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랑하는 건 어쩌면 쉬리가 아니라 비행이었다. 그렇게 날아갔지만 도착하자마자 그를 감싸 안는 건 가시나무와 별들 외엔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의 싸한 외로움이었다. 밤에는 별들이 그렇게 풍성한 광채를 내뿜는 곳, 하지만 날만 밝으면 그곳은 헐벗은 알몸을 드러내고 삶의 척박함에 관해 끝없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는 쉬리의 밤에 머물다가 해가 뜨면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에 그곳을 떠나는 일이 많아졌다. 천사 같은 아이들의 눈동자도, 슬그머니 그의 손을 꼭 잡는 아이들의 부드러운 손의 감촉도, 아이들이 그린 키 작은 가시나무 그림들도, 엘리노어의 기억과 함께 다 잊은 것처럼. 그는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그를 척박한 아프리카 땅으로 오게 한 힘이 하느님이었는지 외로움이었는지, 아니 매순간 변화하는 세상과 경쟁하기 싫어서 감행한 도피였는지, 그저 키 큰 바오밥 나무 한 그루였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시 혼자가 된 이후 바오밥은 머릿속이 더 맑아졌다. 둘이 있을 때는 생각하지도 않던 일들을 일부러 멀리서 불러왔다. 서랍장 같은 머릿속을 수없이 많은 서랍으로 나누고 각 서랍 속에 이 생각을 넣었다가 다른 서랍으로 옮기고, 저 생각을 또 먼저 서랍에 넣고, 그것을 다시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러면 시간이 잘 갔다. 그는 시시각각 다른 색깔로 외로웠다. 빨간 고독, 푸른 고독, 하얀 고독, 무지개 색 고독...... 그 외로움이 가끔은 그를 청명하게 깨어있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외로워도 행복할 때는 오직 비행을 할 때였다.
비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릴 때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던 유태인들을 떠올렸다. 게슈타포가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잔뜩 짐을 싸서 집을 나섰을 것이다. 짐 속에는 중요한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으리라. 보석과 돈과 자신이 지닌 가장 값진 것들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하지만 아우슈비츠로 가는 먼 길에 하나씩 둘씩 버리고 정작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짐은 물론 몸에 걸친 옷가지와 안경마저 뺏겨버린다. 우리가 이 사연 많은 삶을 하직할 때도 똑같을 것이다. 물건만 짐이랴. 쓸 데 없는 집착과 미련과 욕심, 그 모든 것이 짐일 것이다. 그는 가끔 서랍 깊숙이 물건을 잘 치워놓고 그 물건을 몇 시간 동안이나 찾곤 했다. 물건뿐 아니라 생각도 그랬다. 곰곰 생각해보면 꼭 해야 할 일들 중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소유하고 있는, 소유하고 싶은 그 많은 물건들 중 대부분은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대부분이듯이. 짐을 꾸릴 때마다 마지막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칫솔과 치약이었다. 하지만 그 까짓 게 뭐가 중요하랴? 그저 살아있는 몸 하나면 족했다.
세상의 모든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구름 위로 승천하는 기분은 언제나 처음인 듯 새로웠다. 새하얀 눈사태가 난 것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 속을 유영하는 작은 비행기는 물속에서 재주를 넘는 돌고래 같았다. 가끔 비바람 불고 천둥번개 치는 날의 하늘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 넓은 하늘길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구름 속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멀지않은 거리에서 꿈속에서처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수야. 속도를 낮춰라.”
그러면 거짓말처럼 천둥 번개가 그치고 거대한 산맥들이 평온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푸른 산맥들을 잔디삼아 하늘길을 달렸다. 그에게 삶은 여행이었다. 여행이 좋은 건 살아있다는 감각을 최고의 밀도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바오밥은 가끔 자신의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비행을 하다가 죽으리라. 하지만 그는 이제 그렇게 젊지 않았다. 이제 죽어도 너무 오래 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키가 큰 바오밥 나무들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양부모의 혼을 묻은 곳, 그는 마다가스카르의 무른다바 지역, 캄캄한 어둠 속에 거대한 전신주들처럼 죽 서있는 바오밥 나무들이 있는 풍경을 떠올렸다.
해가 뜨면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바오밥 나무들은 변함없이 하늘을 우러르며 서있으리라.
그 즈음, 어릴 적 마지막인지도 모르고 이별을 한 그리운 어머니가 부쩍 꿈속에 자주 나타나셨다. 바오밥의 유일한 친구 빌이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떠난 것도 그 때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경비행기에 한국인 선교사들을 태우고 쉬리를 향하던 날, 거짓말처럼 바오밥의 눈앞에 어릴 적 기억 속의 젊은 어머니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