 관을 주술사에게 부탁해서 그 속에 사무엘의 나신을 넣어 땅 속에 묻었다. 아주 많은 몇날 며칠이 흐르면 사무엘이 바오밥나무로 환생할 것을 바오밥과 선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이후 시간은 더디 흘렀다. 선이는 매일 울었고, 바오밥은 우는 선이 곁에 머물렀다. 쉬리의 밤은 언제나 수많은 별들로 웅성거렸다. 바오밥은 매일 밤 별들로 샤워를 하며 우는 선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사무엘 대신 그녀 곁에 아주 머무르면 안 될까? 매일 밤 쏟아지는 별들처럼 그녀 주위에 머무르면 안 될까?
하지만 선이는 마치 성처녀처럼 자신의 주위에 후광을 발하며 바오밥으로 하여금 한 치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먼 그대였다. 그대여 내게 10센티미터만 가까이 가도록 허락하라. 아무리 바오밥이 주술을 외워도 그건 꿈속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경비행기에 선이만 태우고 한없이 날다가 지구 별 어디에 떨어져도 좋았다. 그곳이 외계인들 어떠랴? 하긴 바오밥이 살아온 곳들은 어릴 적 떠나온 이래 늘 낯선 외계였다. 화성인들 수성인들 지금은 사전에서 사라진 명왕성인들 그렇게 낯설었을까? 죽음은 먼 단어 같지만 늘 우리의 주변을 날아다니는 생명체들, 나방이나 파리나 모기나 귀뚜라미나 바퀴벌레를 닮았다. 해로운 곤충과 이로운 곤충을 아무리 구별하려 해도 때로는 착각하기 마련이다, 바오밥은 잠 안 오는 밤에 낯선 벌레들이 출현할 때마다 그게 마치 양부모 같아서 사무엘 같아서 어쩌면 벌써 죽었을 지도 모르는 누이와 어머니와 할머니로 환생한 것 같아서 그냥 물끄러미 내려다보기 일쑤였다. 시간은 매 순간 심장박동소리처럼 흘러가고 있었고, 선이와 바오밥은 사무엘을 잊지 못한 채 그해 겨울을 보냈다. 크리스마스가 와서 쉬리의 주민들은 축제를 벌였다.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무슨 의미일까? 선교사들이 들어와 가르쳐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남자가 태어난 날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쉬리의 주민들은 축제를 벌였다. 가시나무들이 멀리서 모래 바람을 싣고 와 쉬리의 사막은 쓸쓸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사랑했던 죽은 사람들이 멀리서 보내는 편지 같았다. “바오밥아 잘 있니? 양부모라고 불리는 건 싫구나. 너를 많이 사랑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네가 뿌리 깊이 뿌려준 탓으로 이제 바오밥나무가 되었구나. 한 번 보러오렴, 네가 사랑하는 선이의 남편 사무엘도 바오밥나무 모양으로 짠 관에 묻혀 그 영혼이 이곳으로 날아와 우리 곁에 있단다, 선이와 함께 우리를 한 번 만나러 오렴. 정말 보고 싶구나. 엄마 아빠가.”
바오밥은 꿈속에서, 아니 환한 대낮에 선이를 곁에 태우고 바오밥나무를 보러 마다가스카르의 무른다바를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