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밥은 어릴 적의 한국이름 ‘한수’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미국으로 입양온 뒤 누군가 ‘한수야.’ 하고 불러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어릴 적 그는 점보는 집이 죽 늘어서 있던 미아리에 살았다. 미아리고개는 그에게 영원히 가슴 아픈 상처였다. 그가 태어난 미아리는 메아리로 변형되어 기억에 남았다. 메아리, 그리운 어머니의 메아리, 가난했던 미아리의 메아리. 어릴 적에 먹었던 음식들이 또렷이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메아리처럼 어슴푸레 그의 혀 속에 남았다. 그래서 나이 들어 맨 처음 시카고의 한국 음식점에 가서 먹었던 누른 밥과 된장찌개의 맛이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이름 모를 그리운 맛들이 거리를 이루듯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음식의 이름들은 된장 시래기무침과 콩나물 무침, 떡국과 잡채, 빈대떡과 송편 등등이었을 것이다. 고소하던 누른 밥에 총각김치를 얹어주던 할머니의 얼굴이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그 맛의 감각은 그의 혀 속에서 영원할 것이었다.
어쩌면 어머니와 모국어와 제 나라 음식을 잊지 못하는 게 바오밥의 미국생활에서의 콤플렉스였을까? 하지만 세상은 무섭게 달라져서 한국 음식이 세계 곳곳에서 각광을 받는 시대가 왔다. 아프리카에서조차 한국인 선교사들이 만드는 눈물이 날 것 같은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안타나라리보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음식점 ‘아리랑’이 있었다.
그는 안타나라리보에 갈 때마다 바보밥 나무를 보러 떠나기 전 창밖으로 운치 있는 마다가스카르 식 지붕들이 내다보이는 ‘아리랑’에 들러 한국음식을 먹었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고등어구이, 김밥, 떡볶이 등등. 그곳에는 메아리처럼 어렴풋한 기억 속 어릴 적에 먹었던 모든 음식들이 다 있었다. 산다는 건 그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좋아하는 사람과 가고 싶은 곳을 헤매다 죽으리라. 하지만 늦게 기적처럼 만난 아내 ‘엘리노어’는 한국음식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혼자 살면서 그는 어릴 때 먹었던 흐릿한 기억으로 한국음식 비슷한 퓨전음식을 즐겨 해먹었다. 같은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이 하는 삶은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다른 불만은 하나도 없었다. 천사와 같이 가는 평화롭고 쾌적한 길이 계속 이어지리라고 생각한 건 그의 착각이었을까? 이번에도 불운이 찾아왔다. 그날도 그들 부부는 오지로 들어가는 선교사들을 싣고 쉬리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빌과 함께 한국인 선교사들이 가져온 한국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그날 저녁 아내가 유난히 애정을 가졌던, 할머니와 함께 단 둘이 살던 소년이 전갈에 물렸다. 쉬리에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바오밥 부부는 소년을 경비행기에 태워 나이로비를 행해 야간비행을 떠났다. 밤하늘의 수없는 별들을 바라보며 그들 부부는 숨이 막히는 절절함으로 소년의 무사함을 빌었다. 하지만 나이로비 국립병원의 응급실에 실려가 그 밤을 꼬박 새우고 난 새벽 소년은 숨을 거뒀다. 그날 이후 엘리노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가 없는 그들 부부가 마치 아들처럼 생각하던 소년이었다. 아프리카 여행길에 하느님을 만나 쉬리에 정착해 산지 오랜 사진작가, 바오밥의 가장 가까운 친구 빌은 일주일에 두 번 목동학교를 열었다. 쉬리의 집집마다 가장 영리한 아이들은 하루 종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양을 치는 목동 일을 했다. 하루 종일 햇볕이 내려 쪼이는 쉬리에도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나무그늘이 있었다. 빌은 그 그늘아래 목동 일을 하는 영리한 아이들을 불러 모아 영어와 산수를 가르쳤다. 그 중에 그림을 참 잘 그리는 소년이 하나 있었다. 바오밥 부부가 쉬리에 들어갈 때마다 엘리노어는 소년에게 정성껏 그림을 가르쳤다. 바로 그 소년이 전갈에 물려 죽었다.
이후 엘리노어는 없던 우울증이 생겼다. 말이 서서히 없어졌고, 멍하니 오래도록 벽만 바라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바보밥을 벽처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바오밥, 미안해요.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당신 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해 미안해요. 한시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뉴욕으로 돌아갈래요. 당신도 나와 함께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데이빗, 바오밥, 그레이트 프린스’, 그건 당신이 결정할 운명이어요. 그래도 난 당신이 오길 밤이나 낮이나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엘리노어는 뉴욕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