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밥은 어느 날 꿈속에서 선이를 안았다. 작고 마른 선이의 몸은 오래도록 잊고 있던 바오밥의 관능을 깨우지 않았다. 처음 만나 불꽃 속으로 뛰어 들어간 엘리노어와는 딴 판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선이를 꼭 껴안은 채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경험들은 얼마나 때마다 다른 것일까? 바오밥은 잊고 있었던 누나를 기억했다. 왜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건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누나- 하고 발음하자 눈물이 났다. 누나처럼 다정한 낱말이 이 세상에 있을까? 누나라는 다정한 어감은 영어로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못 먹어서 비쩍 마른 누나, 늘 배가 고프면서도 동생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던 누나, 맨날 헌 옷 한 가지만 입던 누나, 그 누나를 잊고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누나가 떠오른 건 꿈속에서 선이를 안고 난 뒤였다. 누나처럼 가벼운 선이, 누나처럼 따뜻한 선이, 누나처럼 보고 싶은 선이, 어릴 적 어머니를 꼭 닮은 선이. 이 세상의 모든 입양아는 자신이 사생아였을 거라고 상상한다, 불쌍한 어머니가 기를 수 없어서 버린 아이, 어쩌면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어버린 조종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저 넓은 하늘을 그렇게 짝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하늘을 향한 외로운 짝사랑에 비하면 선이에 대한 짝사랑은 각설탕처럼 감미로웠다. 각설탕이라는 걸 미국에 온 뒤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바오밥은 또렷이 기억했다. 울 때마다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던 하얀 각설탕을. 각설탕을 입에 물고 잠이 들면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과연 하느님은 진짜 있을까? 파일럿 선교사가 된 뒤에도 그는 혼자 있을 때마다 되물었다. 외로울 때마다 바오밥은 전도서를 읽었다. “헛되고,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다 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면 다음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떴다 지는 해는 다시 떴던 곳으로 숨 가삐 지고 남쪽으로 불어갔다. 북쪽으로 돌아오는 바람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구나. 강물은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흘러내리는 것을. 세상만사 속절없어 뭣이라 말할 길이 없구나. 아무리 보아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수가 없고 아무리 들어도 듣고 싶은 대로 들을 수 없다. 지금 있었던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
전도서를 읽을 때마다 바오밥은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갔던 어느 조그만 절의 풍경을 떠올렸다. 눈이 왔었고 동승이 눈을 쓸고 있었다. 법당 앞에는 하얀 백구 두 마리가 마치 극락세계를 지키듯 햇빛 속에 앉아 졸고 있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인간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바오밥은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갔던 겨울 산사의 풍경이 가끔 그리웠다. 어쩌면 그 곳에서 어머니를 따라온 선이의 어릴 적 얼굴을 본 것도 같았다. 아니 할머니와 함께 간 겨울의 산사에서 동승과 함께 만든 눈사람이 생각났다. 바오밥의 마음 속 사진 속에 눈사람과 동승과 어린 누나의 얼굴이 찍혀있었다. 마치 선이의 얼굴을 똑같이 닮은 누나, 어머니의 얼굴을 똑같이 닮은 선이.
선이와 선이의 남편인 젊은 한국인 목사는 바보밥의 마음을 전혀 눈치조차 챌 수 없었다, 바보밥이 선교사들을 태우고 시리에 갈 때마다 밤새워 이야기나 하자고 졸라댔다. 다른 한국인 선교사들이 술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는 것과 달리 그는 남아프리카 산 와인을 좋아했다. 선이는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지만 더듬거리는 영어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줄 알았다. 어쩌면 소통이란 상대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 보다 어떤 내용을 지닌 사람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 바오밥은 자신의 진짜 이름 데이빗 대신 바오밥이라고 말해주었다. 한수라고 말해줄 걸 싶기도 했다. 선이의 남편 삼열은 자신을 사무엘이라 부르라 했다. 바오밥이라는 이름을 듣자 사무엘은 “아- 그 크고 힘센 바오밥?” 했었다. “그 나무 하느님이 실수로 땅에다 거꾸로 심은 나무죠?” 하면서 그는 해맑게 웃었다. 높이가 18미터에 기둥의 지름이 9미터나 되는. 수명이 몇 백에서 이천 년에 이르는 그 신기한 바오밥 나무를 사무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남아프리카산 와인을 한 병 따서 둘이 마시며 새벽이 오도록 이야기를 하곤 했다. 자신의 아버지도 목사시고, 할아버지도 목사셨는데, 6·25 때 북한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했다. 신도들을 피신시키느라 먼저 가 있으면 사흘 있다 오신다던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와 삼촌과 함께 남하한 사무엘의 아버지는 다시는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지금도 식구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마다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한다고도 했다. 다섯 살 남짓 했던 사무엘의 아버지는 할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딱 한 장 남아있는 할아버지의 흑백사진을 지갑 속에 넣어 다니신다고도 했다. 바오밥은 사무엘이 부러웠다. 그런 아버지와 사진 속의 할아버지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게다가 선이의 남편인 그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바오밥은 선이 부부에게 자신의 슬픈 역사를 들려주었다. 그러면 선이 부부는 눈에다 가득 눈물을 담고 바보밥을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그들이 외로운 바오밥의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