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차분한 마음으로 부스러질 것만 같은 낡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넘기며 한 번 두 번 세 번을 다시 읽었다. 결코 남의 이야기일 수 없는 슬픈 가족사가 그녀의 마음속에 오랜 가뭄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누구의 가족사인들 슬프지 않으랴? 더구나 전쟁을 겪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가족사는 켜켜이 얼룩진 눈물의 교향곡이다. 가끔 전화가 걸려오기도 하지만, 그녀는 아주 잊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결혼을 하면서 그녀는 가족이 생겼다. 어머니가 재혼을 한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가족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가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라는 사실이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안경원에 출근하여 쇼 윈도우 속의 안경들이 제 자리에 있는지 점검했다. 가끔은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렌즈를 닦기도 했다. 요즘 부쩍 손님이 없었다. 불경기 탓이라지만 아마도 라식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직 햇볕이 강하지 않은지라 선글라스를 사러 들어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손님이 없는 날은 그녀는 혼자만의 환상에 빠져들곤 했다. 거짓말처럼 안경원에 나타났던 그녀의 첫사랑, 아니 생애 단 한 번뿐인 사랑인 남편이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게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믿기지 않았다. 어느 비오는 오후, 고등학교 시절 그녀에게 미분과 적분과 삼각함수를 가르쳐주던 앳된 남편의 모습이 안경원의 유리창 밖에 나타나 한동안 미동도 않고 서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서있는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죽은 거 맞아?” 남편은 말이 없었다. 단지 좀 추워보였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다큐 필름 속에서 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가본 것과 뭐가 다를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듯 남편은 아프리카에서 걸린 열대병을 앓다가 어이없이 죽은 게 아니라, 그저 그녀와 두 번 이혼한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남편과, 또 한 번은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남편과 두 번째 이혼한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 남편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며칠 뒤 주말에 그녀는 시아버지의 서재 낡은 서랍에서 발견한 낡은 편지뭉텅이를 들고 시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나주의 작은 암자로 내려갔다. 왜 이제 왔냐며 반기는 시아버지의 곁에는 나이 든 비구니 스님과 젊은 스님이 가족처럼 화기애애하게 앉아있었다. 대뜸 시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여보. 여기 이 사람이 내 동생이네. 그러니까 자네의 하나 뿐인 시아주버니지.” 젊은 스님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이해하라는 듯 눈길을 보냈다. 그 젊은 스님이 시아버지의 어머니가 낳은 시아버지의 동생임이 틀림없다는 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참 많이 닮아있었다. 아니 그들은 같은 사람의 젊은 시절 얼굴과 나이 든 얼굴처럼 보였다. 이 복잡한 인연의 실타래에 그녀가 끼어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작 그녀의 남편은 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것이다. 왜 남편이 치매를 앓는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아내라고 착각하는 현상을 질투하며 아프리카로 떠났는지 문득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오해를 한 건 남편이 아니라 그녀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그렇게 무거운 짐을 맡기고 싶지 않아서. 누군들 타인의 마음을 알건가? 제 마음도 모르면서. 그녀는 열대병에 걸려 돌아와 자신 곁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 남편과 시아버지가 두 사람이 아닌 같은 사람으로 생각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누가 누구의 아바타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남편이 죽어가며 아버지를 부탁한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않았지만, 그녀는 시아버지를 남처럼 버려둘 수 없었다. 나이 든 비구니 스님은 그녀에게 시아버지의 어머니에 관해 길고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아버지의 어머니가 목사였던 남편과 소금 장인이었던 두 번째 남편 중 누구를 더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 다 사랑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절벽에서 사체로 발견된 시어머니를 업고 떠나는 목사님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던 건 시아버지를 진심으로 길러 준 소금 장인 의붓아버지였다. 그 다음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죽은 줄 알았던 시아버지의 어머니는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는 과거 없는 여인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그녀를 안고 섬을 떠났던 목사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아무 기억도 하지 못하는 시아버지의 어머니는 나주의 암자에 맡겨져 아이를 낳고, 그 아들이 그 암자의 젊은 지주스님이 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뿐이다. 그 암자에서 오랜 세월 공양주 보살을 하며 살아온 그 아픈 역사를 곁에서 계속 지켜 본 사람이 바로 나이든 비구니 스님이었다. 아들인 주지 스님과 함께 시아버지의 어머니임종을 지켜준 분도 그 분이었다. 임종하기 얼마 전에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서 증도에 두고 온 아들을 너무나 보고 싶어 했던 그 슬픈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밤새 울었다. 모든 생물체의 이야기는 슬프다. 반복되는 슬픈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삶에 관해 사람들은 드라마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우리 모두의 삶의 이야기다. 부쩍 피곤했던 그녀는 반은 졸면서 쉬엄쉬엄 시아버지의 어머니의 슬픈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면서 시아버지의 의붓아버지가 남긴 편지 중 한 구절이 계속 맴돌았다. “나는 평생 소금쟁이로 살아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거라.”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체 시아버지의 의붓아버지는 시아버지의 진짜 아버지인 목사님과 함께 세운 섬 교회를 가꾸면서 늙어갔다. 그 곳에 가서 기도를 하는 일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교회는 그가 남긴 자산으로 섬 아이들의 장학금을 주는 일 등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혼한 남편이 다시 돌아와 병들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는 이혼하든 사별을 하든 다른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짐의 방법이 다를 뿐, 그녀는 그저 죽은 남편과 두 번 이혼한 것뿐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두 번 이혼을 하고 남편은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 가끔 편지를 보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돌보아줘서 고맙다는 구절을 한 번도 쓰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강남의 안경원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순간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써 보낸 그의 글씨가 눈에 보듯 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