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에 관한 명상 6회
그렇게 K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고, 이주일 후에 다시 뉴욕에 왔다.
이주 후에도 여전히 눈부신 봄날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쌀쌀맞은 노처녀를 닮은 맨해튼의 봄날은 가끔은 여전히 쌩쌩 찬바람이 불었다. 유난히 썰렁한 봄날 저녁에 책방 카페에서 만난 K와 나는 마치 처음 본 사람들처럼 서먹서먹해하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애꿎은 창 밖 풍경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 밖 거리 모퉁이에 개를 데리고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지의 행색이 역력했지만 멀리서도 느껴지는 그의 분위기는 떳떳하고 여유가 있었다. 바쁜 걸음으로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뭐가 그렇게 바빠? 인생 별거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남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그 곁에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앉아있는 커다란 개를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동전 한 닢이라도 주고 갔다.
K와 나는 모퉁이에 앉아있는 개와 남자를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K는 안경을 치켜들며 헛기침을 했다. 순간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내게 전달이 되었다. 그는 실험이 계속되기를 원했고, 나는 다시는 그와의 실험을 되풀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순간 나는 잠시 K와의 앞날을 상상해보았다. 우리는 근사한 차를 빌려 미국 전역을 쏘다닐 것이다. 그러고 나면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을 것이고,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내게는 별 의미도 없는 일을 뼈 빠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K는 늘 그렇듯 빈둥거리며 돈을 꾸러 다닐 것이다.
그는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했다. 길어야 일 년이나 육 개월, 하루 만에 그만두는 일도 허다했다. 하지만 내 거절의 이유가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나 자신 그때는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뒤에도 더 확실히 안다고 생각했다. 그 단 한 번의 실험을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하지만 K는 언제나 멋졌다. 돈을 꿀 때도 언제나 당당했고, 실험을 거절당했을 때도 ‘노우 프라블럼.’하면 끝이었다. “그럼 우리 자장면이나 먹으러 갑시다.” K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그 순간 우리는 자장면이나 먹으러 가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날따라 자장면은 많이 불어 나왔다.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씹히다가 뱃속에서 한없는 부피로 퍼져갈 것만 같았다. K의 삶의 무게가 자장면에 얹혀 내 뱃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우리들의 삶의 무게가 엇비슷한 것이어서 그 어느 쪽도 다른 쪽의 짐을 덜어줄 수 없는 처지였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맞들어서 두 배로 무거워지는 물건도 너무 많은 것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옛날 옛적에 제가 태어난 땅을 떠나 먼 나라 낯선 곳에서 둥지를 틀은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서 시간이 정지한다는 사실을. 남들이 다 잊고 사는 아픔도 그들은 절대 잊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머물러버린 시간, 더 이상 자라지도 늙지도 않는 시간,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만 팍삭 늙어버리는 그 두 배의 슬픔을 사람들은 모른다. 열두세 살 나이에 한국을 떠나온 내게 가장 생각나는 맛있는 음식이 겨우 자장면이었다는 사실을. 한국에 살던 어릴 적에도 나는 원래 젓가락질을 잘 못했다. 아이보리블랙도 마르스블랙도 아닌 적당히 검은 색깔의 자장면 소스 속으로 나무젓가락을 넣어 휘저어 자장면을 비비는 일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젓가락을 휘저으면서 국수 속으로 난 수없는 구멍 사이로 수없는 길이 뚫려 있었다.
‘이 길로 가면 살고, 저 길로 가면 죽고.’ 자장면을 비비면서 나는 문득 아주 어릴 적에 본 유명한 어느 영화 속에선가 관자놀이에 권총을 대고 쏘는 룰렛 게임이 생각났다.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한 그 영화 속에서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혀 아주 넋이 나간 미군이 몰두했던 그 게임은 총알이 들었으면 죽고 안 들었으면 사는 위험한 게임이었다.
‘죽거나 또 죽거나’ 그 게임의 이름을 지으라면 그렇게 짓고도 남을 일이었다.
내 사랑하는 삼촌이 목숨을 걸고 한 내기가 바로 그 게임이었을지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나는 별 신통한 직업을 찾지 못하고 빌빌거리다가 어느 유대인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문학에 뜻을 둔 내가 그 당시 쓰던 글은 고작 억울한 사람들이 맘대로 써온 글들을 법 조항에 맞춰 다시 쓰는 거였다.
그렇게 재미없는 나날들 사이로 어느 날 아침 K는 들뜬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K의 이름 앞으로 남겨준 시골 땅이 꽤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거였다. 이번에 한국에 나가면 혹시 땅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정말 잘된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거지왕자가 아니라 진짜 왕자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무조건 남이 잘되는 건 좋은 일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건 아주 어리석은 자의 말이다. 남이 잘되어야 나한테도 떡고물이 떨어진다는 걸 우리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남이 잘되는 건 싫은 거다. 앞으로의 시대는 ‘타산적 이타주의’가 지배할 거라는 석학들의 말을 텔레비전에서 흘려들으며 나는 인간의 진화가 마음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남이 잘되어야 돈도 꾸러 오지 않고, 내게 돈도 빌려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K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우리들의 불우했던 이십 세기가 아무 생각 없는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었다.